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배역, 나만의 연기

by 한미숙 hanaya


배역을 잘 소화하는 일이 당신의 몫이며
배역을 선택하는 일은 당신의 몫이 아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남을 위해 살게 된다. 에픽테토스


태어날 때부터 이미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큰딸이라는 역할은 내가 선택할 여지도 없이 태어났다.

결혼 후 나의 배역은 아내, 며느리, 엄마였다.

배우자는 내가 선택했지만, 그 역할들은 저절로 따라온 것들이다.

가끔은 주어지는 역할에 어깨가 무겁기도 하다.

그 역할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에서 내 배역을 잘 해내는 일이 전부이다.

내가 선택한 배역이 아니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슬프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선택하지 않은 배역이라도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느냐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큰딸로서, 아내로서, 엄마로서 어떤 모습일지는 누구도 정해주지 않았다.

정해진 대본도 없다. 그저 매 순간 선택할 뿐이다.


가끔은 힘들다고 생각하는 나의 역할들은 나를 조이는 족쇄가 아니라,

어쩌면 나를 존재하게 하는 관계의 이름들이다.

누군가의 딸이고, 아내이고, 엄마라는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부딪히면서 살아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철학에세이 #배역 #연기









pexels-cottonbro-6896221.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돌아간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