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보는 법을 왜 굳이 배워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정상 시력을 지니고 있다면 당연히 보는 법을 알고 있는 것 아니냐며 말이다. 하지만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는 물론 소설가 역시 처음부터 다시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본다’는 건 어떠한 상像을 지각하는 것을 일컫는 게 아니다.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카메라는 볼 줄 모른다. 수술로 뇌의 전두엽을 절제한 사람이라도 시각계가 멀쩡하면 카메라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볼’ 수는 없다. 주인 없는 집이나 마찬가지니까(받는 이가 없으면 애초에 신호도 없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오후의 죽음 Death in the After-noon》에는 황소에 넓적다리를 받힌 투우사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일어서자 빌려 입은 두꺼운 잿빛 실크 바지가 흙투성이가 된 데다 완전히 싹 찢겨서 엉덩이 아래부터 거의 무릎까지 넓적다리뼈가 밖으로 드러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쳐다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란 듯 손으로 다리를 가렸다. 그 사이 사람들은 투우사를 응급실로 데려가기 위해 울타리를 뛰어넘어 달려갔다.”
헤밍웨이의 투우사 친구들은 이 투우사가 프로로서 해서는 안 되는 어리석은 짓을 했고 그에 응당한 결과를 얻은 것뿐이라며 어떠한 동정의 빛도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헤밍웨이는 “내 입장에서는”이라며 이렇게 썼다.
나는 투우사도 아니고 투우보다는 자살 행위에 훨씬 흥미를 느끼는 사람인지라 문제라고 느낀 건 어떤 묘사 하나였는데, 그것 때문에 한밤중에 깨어나 내가 진짜 본 게 분명하고 기억도 분명히 하고 있는 그 무엇이 과연 뭐였는지 떠올리려 애쓰다가, 마침내 전부 기억해냈고, 알아냈다. 그 투우사가 일어섰을 때,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더러웠으며, 실크 바지는 허리에서 무릎까지 뜯어져 벌어져 있었고, 빌려 입은 그 바지는 더러웠고, 찢어진 속옷도 더러웠는데, 그런데 드러난 넓적다리뼈는 깨끗해도 너무 깨끗해서 견딜 수 없이 순백했고, 바로 이게 내게 중요한 점이었다.
중요한 건 묘사가 아니라 의미라는 데 주목하자. ‘의미’, ‘정보’, ‘아름다움’, 이 모든 건 결국 같은 것이다. 어떤 예술 작품을 잘게 쪼갠 뒤 그 조각들을 임의로 다시 배치한다고 상상해보자. 단어나 모양새가 무의미하게 뒤섞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달하려는 정보도 없고 추하기만 하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1년가량 미술을 공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도 화가처럼 세상을 보고 있다. 나에게 나무 한 그루는 유달리 복잡하면서도 아름다운 구조물이자 복잡하고 멋진 무늬의 빛깔을 지닌 대상이다.
우리 집에서는 유리로 된 부엌문 너머로 라일락 덤불과 거기 있는 새 모이통에 날아드는 온갖 작은 새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요즘 내가 매일 아침 한 시간 넘게 그 덤불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뭇가지와 잎사귀의 아름다운 빛깔을 보고 있노라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느껴진다. 무늬가 복잡해서 절대 싫증날 일이 없다(나무가 보이는 창가에 책상을 놓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몇 년 전에 깨닫기도 했다).
한번은 라일락 덤불을 그리려고 하다가 그 모든 복잡성에 얼마나 많은 질서가 숨어 있는지 실감하기도 했다. 줄기가 중앙에서부터 뒤로 젖혀지며 뻗어 나오는데, 모든 줄기에 달린 굵은 나뭇가지나 잔가지가 각각 필요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바깥 줄기가 안쪽 줄기보다 적당히 더 젖혀져 있다. 줄기와 나뭇가지 사이의 각도도 정확히 정해져 있다. 아래쪽 가지가 벌어져 있는 각도는 크고, 위쪽 가지가 벌어져 있는 각도는 그보다 작다. 제멋대로인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 모든 가지의 끝은 보이지 않는 경계선에 이르러 멈춘다. 제멋대로 무성하게 뻗은 것처럼 보이는 라일락 덤불이 실은 엄청난 법칙에 따라 자라고 있는 것이다.
