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가 된 날, 바다로 나서다
처음 아이 셋을 온전히 혼자 키우겠다고 결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이 아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셈이야.”
“너무 무모해.”
“오래 못 버틸 거야.”
그 말들이 돌덩이처럼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때 나는 몰랐다.
1년 뒤의 나, 2년 뒤의 내가 어떤 모습일지.
미래는 늘 알 수 없었고, 알 수 없기에 두려웠다.
경제, 시간, 체력, 감정.
모든 계산이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한가운데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해야 한다’는 목소리.
엄마들이 가끔 말하는 ‘겉 필링(gut feeling)’.
그리고 나에게는 그 감각에 기도를 더한 확신이 있었다.
기도 안에서 들은 대답은 단순했다.
네가 가라. 내가 함께 간다.
결심은 했지만, 절차는 쉽지 않았다.
우리는 재판이혼을 선택했다.
상대는 유책이 많았음에도
출석을 자주 하지 않았다.
가사 조사에도 성실히 응하지 않았다.
재판은 질질 끌렸고,
그 사이 나는 교사로서 담임을 맡아
학기 중에 재판을 이유로 외출하는 일이 반복됐다.
연가를 쓰는 날들이 늘어갔다.
아이들을 위해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상황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긴 시간이 지나자
정신적·육체적 한계가 찾아왔다.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번갈아 나를 덮쳤다.
정신과 진료실의 의자에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내 몸과 마음을 지키는 것도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죄책감 없이 약을 먹기 시작했다.
이건 패배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결국 나는 판사님께 사정사정해
조정으로 재판을 마무리했다.
상대의 사정을 많이 봐주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법적으로 관계를 끝내는 것’이었다.
법적으로 부부인 상태에서는 한부모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 나는 계속 손해를 보고 있었다.
아이들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었지만,
서류상의 현실은 달랐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종결짓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혼 후 첫 1~2년은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배 같았다.
새벽에 출근하는 나는
아이들의 등원을 직접 챙길 수 없었다.
다행히 좋은 돌봄 선생님을 만나
그분이 그 역할을 대신해 주셨다.
대신 퇴근 후에는
뒤치닥거리를 하며 하루의 피로가 몰려왔다.
이혼 전에도 아이 아빠가 양육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사실상 ‘연장전’이었지만,
법적으로 홀로서기를 시작한 첫 해는
마음의 무게가 달랐다.
고등학교 교사로서 늦게까지 야자 감독을 하는 날이면,
아이들은 나 없이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떤 날은 아침에도, 저녁에도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이틀을 넘기기도 했다.
그럴 때면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지금은 조금 멀리 있어도
이 배를 안전하게 몰아야 한다.
5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때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 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해낼 거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때로는 눈물로 버틴 날들이
오히려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엄마이기 전에 나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를 지키는 것이 아이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을,
그 항해가 가르쳐 주었다.
아직 사춘기의 파도는 오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말한다.
“그건 시작일 뿐이야. 진짜는 이제부터야.”
하지만 나는 안다.
지금까지의 바다를 건넜듯,
앞으로의 바다도 건널 수 있다는 걸.
나의 항해는 완주가 아니라
계속되는 여정이다.
그리고 나는, 그 여정을 기록하며
다른 엄마들에게 등대 불빛을 보내고 싶다.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로 선다는 건,
파도를 건너본 사람이기에
다른 이를 위해 불을 밝힐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