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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로 떠나는 시간 여행

by 한미숙 hanaya



"오늘 하루도 당신 거에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진짜 오늘의 모든 행운은 나에게 올 것 같은 착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른 아침 강의를 나가는 날, 새벽 기상의 피로가 채 가시지 않은 눈을 비비며 차를 타고 출발하는 순간 나는 라디오를 켠다. 요즘 차는 CD를 들을 수도 없고 USB나 블루투스로 연결해야만 내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런 디지털 세상의 번거로움이 귀찮아진 나이가 되어서인지, 손가락 하나로 버튼만 누르면 나오는 라디오를 듣는다. 내가 굳이 음악을 고르지 않아도 좋아하는 채널에서는 나의 취향에 맞는 음악이 많이 나온다. 그 공중파 전파를 타고 오는 목소리와 음악들은 옛날의 추억을 떠오르게 한다.


'띠리리 띠리리 링~~~

안녕하세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 쇼입니다."


학창시절, 칠흑 같은 밤이면 라디오 방송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밤이 되면, 잠옷을 갈아입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잠을 자라는 엄마의 잔소리를 피하려고 일찍 잠든 척하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면 라디오까지 이불을 덮었다. 혹시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최대한 볼륨을 작게 하고 라디오에 귀를 바짝 대고 혼자 이불속에서 보냈던 시간이었다. 그 시절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것은 작은 행복이었다. 라디오에서 들려주는 다양한 사연들은 소녀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했고 몰래 맛보는 초콜릿의 달콤함처럼 몰래 듣는 라디오는 나의 심장을 더욱 두근거리게 했다. 가끔 방송에 사연도 보냈지만, 한 번도 당첨되지 못한 슬픈 사연은 누가 알아주랴. 특히 1년에 한 번씩 열리는 예쁜 엽서 전에는 꼭 한번 내 엽서가 당첨되는 게 작은 나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그림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는 한낱 꿈에 불과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우리 주변에서 라디오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CD플레이어가 나오면서 나도 역시 라디오와 멀어졌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듣고 싶은 음악만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MP3 플레이어, 아이팟, 그리고 결국 스마트폰까지, 점점 더 편리해지는 음악 감상의 세계에서 라디오는 어느새 구석에 밀려난 옛 친구 같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어느덧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 스마트폰 속 음악 앱은 내 취향을 분석해 맞춤형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 정교한 알고리즘도 줄 수 없는 것이 있다. 낯선 DJ의 친근한 목소리, 예상치 못한 곡의 반가움,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사연의 따스함. 어느 날 차 안에서 우연히 라디오 버튼을 눌렀을 때, 흘러나온 가요 한 곡이 내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추억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라디오를 그리워했는지를 깨달았다.


이제 차를 타면 라디오 전원부터 누른다. 늘 맞춰져 있는 주파수는 어린 시절 이불 속에서 라디오를 틀던 그 순간과 닮아있다.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작은 여행. "오늘 하루도 당신 거에요!"라는 DJ의 인사를 들으며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나와 만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이어주는 전파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나를 다시 발견한다. 세상의 모든 디지털 기기도 줄 수 없는, 라디오만이 선물하는 시간 여행의 마법이다.



#사물에세이 #라이오로떠나는추억여행 #라디오가좋은이유 #아날로그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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