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어느 시점이 최선일까
산속 오두막에 있는 젊은 여성 이야기를 다시 꺼내보자. 이 여성이 시점인물인 게 확실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보다 긴장감을 훨씬 더 끌어올릴 (그래서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할) 방법이 있다. 그게 누구든 오두막 밖에서 창문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인물을 시점인물로 활용하는 것이다.
일단 시점인물을 정했다면, 어떤 ‘인칭’을 써야 할까? 3인칭을 쓰는 게 가장 명확해 보인다(“수상한 사람이 살금살금 오두막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이 달빛에 반짝였다”). 하지만 1인칭으로 쓰면 비밀스러움을 고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1인칭에서는 시점인물 자신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서술하지 않으니까(“오늘밤 나는 그녀가 책을 읽는 모습을 한 시간 동안 관찰했다”). 아니면 2인칭을 골라 독자를 더욱더 놀랠 수도 있다(“저녁식사 후, 너는 설거지를 하고 물기가 빠지게 그릇을 놨다. 너는 책을 펼쳤다가 엎어두곤, 창문으로 갔다. 하지만 넌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 여기서 오두막 밖에 있는 수상한 사람의 존재는 암시될 뿐 서술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를 더욱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한다.
어떤 글쓰기 문제든 간에 ‘확실한’ 해결책이라는 것은 늘 의심해 봐야 한다. 작가가 보기에 확실하고 빤한 것은 독자가 보기에도 빤할 테니까.
시점 바꾸기
초보 작가가 맞닥뜨리는 일반적인 문제 중 하나로 시점 바꾸기를 빼놓을 수 없다. 초보 작가들은 갑자기 쓸데없이 이 시점에서 저 시점으로 바꿔댄다. 심지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데이비드는 뭘 시킬지 고민하며 메뉴를 훑어봤다. 양이 많은 음식은 먹고 싶지 않았다. “클럽샌드위치 주세요.” 그가 말했다.
“음료도 주문하시겠어요?” 웨이트리스가 물었다. 그녀는 감탄하며 데이비드를 쳐다봤다. 세상에, 너무 잘생겼다, 그녀는 생각했다.
위 장면은 어느 초보 작가가 쓴 소설의 3쪽에서 발췌한 부분이다. 글쓴이는 이 글 앞에서 내내 데이비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하다가 갑자기, 여기에서, 별 이유도 없이, 독자를 웨이트리스의 머릿속에 집어넣어 버린다. 그러다 뒤에 가서 데이비드가 점심을 함께 먹는 마크와 대화를 나눌 때는 셔틀콕처럼 이 두 사람의 시점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이때도 특별한 이유 없이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의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썼다면 모두 허용되었을 변동인데 도대체 이번엔 뭐가 다르다고 안 된다는 거지?’
○ 전지적 작가 시점의 소설은 언제나 처음 몇 쪽 안에 적어도 한 인물의 겉과 속을 모두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이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데 못을 박는다(서머싯 몸의 〈비〉가 그렇다). 위에 발췌한 초보 작가의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단수 인물 시점인 것처럼 시작해놓고(데이비드만의 시점 말이다) 후에 다른 인물들의 머릿속을 자유롭게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바람에 독자의 신경을 건드린다.
○ 전지적 작가 시점을 잘 이용한 소설을 보면 시점을 바꾼 지점에 모두 뚜렷한 이유가 있다. 위에 발췌된 장면을 보면 웨이트리스의 속마음은 이야기와 하등의 관련이 없다. 이 부분이 알려주는 것은 데이비드가 잘생겼고 여성들이 볼 때 매력적이라는 사실인데, 작가가 제대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채택했더라면 독자에게 직접 말해줄 수도 있었을 내용이다.
단수 인물 시점으로 소설을 시작했으면 그 시점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이는 규칙이다. 이 규칙은 복수 인물 시점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각 에피소드나 장면은 한 인물의 시점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지적 시점도 아니고, 단수 인물 시점도 아니고, 그렇다고 복수 인물 시점도 아닌, 그냥 실수의 집합체를 만들어내게 될 따름이다.
