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틀거린 날들 함께 한 우리들
유책이 분명히 상대방에게 있었지만, 그는 재판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다.
출석도, 가사 조사도, 모든 것이 느슨했다.
그 탓에 재판은 몇 달이고 길어졌다.
나는 교사였다. 그것도 담임을 맡은 상태였다.
학기 중, 재판 때문에 외출을 하거나 연가를 써야 한다는 건 단순한 행정 절차 이상의 부담이었다.
내가 하루 자리를 비우면 학생들의 하루도 비워진다.
그 사실이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었다.
결국, 판사에게 조정을 요청했다.
‘관계만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법적으로 부부인 상태에서는 한부모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아이 아빠에게서 경제적 지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서류상으로는 ‘맞벌이’였지만, 현실은 내가 전부를 책임지는 집이었다.
새벽 출근, 뒤치다꺼리의 일상
이혼 전에도 양육은 거의 나 혼자 해왔다.
고등학교 교사인 나는 출근 시간이 이르다 보니 아이들을 직접 등원시킨 적이 손에 꼽는다.
그 자리를 대신해 준 건, 김진숙 선생님이라는 천운 같은 존재였다.
퇴근은 빨랐지만, 세 아이를 데리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건 매일이 전쟁이었다.
야자 감독을 맡은 날엔 며칠씩 아이 얼굴을 못 본 적도 있었다.
아침엔 내가 출근할 때 아이들이 자고 있었고, 밤엔 내가 들어오면 이미 잠들어 있었다.
이틀 만에 얼굴을 본 날엔 꼭 사진을 찍었다.
그게 내가 버티는 작은 의식이었다.
마음도, 몸도 무너져갔다
이혼 과정은 내 몸과 마음을 동시에 갉아먹었다.
재판이 길어질수록 불면증은 깊어졌고, 어느 날 갑자기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한밤중에 숨이 막혀 응급실로 실려 간 적도 있다.
결국 정신과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그 약을 죄책감 없이 먹는 법을 배웠다.
지금도, 신호가 오면 주저 없이 먹는다.
엄마가 무너지면 아이들도 함께 무너진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아니까.
무너지지 않는 작은 존재들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무너지지 않았다.
둘째는 동생을 돌보는 법을 배웠고, 첫째는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이며 자기 시간을 만들었다.
막내는 여전히 밝았다.
나는 그 아이들의 회복력을 매일 목격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이들이 나를 의지하는 만큼, 나도 아이들에게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버팀목은 내가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버틴다는 건 완벽하게 서 있다는 뜻이 아니었다.
흔들리면서도 쓰러지지 않는 것.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
그건 내가 가르친 게 아니라, 아이들이 나에게 보여준 삶의 방식이었다.
그들의 웃음, 그들의 ‘괜찮아, 엄마’라는 짧은 말 한마디가
내게 약보다 빠른 회복제를 건넸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완벽하지 않은 엄마로,
하지만 오래 버티는 엄마로 살아갈 것이다.
“나도 버티지만, 사실은 우리 넷이 함께
힘내고 있다는 걸 나는 절대 잊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