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장소: 어디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장소는 소설의 배경 중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리킨다. 먼저, 무대 장치를 떠올려 보자. 커튼이 올라가고, 주인공이 사는 집의 거실이 등장한다. 다 해진 소파에는 과테말라산 작은 융단이 덮여 있고, 벽에는 여행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구석에 스테레오와 음반들이 놓여 있다. 바닥에는 〈선데이 타임스〉가 펼쳐져 있고, 창밖으로는 비상계단과 맨해튼 남부의 스카이라인이 흐릿하게 보인다. 아직 무대 위에 아무도 올라오지 않았지만, 우리는 벌써 이곳에 사는 사람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장소는 지역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 곳 말이다. 일부 작가들은 공간적 배경이 소설을 지배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하기도 한다. 소설은 공간적 배경 속에서 태어나야 하며,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그곳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존 오하라의 〈열망으로 보내는 나날 I Spend My Days in Long-ing〉은 이야기 전체가 호텔 방 안에서 일어나는데, 그 호텔은 클리블랜드 아니면 시카고 아니면 신시내티에 있다. 바로 이 점이 핵심인데, 두 인물 중 한 명은 자신들이 지금 어느 도시에 있는지 기억을 못한다.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세인트피터즈버그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인데, 약간만 변화시키면 완전히 똑같은 내용으로 흘러가면서도 19세기 파리나 런던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장소나 공간이 이야기와 눈에 보이는 관련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며, 소설과 적절히 어울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샌디에이고에서 일어나도 전혀 지장이 없는 일을 괜스레 색다른 배경(태평양 또는 달 식민지)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지 말자. 등장인물이나 이들이 겪는 문제가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라면 장소 역시 친숙해야 한다.
○ 장소 외의 공간적 배경
소설의 배경은 전면과 중앙에 있지 않은 것, 즉 눈에 띄지 않는 것 모두를 아우른다. 풍경, 건축 양식, 기후뿐만 아니라 소설의 밑바탕이 되는 문화, 인물의 과거, 지역사회나 국가의 역사, 사회학, 기술, 철학, 예술, 관습 등 모든 사항을 포함한다.
현대소설의 작가와 독자 모두는 이러한 사항 대부분이 당연히 전제되어 있다고 여기며, 이를 가정한다. 맨해튼이든 마이애미비치든 작가가 그저 단어를 내뱉기만 하면 독자가 배경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채워 넣는 것이다. 물론 작가가 실수를 하면 독자가 바로 포착하기도 한다.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세부 정보를 제시해야만 독자는 작가가 묘사하고 있는 그곳을 정말로 알고 있다고, 방송이나 영화에서 얻은 일반적인 인상에 의존해 쓰고 있는 게 아니라고 신뢰할 수 있다.
앞에서 시점인물이 잘 알고 있는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에 대해 다룬 것을 기억하는가? 똑같은 원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맨해튼에 오랫동안 거주한 사람이라면 수없이 많은 관광객을 매혹하는 맨해튼의 랜드마크를 봐도 보통은 그냥 지나칠 것이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무역센터나 자유의 여신상을 봐도 별 감흥을 못 느낀다. 차라리 매일 아침을 먹으러 갈 때마다 만나는 커피숍 계산대 점원에게 더욱 흥미를 느낄 것이다. 그 커피숍은 어떤 분위기인가? 앨버커키나 시애틀에 있는 커피숍과 뭐가 다른가? 그 점원은 느긋하고 굼뜬 사람인가, 아니면 재빠르고 성급한 사람인가? 커피숍 손님들은 무슨 신문을 읽고 있나? 조명이 밝은가?
판타지소설이나 SF소설에서처럼 배경을 지어내야 하는 경우라면 작가가 할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래도 신경 써야 할 점은 과학적(또는 마법적)으로 가능한지, 모순은 없는지에 대해서뿐이다. 외계행성이나 요정들의 땅에 가본 적이 없기로는 독자도 마찬가지이므로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쓰기만 하면 독자가 거짓말쟁이라고 몰아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동경해마지않든 간에 다른 작가의 소설 속 배경을 따라 쓰는 일은 없길 바란다. 그 작가는 수많은 다른 작품을 보고 또 보며 그와 같은 세부 사항들을 끌어낸 것이다. 그가 그린 배경이 생생하고 세밀한 것은 작가 자신이 소설 속에 쓴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항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 소설을 본보기로 삼아버리면 거기서 뭔가를 뽑아내서 쓸 테고, 그러면 결과는 거친 모조품밖에 나올 게 없다. 꼭 복사기로 복사한 사진처럼 말이다(복사할 때마다 일부 정보는 날아간다).
