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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서출판 다른 Mar 05. 2019

첫 문단 쓰기 전 4가지 선택 3

단편소설 쓰기의 모든 것

작가 관찰자 시점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소설을 쓸 때는 작가가 어떤 인물의 머릿속에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냥 떠다니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되는 것이다.
  존 오하라의 〈골프클럽 사기 A Purchase of Some Golf Clubs〉를 보면 한 젊은 남자가 술집에 들어와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눈 후 골프클럽 한 세트를 팔려고 하는 젊은 여자와도 대화를 한다. 이와 같은 도입부를 보면 독자는 앞으로 이 남자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될 거라고 기대하기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오하라는 단순히 이 세 명의 인물이 하는 말과 하는 행동을 기록한다.
  이 시점이 앞서 본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서술자 시점 narrator view-point’들과 다른 점은 바로 서술자 즉 화자가 사라졌다는 데 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누군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느끼기보다 자신이 지금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고 듣고 있다고 느낀다. 꼭 자신도 그 방 안에 있지만 자신의 모습을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 관찰자 시점을 ‘카메라 아이 camera eye’라고 일컫는 사람이 많은데, 이 용어는 오히려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카메라 아이’는 독자가 카메라로 보이는 것만 보고 마이크로 들리는 것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그럴까? 아래 대실 해밋의 작품을 살펴보자.

  원덜리는 잿빛 파편이 실룩이며 기어가는 것을 쳐다봤다. 눈빛이 불안정했다. 그녀는 의자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발바닥을 바닥에 딱 붙이고 있었다. 꼭 금방이라도 일어설 사람처럼.
─ 대실 해밋, 《몰타의 매》

  “눈빛이 불안정했다”, “꼭 금방이라도 일어설 사람처럼”을 보자. 이는 논평이고 해석이다. 카메라는 논평이며 해석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그녀”나 “쳐다봤다” 같은 단어조차 카메라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밋은 탁월한 방법으로 독자가 인물들과 같은 방 안에 있으면서 자신은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쓴 소설은 연극 공연과 흡사하다.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듣는다. 하지만 그 어느 인물의 머릿속에도 들어갈 수 없다. 이런 가혹한 제약 때문에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쓴 소설은 어떠한 순수성을 지니고 있으며, 나는 이 점에 특히 마음이 끌리곤 한다.


  갈수록 한정적이고 날카로운 시점에 대한 논의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주길. 어떤 시점을 선택할지 여부는 독자가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얼마나 상세히 보길 원하는가에 관한 선택에 달려 있다. 시점을 고르는 과정은 사진작가가 특정 사진을 찍기 위해 어떤 렌즈를 고르는가 하는 문제와 똑같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광각렌즈, 작가 관찰자 시점이라면 망원렌즈(예리하게 포착할 수 있지만, 대상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야 한다), 단수 인물 시점 또는 복수 인물 시점은 인물 촬영용 렌즈에 비유할 수 있다.



단수 인물 시점
  단수 인물 시점은 작가에게 극단적인 제약을 가한다. 즉 작가는 ‘오로지’ 시점인물이 생각하고, 느끼고, 인식하는 것들만을 전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제약을 보상할 이점도 그만큼 있다. 우선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제한된 전지적 작가 시점에 비해 훨씬 장황하지가 않다. 또한 특정 한 인물에 집중하기 때문에 독자가 그 인물에 강력하게 동일시를 하도록 이끌 수 있다.

  시점인물이 이야기 속의 이야기로 독자를 데려가기 위해 만들어진 화자인 경우가 있다. 또한 1인칭으로 독자에게 직접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로는 회고록처럼 이야기를 서술하기도 한다. 이런 장치들은 소설을 그다지 발전시키지 못하면서 복잡하게만 만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주인공과 독자 사이의 거리를 일정하게 떨어뜨리고자 할 때는 유용하다(주인공이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에서처럼 수수께끼의 인물일 경우).
  상업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정말로 간절히 자신을 주인공과 동일시하고 싶어 한다. 로맨스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신을 주인공으로 상상하며, 주인공이 겪는 모험을 대리 체험하고 싶어 한다. 웨스턴소설을 읽는 독자는 말안장에 당당히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이런 식으로 독자가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려 할 때, 소설이 단수 인물 시점으로 쓰여 있지 않으면 곤란하다. 그래서 소위 ‘순수문학’에서는 전지적 작가 시점이 훨씬 자주 발견되는 반면, 상업 단편소설은 대부분 단수 인물 시점이다.
  3인칭에서는 단수 인물 시점이 주관적일 수도 있고 객관적일 수도 있다(1인칭과 2인칭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1인칭이나 2인칭으로 쓰면서 엄격한 객관성을 관철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주관적으로 서술할 때는 시점인물이 무엇을 보고 듣는지는 물론,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지에 대해 써도 된다. 다만 시점인물의 겉모습이 어떤지 말할 수 없고, 그가 모르는 것 역시 말할 수 없다. 객관적으로 서술할 때는 시점인물의 겉모습을 말할 수 있고, 그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서술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감정, 내적 감각, 생각에 관해서는 ‘직접적으로’ 그 무엇도 언급할 수 없다.
  이해를 돕기 위해 주관적 3인칭 시점으로 쓴 짧은 글을 잠시 살펴보자.