미술을 배울 때도 이러한 점을 지각하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리는 법을 배우고 싶어서 덤볐다가, 정확히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이치를 알기 위해 마음을 쏟으면 쏟을수록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
자연의 법칙 즉 각 부분이 전체와 질서정연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은 과학자뿐 아니라 화가, 조각가, 음악가, 그리고 작가에게도 깊은 만족을 준다. 문득 우주의 질서를 발견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그 순간 마치 어떤 에너지가 자신을 강타한 것처럼 눈앞에 빛이 번쩍이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심리학자들은 이를 ‘아하 반응 Aha reaction’이라고 부른다).
단편소설은 다른 형식의 재현예술(눈에 보이는 세계를 묘사하는 예술)과 달리 반드시 인물을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다시 말해 회화의 풍경화나 정물화에 해당하는 것이 소설에는 없다(여기서 ‘인물’이 꼭 사람은 아니다. 리처드 애덤스의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Watership Down》에서처럼 토끼일 수도,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일 수도, 조지 R. 스튜어트의 《불 Fire》이나 《폭풍우 Storm》에서처럼 의인화된 자연 요소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물만 달랑 데려다 놔서는 그 인물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과학이나 미술이 다루는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도 써야 한다.
이상하게도 형태심리학이 내놓은 연구 결과는 다른 분야의 연구 결과들에 비해 대체로 작가에게 별 소용이 없다. 형태심리학은 우리 자신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내용이 상식과 거의 완전히 겹친다. 행동심리학자들은 쥐에 대해서만 많은 것을 밝혀내고 인간에 관해서는 별로 알아낸 게 없는 것 같다(이런 말을 하면 행동심리학자들은 십중팔구 인간을 대상으로 실험하는 게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꾸할 것이다). 심층심리학 즉 프로이트, 융, 아들러의 심리학은 예외다. 심층심리학은 우리 정신의 무의식적인 부분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체계는 그게 뭐든 작가에게 그 고유의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다. 자연사든 생물학이든 민족학이든 물리학이든 지질학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다채로운 지식이 걸려들 수 있는 지식의 그물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떤 분야의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되려면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모든 방면에 걸쳐 상식 수준의 지식을 갖추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러면 스페셜리스트로서는 보통 간과할 수밖에 없는, 전체를 아우르는 다양한 연결고리를 파악할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단편소설이나 국내 문학의 전문가가 되려고 애쓸 필요도 전혀 없다. 대신에 다양한 소설을 읽어야 한다. 요즘 들어 소설은 거의 읽지 않고 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만 본다고 말하는 습작생을 가끔 본다. 끔찍한 일이다. 의학을 공부하지 않고도 의사가 될 수 있을까? 극을 공부하지 않고도, 심지어 극장에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얼마 전, 내게 소설 작법을 배웠던 습작생이 자신이 쓴 소설을 한 편 보내왔는데 나는 그 소설을 읽자마자 혹시 어느 작가를 롤모델로 글을 쓰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설에 빅토리아풍 클리셰가 가득했는데, 알지도 못한 채 쓴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한 권도 읽지 않았던 거다.
작가가 되려면 실수를 하고 깨달음을 얻는 일에 자유로워야 한다. 외따로 존재하는 건 그 어디에도 없다. 라일락 덤불과 활짝 편 내 손, 그리고 산호의 가지는 모두 관련되어 있다. 존 치버와 플래너리 오코너, 레프 톨스토이, 앨리스 먼로가 쓴 소설들도 마찬가지다. 나뭇잎을 흔들면서, 나뭇가지에 달린 잔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을 흔들면서, 거기에 나무 같은 건 없다고 대체 누가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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