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 아이 앞에서 무너져도 되나요-취약감과 사회적 가면

B. 싱글맘의 감정사전 시리즈 - 혼자 육아하며 마주하는 복잡한 감정들

by 다루오

그날,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아이 앞에서, 그것도 차 안에서.
전두엽 기능이 마비되고 변연계만 활성화된
그야말로 한 마리 짐승이 되어버렸다.


01. 현질 50만원, 그리고 대폭발

첫째가 무분별한 현질로 나의 역린을 건드린 날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번째.
어떻게 알고 내 비밀번호를 뚫고 제페토라는 게임에서
50만원을 넘게 결제해버린 것이었다.

처음엔 모르고 그랬겠지.
두 번째엔 참다 참다, 실수로 그랬겠지 했지만
세 번째는 얘기가 달랐다.

둘째를 태우고 어딘가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핸드폰 알람에 50만원 현금이 통째로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
내 토스 앱으로 결제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아이에게 전화를 걸어서
소리를 지르고 쌍욕을 날려버렸다.
"아이 미친X아!!!"

뒷자리에 앉아있던 둘째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고,
나는 소리를 내뱉고 나서야 '아차' 싶어서
달리던 차를 잠시 갓길에 세우고 숨을 골랐다.

이미 때는 늦었다.


02. 루저 엄마의 자괴감

정말 아무리 배운 사람이고
감정코칭이나 비폭력대화네 온갖 연수들 다 듣고 수료하면 무얼 하나 싶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이렇게 한 방에 무너지는 내 자신을 보며,
또 어안이 벙벙한 둘째, 그리고 수화기 너머로
무음상태로 일괄하는 첫째의 반응 앞에서
나는 철저히 루저 엄마, 개떡 엄마였다.

뭐 어디 시궁창에라도 박히고 싶은 못난 엄마.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러한 취약감, 열패감, 그리고 자괴감을 딛고
금세 제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막내까지
그 분위기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한순간이라는 것을.


03. 감정 회수의 기술

관건은 감정의 회수이다.
감정을 빠르게 회수해서 긍정적 분위기로 전환해야 하는데,
이 속도를 얼마나 빠르게 할 수 있느냐가
프로 엄마의 노련함이라 할 수 있겠다.

이때 필요한 게 내 감정을 인정하고,
잘못된 행동을 먼저 사과하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실전에서 배우게 되었다.

일단 전화를 끊은 나는 뒷자리에 앉은 둘째에게
욕을 날린 일은 매우 잘못된 일이라며
엄마가 매우 잘못된 행동을 했음을 시인했다.

그리고 절대로 화가 난다고 그런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두 번 세 번 말을 하며
엄마가 나빴다고 나의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심호흡을 하며 그 화를 누그러뜨린 후
내가 좋아하는 CCM 찬양을 틀고 분위기 전환에 애썼다.


04. 감정과 훈육 분리하기

돌아가서 나는 그 일에 대해 첫째에게 바로 언급하지 않고
둘째와 셋째를 재운 이후 따로 언급하며
매우 호되게 야단을 쳤다.

무너진 나에 대한 사과는 했지만
그 아이의 행동을 정당화할 순 없었다.

나의 감정과 아이의 잘못을 잘 발라내어
양쪽에 놓고 서늘하게 단호하게 훈육해 나가는 것.
이것이 싱글맘이 해내야 할 몫이라는 걸
꼭 말해주고 싶다.


05. 커리어우먼 코스프레

나는 이렇게 무너진 감정을 추스르고
학교에 나가면 세상 밝고 건강하게 생활하는
커리어우먼인 척 연기를 해야 한다.

학교에서 내가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걸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아직 사회적 편견이 있기 때문에
난 어디 가서도 내가 이혼을 했다는 둥
차상위라는 둥 하는 말은 일절 꺼내지 못한다.

"어머, 아이를 셋이나 키우세요?
국가에서 보조 많이 나온다면서요?
남편이 많이 도와주시나 봐요, 사회생활도 하시고..."

이런 말을 들으면 가끔 쓴웃음이 터져나올 때가 있지만,
'그래, 난 그런 거 없이도 잘 해나가는 골든레이디니까' 하며
혼자 더 씩씩하게 주먹을 꽉 쥐고 어금니를 꽉 깨문다.


06. 가면 뒤의 진짜 나

집에서 남편에게 사랑받고
시댁의 도움을 한껏 받으며 날개 달고 사회생활하는
풍족한 애셋 엄마 워킹맘, 커리어우먼 코스프레를 하자면...
참 피곤하기 그지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 또한 감사할 때가 있다.
그래, 이 덕에 아이 셋이 내 월급에 기대어 먹고 산다.
아이들이 그래도 친구들에게
"우리 엄마 학교 선생님이다" 하고 자랑을 한다.

"우리 엄마 네이버 검색하면 나오는 사람이다.
우리 엄마 유튜브도 하고 책도 낸 사람이다" 하고
뻐기고 다닌다.

내가 먹고 살려고 발버둥 치고
내 그 아픔을 잊으려 쓴 글들과,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남긴 기록들이
대단하진 않지만 내가 아니라
아이들을 세워주는 자존감이 되어준다.


07. 깨달음

내 자존감은 내가 스스로 키워 가는 거라는 걸 절감한다.
자존심이 아니라 자존감이다.

남들에게 자존심 세워가며
남들이 날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목매는 어린 날들은 지나갔다.

그런 덧없는 시간들을 뒤에 두고
이제는 내가 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만족감을 느끼며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풍성히 충실히 살아내는지에 대한
자족감으로 만들어내는 내 자존감에 집중하며...

오늘도 나는 남이 아니라 나를 산다.

아이 앞에서 무너져도 되나요?
그렇다. 무너져도 된다.
하지만 빨리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무너진 것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



무너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너진 후 어떻게 회복하느냐가 진짜 실력이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엄마의 모습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B1 밤11시, 난 괜찮은 엄마였을까-부채감과 양가감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