단수 인물 시점, 특히 주관적 3인칭 시점으로 글을 쓴다고 상상해보자. 시점인물로 A를 선택했다. 이야기 속에 A가 아닌 다른 인물에 대한 내용을 집어넣는다고 할 때, 아래 목록 중 포함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일까?(답은 아래에 있다)
①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②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③ 그녀의 손이 떨렸다.
④ 그녀의 두 뺨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⑤ 그는 손을 대기가 두려웠다.
⑥ 그는 어색하게 손을 내밀었다.
⑦ 그가 내민 손은 떨고 있었다.
정답은 1, 2, 3, 6, 7이다. 1번과 2번은 누가 봐도 분명히 객관적이다. 3번은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는 서술이며, 6번과 7번도 마찬가지다. 4번과 5번은 완전히 주관적이다. 이 두 서술은 바깥에서 관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점인물이 아니라 다른 인물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다면 시점이 바뀐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단수 인물 시점으로 글을 쓸 때에는 상대 인물의 입장에서만 알 수 있는 사실을 작가가 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하자(예를 들어, 시점인물은 상대의 뺨이 빨개지는 것을 볼 수는 있다. 하지만 상대의 뺨을 어루만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뺨이 달아올랐다는 사실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이 내용을 알리고 싶어 독자를 이 인물의 마음속으로 무심결에 휙 집어넣으면 시점이 바뀌고 만다).
랜돌프와 신시아라는 두 인물이 있다고 하자. 랜돌프는 시점인물이다. 작가는 신시아 외면에서 일어나는 일과 랜돌프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뭐든 말할 수 있지만, 반대로는 할 수 없다.
“뭐라고?” 랜돌프의 눈빛이 충격으로 흐릿해졌다.
(이 눈빛을 누가 보고 있는 걸까? 랜돌프는 볼 수 없다.)
“방금 내 말 들었잖아.” 신시아는 시간을 번다.
(랜돌프는 이 사실을 모른다. 신시아도 알고, 작가도 알지만, 둘 다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다.)
시점인물의 마음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똑같은 정보를 전달하려고 하면, 아래와 같은 글이 나올 것이다.
“뭐라고?” 충격이 랜돌프의 몸을 관통했다.
“방금 내 말 들었잖아.” 신시아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간을 벌려고 이러는군, 랜돌프는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래는 다양한 시점의 차이를 정리한 도표다. 이 도표를 통해, 예컨대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는 주인공을 비롯한 모든 인물을 내부와 외부에서 묘사할 수 있지만, 객관적 단수 인물 시점에서는 주인공이 든 아니든 모든 인물에 관해 오직 외부에서만 그릴 수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어떤 부분에서만큼은 주관적 단수 인물 시점이 가장 탄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는가? 주관적 단수 인물 시점은 1인칭, 2인칭, 3인칭 모두에 적용할 수 있다.
객관적 단수 인물 시점은 1인칭, 2인칭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산속 오두막 이야기를 2인칭으로 쓴다면 객관적 2인칭 시점이 될 것이다. 해밋의 빛나는 역작 《그림자 없는 남자 The Thin Man》는 객관적 1인칭 시점으로 쓰여 있다. 즉, 시점인물이 서사를 이끌어나가는데 그는 절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말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전할 뿐이다.
혼합 시점
이 책의 목표는 소설을 쓸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글쓰기 교사들이 시점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그리고 비록 내가 개발한 것이긴 해도, 나는 사실 여기에 쓴 이 모든 시점 구분에 관한 내용을 신뢰하지 않는다.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구분이 너무 자로 잰 듯하고 단순하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훨씬 더 복잡하고, 까다롭고, 미묘하다.