  제임스 맥스웰은 차가운 철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작은 길 양쪽에 하얀 꽃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리워져 있는 데 굉장한 양이었다. 석조주택은 고요했고, 블라인드가 눈꺼풀처럼 닫혀 있다. 맥스웰은 입에서 시큼한 맛을 느꼈다. 뱃속은 꾸르륵거렸다. 호텔 커피숍에서 나온 형편없는 싸구려 음식. 맥스웰이 병원에 입원하고 고소한다면 응당한 보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귀를 기울이자, 오른쪽으로 떨어진 어딘가에서 잔디 살수기의 ‘윕, 윕, 윕’ 소리가 들렸다. 줄리아는 지금 뭘 하고 있을지 불안했다. 아침식사를 하는 방에서 청구서를 들여다보고 있을까? 줄리아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아직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악감정 따위 무시해. 그냥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맥스웰은 목이 바싹 말랐다. 길을 걷기 시작하자, 판석에 탁 탁 부딪히는 자신의 발소리가 불쾌하게 들렸다.


  이번에는 똑같은 내용을 객관적 3인칭 시점에서 쓴 글이다. 장면과 주인공의 행위가 똑같은데도 두 글에서 주어지는 정보량이 얼마나 다른지 눈여겨보자.

  제임스 맥스웰은 정교한 철문을 열고 걸어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는 40대 남성으로, 얼굴이 벌겋고 살집이 있다. 금발 콧수염은 들쑥날쑥하고, 노란 머리칼은 형편없이 손질되어서 파나마모자 챙 아래로 축축하게 삐져나와 있었다. 시어서커 재킷의 옷깃은 주름이 가 있다. 그가 서 있는 데서 보면 꽃이 흐드러진 키 큰 고광나무 덤불 사이로, 판석길이 회색 석조주택 입구까지 이어져 있다. 블라인드는 닫혀 있다.
  맥스웰은 귀를 기울이는 듯한 자세로 섰다. 그의 오른쪽으로 어딘가 멀리에서 오는 잔디 살수기 ‘윕, 윕, 윕’ 소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가 집을 올려다보는데, 퉁방울눈 속에 희미한 뭔가가 있다. 아마 약간의 두려움. 마른 입술을 침으로 축이고, 느릿느릿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러 차이점이 있지만 특별히 더 뚜렷한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먼저 주관적 3인칭 시점의 글에서는 맥스웰의 머릿속(그리고 뱃속)에 들어감으로써 그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맥스웰의 신체적 특징은 알 수 없다. 객관적 3인칭 시점의 글에서는 관목의 품종(고광나무)을 알 수 있지만 주관적 글에서는 알 수 없다는 점도 생각해보자. 이는 맥스웰이 관목을 하나하나 구별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중 어느 방식이 더 적당한 걸까? 그건 작가가 소설에서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맥스웰에게 주관적 시점을 적용하면 그가 줄리아보다 눈에 더욱 띌 것이다. 이건 원하는 사항인가, 아닌가? 맥스웰의 얼굴 표정을 아는 것과 그의 생각을 아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활용도가 높을까? 줄리아의 집에서 뭘 발견하게 될까? 이에 대해 맥스웰의 머릿속에서 묘사하는 게 쉬울까, 아니면 바깥에서? 맥스웰이 자신이 의도한 행위를 할 때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독자에게 설명해야 할까? 맥스웰의 동기를 분명히 밝히기 위해? 이런 결정은 작가의 직감과 취향에 따라 이루어지는 법이지만, 소설을 다 쓴 후 돌이켜 봤을 때 비로소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복수 인물 시점
  복수 인물 시점은 언뜻 복잡하게 보일 수 있는데, 모두 다른 시점 인물을 내세워 쓴 단수 인물 시점 에피소드를 여러 개 엮은 것일 뿐이다. 사건이 벌어지는 모든 장소에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인물이 없어서 단수 인물 시점으로 글을 쓰기가 곤란할 때 유용하다. 복수 인물 시점이 전지적 작가 시점과 다른 점은 인물 각각의 에피소드 길이가 꽤 길다는 것이다. 즉,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쓴 소설에서처럼 시점이 한 단락 건너 이 시점 저 시점으로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나는 자연스럽게 복수 인물 시점으로 글을 쓰곤 한다. 전지적 작가 시점이나 제한된 전지적 작가 시점보다 선호하는데, 복수 인물 시점이 단수 인물 시점의 날카롭고 섬세한 묘사적 특성을 온전히 지녔을 뿐 아니라, 전지적 작가 시점과 엇비슷한 만큼 이야기를 파노라마식으로 폭넓게 서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시점에서 전달할 수 있는 이야기라면 단수 인물 시점을 써도 좋다. 하지만 그게 안 되면 복수 인물 시점을 써야 한다. 시점 선택은 부분적으로 작가의 기질에 따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내 경우 이야기가 허락하는 한 주인공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뒤에 물러나 앉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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