○ 군더더기 설명을 넣지 않으려면
어떤 장면에서도 모든 것을 완전히 묘사할 순 없다. 일단 그만한 공간이 없다. 이때 배워야 할 게 바로 로빈 스콧 윌슨이 “한정된 예산에 맞춰 세상을 갖추어라”라고 말한 기술이다.
가능한 한 전체적 인상을 강렬하게 주고(“아치형 천장에 지하실 같은 방 안은 메아리로 가득 차 있었다”) 다음으로 핵심적 세부 사항을 약간 보여주어라(“벽에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라는 문구가 스프레이 래커로 쓰여 있고, 누군가 그 밑에 ‘악착같이’라고 갈겨썼다”). 제대로 골라서 내놓기만 하면 나머지는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게 되어 있다.
인물도 마찬가지다. 화가가 읽어보고 초상화를 그릴 수 있을 지경까지 상세히 묘사하지 말자. 인물에 대한 정보가 너무 낱낱이 나와 있으면 사실 짜증을 느끼는 독자가 많다. 그 정보들이 독자 스스로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인물이 처음 등장할 때나 그 후 얼마 안 있어 재등장할 때 한두 문장 정도 덧붙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나이가 많은가 적은가? 키가 큰가 작은가, 뚱뚱한가 홀쭉한가? 머리카락은 금발인가 갈색인가? 이런 정보를 아껴두다가 20쪽을 넘긴 뒤에야 폭로하는 일이 없길 바란다. 독자가 읽으면서 내내 여주인공 머리는 갈색이라고 시각화해왔을지도 모르는데 갑자기 여주인공은 금발머리라고 밝히면 불쾌감을 안기고 만다.
위와 같은 이유로, 너무 늦게 동쪽과 서쪽, 좌우 등을 특별히 지정하지 않도록 조심하자. 주인공이 마지막 서너 쪽에 걸쳐 높은 산의 암벽을 등반하고 있다고 할 때, 갑자기 그가 오른쪽 아래를 내려다본다고 서술하면 독자는 부랴부랴 머릿속에서 주인공의 몸을 반대로 돌려놔야 할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는 독자의 창조적 상상은 되도록 방해하지 않는 게 좋다.
보통은 장소를 그렇게까지 자세히 묘사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세히 몰라도 된다고 단정하고 넘어간다면 그건 실수다. 작가는 부엌 찬장이 어디에 붙어 있고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집 구조를 알아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설 속에 집 이야기가 직접적으로 거의 나오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래야 쓰는 데 자신감이 붙으며, 이 자신감은 독자도 느낄 수밖에 없다. 또한 난처한 실수도 방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0쪽에서는 인물이 부엌에서 식당으로 바로 들어갔는데, 32쪽에서는 복도를 거쳐 들어가는 따위의 실수 말이다.
물론 장소를 상세히 묘사해보고 싶다거나 인물의 약력을 써보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그대로 소설 속에 옮겨놔서는 곤란하다. 이야기 속에 온전히 녹아 들어갈 수 없는 이런 정보 덩어리가 바로 ‘군더더기 설명’이다. 이런 장애물을 애써 넘어가면서까지 글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는 없다. 작가가 배경을 철저히 꿰고 있으면 인물들이 행동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저절로 조금씩 드러나게 되어 있다.
뉴욕의 지하철에 관한 소설을 쓴다고 치자. 처음 한 장을 내리 뉴욕 지하철 체계의 구축 과정, 역사, 운영 방식 등을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바로 군더더기 설명이다. 이렇게 쓰는 대신 시점인물이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내려가게 하면서 그가 보는 것들을 차례차례 묘사하면 어떨까? 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인물이 다시 지하철역을 빠져나올 때쯤엔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하철 관련 정보를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좋은 작가는 군더더기 해설을 장애물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집어넣을 줄 안다. 꼭 넣어야 한다면 말이다. 예컨대, 독자들의 이해가 필수인 어떤 과학적 발견을 중심으로 플롯이 전개되는 소설이 그러하다. 그러나 이보다는 작가가 게으르거나 기술이 모자라서 군더더기 설명을 집어넣는 경우가 훨씬 허다하다. 특히 습작생들이 쓴 글을 보면 이러한데, 정말 아무리 찾아봐도 ‘뾰족한 다른 수가 없을 때만’ 독자 앞에서 구구절절 연설을 늘어놓길 바란다.