내가 쓴 〈마스크〉는 사이보그를 다루고 있는데, 이 사이보그는 신체 전부를 인공 장치로 교체한 남자다. 그에겐 비밀이 하나 있다. 그런데 이 비밀은 작품 끝에 가서야 밝혀지기 때문에, 나는 작품 전체를 그의 주관적 시점에서 쓰고 싶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했다. 독자는 어떤 한 인물과도 연결되지 않은 채 그저 그곳에 있게 된다. 보이지 않는 목격자로서 말이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이다. 로버츠, 기술자로 앞으로 다시는 나올 일이 없다. 배브콕, 프로젝트 디렉터로 중요한 인물이다. 시네스큐, 워싱턴에서 온 방문객으로 몇 쪽 뒤에 워싱턴에 돌아가면서 사라진다. 나는 작가 관찰자 시점, 즉 일부 비평가들이 ‘카메라 아이’(대체 사람들 얼굴을 볼 수조차 없는 카메라는 무슨 카메라일까?)라고 부르는 시점으로 배브콕과 시네스큐가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길을 따라간다. 이때 독자는 순간 배브콕의 시점으로 들어가고, 배브콕은 피로로 인한 어지럼증 때문에 시네스큐가 건네는 말 중 마지막 일부밖에 듣지 못한다.
사이보그가 거주하는 지역 안에서는 분명한 것이 하나뿐이다. 우리가 계속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이들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 열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확실하게 시네스큐의 눈으로 보고 시네스큐의 손으로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단단하고 따뜻했다.” “…… 시네스큐는 더 가까이서 바라보았고, 그러자 확실하진 않지만 오른쪽 색이 약간 다른 게 보였다.”(이보다 앞의 “시네스큐가 지나가며 신기한 듯 손으로 더듬어본 책장”은 작가 관찰자 시점에서도, 시네스큐의 시점에서도 서술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대목의 나머지 부분, 즉 시네스큐가 떠나기 전까지의 내용은 전부 시네스큐의 시점으로 쓰였고, 그다음은 배브콕의 시점으로 넘어가며, 마지막 부분에서 사이보그의 시점으로 변경된다.
오하라의 〈열망으로 보내는 나날〉을 통해 다시 한번 살펴보자.
그가 만난 의사들은 죄다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최소한, 기질적으로라도 말이다. 폐? 괜찮아요. 심장? 이상 없어요. 담배나 커피는 좀 덜 하시고요, 의사들이 말했다. 물론 그가 브랜디를 좀 덜 마시면 훨씬 나아질 거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냥 무책임하게 말하는 것뿐으로, 그들도 알고, 그도 알았다.
우리는 아직 이 인물의 이름은 모르지만 우리가 누구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보고 있는지는 알 수 있다. 그 후 인물이 기억하고 있는 의사와의 대화가 나오고, 그런 뒤 똑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는 친구와 나눈 대화가 나온다. 이렇게 반쪽 정도 읽다 보면 두 가지 사실이 분명해지는데 우리가 이야기 속 현재에 있다는 것과 더 이상 주인공의 시점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작가 관찰자 시점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또는 이 용어로 설명이 안 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이제 지어내지 않는 한 우리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두 인물이 하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 이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시점 말고 청점?
위 두 작품 모두에 어떤 시점인지 ‘구별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나? 모호한 부분이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즉, 이 부분들은 독자가 미처 알아차리기 전에 시점을 미묘하게 바꾸기 위해 존재한다(〈열망으로 보내는 나날〉은 모호한 대목을 통해 시간까지 바꾼다).
자, 이쯤에서 누군가는 시점 구분 따위 알게 뭐냐며, 시점을 버리고도 뭐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할 텐데, 그렇다, 해도 된다. 단, 자신이 뭘 하는지 알 때의 이야기다. 시점의 범주를 이해하지 못한 채 글을 쓰면 이 색깔 저 색깔 마구잡이로 가져다 바르는 아마추어 화가가 될 뿐이다. 그럼 그 원고는 창고에 처박아 숨기거나 제일 싫어하는 친척에게 선심 쓰듯 줘버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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