○ 장면 밖에 있는 것
풍경이나 도시의 거리를 설득력 있게 그리려면 ‘장면 바깥에 뭐가 있는지’ 우선 알아야 한다. 따라서 작품에 드러날 배경을 다 지어냈다고 해서 손을 놓으면 안 된다. 인물들의 행위가 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그 방 바깥에는 뭐가 있나? 옆 건물은 어떻게 생겼나? 거리는 어떤 모습이고, 동네 사람들은 어떤가? 이런 것들을 알아두면 인물이 행동하는 방식에 반영이 된다. 예를 들어 사는 곳이 택시 기사가 승차거부를 하는 슬럼가 근처라면 인물의 입에서 택시를 잡자는 말은 나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치우고 자리를 만들자
현실 세계는 현실의 사람들과 현실의 물건들로 빽빽이 차 있어 가공의 인물과 가공의 물건이 들어갈 빈 공간이 없다. ‘현실적인’ 소설을 쓰고 싶다면 반드시 여기를 치워서 소설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대도시 한가운데이든 한적한 시골이든 장소를 정했으면 인물들이 서로 만나고 상대할 공간을 확보하자.
가차 없이 확보하자. 만약 실존하는 고층 건물이 등장하는데 2개 층에 근무하는 직원, 비서, 부사장 모두를 내보내야 한다면 그렇게 하자. 시장 집무실이 필요하면 차지하자. 실제 사무실이나 은행을 정확히 있는 그대로 활용하고 싶을 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소설 속 인물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자. 나라 하나를 통째 떼어내 지도에서 없앤 후 그 자리를 가상의 나라로 대체해도 좋다.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에 자주 나오는 ‘요크나파토파 Yoknapatawpha County’가 바로 그가 이렇게 만든 허구의 지역이다. 실제하는 것들을 치웠다는 흔적을 조심스럽게 감춘 후, 그 빈자리를 포위하고, 그런 후 뭐든 마음대로 하면 된다.
배경: 언제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많은 작가가 반사적으로 ‘지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SF소설이나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라면 다른 대답을 할 테고, 그 대답에 결부된 고유의 문제도 함께 등장할 것이다(역사소설에서는 조사하는 일이 주된 문제고, 판타지소설이나 SF소설에서는 지어내는 일이 주된 문제다).
소설의 배경이 뉴욕, 1940년대 후반인데 두 인물이 3번가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한잔하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고가 철도는 지금 거기에 있나 없나? 알아보자. 아니면 앞으로 30년 후 미래의 샌프란시스코가 배경이라고 해보자. 도시가 어떻게 변화했나? 실제 현재 시점에서 논의되고 있는 도시 계획은 무엇이 있나? 소설 속에서 이 계획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국가에는, 세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나? 호황기인가 불황기인가? 기술적으로 어떤 중대한 변화가 있었나? 그 기술은 사람들의 생활 양식, 수송 체계,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오늘날의 샌프란시스코와 30년 전의 샌프란시스코를 대비해보자. 그리고 그 차이를 미래에 투영해보자. 지금과 30년 후의 샌프란시스코는, 적어도 지금과 30년 전만큼의 차이를 보여주어야 한다(실제로는 더 많은 차이가 나야 옳다. 변화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고 있으니까).
∨ 인물은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어떻게 이동하나?
∨ 어떤 직업들이 있는가?
∨ 오락거리는?
∨ 옷차림은?
작가가 그린 미래의 샌프란시스코가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온통 지금의 샌프란시스코와 똑같다면 독자는 작가가 제대로 숙제를 하지 않고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간파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부모 세대가 먹었던 대로 먹지 않고, 입었던 대로 입지 않으며, 읽었던 식으로 읽지 않는다. 고작 20년 전까지만 해도 속속들이 알고 있던 마을이, 다시 찾아가 보면 너무 변해버려 그곳이 그곳인지 몰라보기 십상이다. 독자를 미래로 데려갈 작정이라면, 또는 다른 행성으로 데려가려 한다면 변화, 차이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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