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 에피소드 04.
초인플레이션을 다루려면 십진법의 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100자리, 1000자리, 10만 자리, 100만 자리, 10억 자리……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10억은 1 다음에 0이 9개, 1조는 0이 12개, 1000조는 0이 15개가 붙는다.
그다음으로 1000조의 1000배는 0이 18개가 붙는 100경이다.
이 정도면 충분할까? 아직도 살짝 부족하다.
그렇다면 1027 정도를 알면 될까?
우리가 이해해야 하는 숫자는 400 뒤에 0이 27개가 붙는
4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즉 40양穰다.
1946년 7월에 헝가리의 인플레이션율은 무려 4×1029퍼센트였다. 이 수치는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초인플레이션율 경쟁에서 단연 선두를 차지한다. 당시 헝가리의 화폐 단위는 펭괴(Pengö)였는데, 만약 당신이 1945년에 1펭괴를 주고 신문 한 부를 샀다면, 1년 후인 1946년에는 신문 한 부를 사는 데 4×1029펭괴를 내야 했다는 얘기다.
천문학적인 숫자이기 때문에 아직 감이 잘 안 잡힐 것이다. 좀 더 객관적인 수치로 나타내면, 1일 인플레이션율이 207퍼센트, 물가는 15시간마다 2배씩 뛰어올랐다.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승률이다.
물론 1946년에 헝가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전후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던 걸까? 그런데 현대에도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가능하다.
초인플레이션 경쟁에서 헝가리를 잇는 영광의 2위는 2007년 나이지리아에서 일어났다. 2007년 나이지리아의 월 인플레이션율은 796억 퍼센트였다. 1일 인플레이션율은 98퍼센트에 달했고, 물가는 24시간 간격으로 2배씩 뛰었다.
3위는 1994년 유고슬라비아가 차지했다. 당시 월 인플레이션율은 3억 1300만 퍼센트였고, 1일 인플레이션율은 65퍼센트가량으로 물가가 1.4일 간격으로 2배씩 올랐다.
1923년 독일의 초인플레이션은 4위에 올랐다. 월 인플레이션율은 2만 9500퍼센트, 1일 인플레션율은 20.9퍼센트, 물가는 3.7일 간격으로 2배씩 상승했다. 한편 프랑스의 ‘토지위임권’ 화폐는 월 인플레이션율이 304퍼센트, 1일 인플레이션율이 4.77퍼센트, 물가는 15.1일마다 2배씩 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1947년에서 1984년까지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잠잠했다. 초인플레이션 명예의 전당 후보에 오를 만한 사례가 없었다. 이후 일부 국가에서 몇 차례 스포츠 행사가 개최된 후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 니콰라과 공화국의 월 인플레이션율이 최고치에 달했을 때 260퍼센트였다. 한편 1980년대 중반 페루는 월 인플레이션율이 397퍼센트, 1980년대 볼리비아는 182퍼센트, 콩고는 250퍼센트였다.
최근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국가 중 눈여겨볼 곳은 아르헨티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74년 7월에서 1991년 10월까지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이 기간 동안 화폐 가치가 총 3조 퍼센트 하락했다. 브라질에서는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인플레이션쇼가 이어져 이 기간에 화폐가치는 총 20조 퍼센트 하락했다.
프랑스의 인플레이션은 초기 금융사에서는 선두를 차지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여러 차례의 극심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서 선두 자리를 내주었다. 프랑스혁명 당시 인플레이션을 제외하면 1920년 이후 50회 이상의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초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열렸다. 빚더미에 쌓인 국가와 무분별한 화폐 발행이 주 원인이었다. 이 두 가지 사실 외에 그동안 발생했던 초인플레이션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 공통점, 대부분의 초인플레이션은 정치적 격변기에 발생했다. 전쟁 중 혹은 전쟁 후 기존의 체제가 붕괴되는 시기, 이를테면 계획경제체제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되는 과도기 혹은 변혁기에 발생했다는 시기적 공통점이 있다.
초인플레이션은 정치 혹은 경제적 혼란이 낳은 자식인 셈이다. 꼬집어 말하면 초인플레이션은 정치적 인플레이션으로, 일반적으로 정치인들이 원인 제공자다. 정치적 변혁기는 대개 불안정하고 국가의 통제 기능이 제한적이다.
조세 수입은 물론이고 다른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국가는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린다. 자금 압박이 심하기 때문에 자국의 화폐 가치를 떨어뜨려서라도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 이 방법은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반발이 적고 유일한 해결방안일 때도 있다.
두 번째 공통점은 인플레이션율이 높을수록 향후에도 인플레이션이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인플레이션율은 마지노선을 넘으면 가속이 붙어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다. 화폐가치가 추락하기 시작하면 멈출 방법이 없다.
이때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은 인플레이션율이 초인플레이션으로 넘어간다. 고(高)인플레이션일수록 인플레이션 수치가 더 불안정하다. 즉, 고 인플레이션일수록 인플레이션율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경제상황을 예측하기 더 어렵다는 얘기다.
세 번째 공통점은 인플레이션과 통화량은 같이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통화량과 인플레이션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 인플레이션율이 높을수록 화폐유통량이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관관계는 살짝 더 복잡하다. 화폐량과 화폐의 액면가치가 증가하면 구매력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이다. 시중에 유통되는 화폐량은 증가하지만 은행권의 명목가치에 비해 구매력이 극도로 낮다. 그만큼 물가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제 이런 상황까지 상상할 수 있다. 화폐를 더 많이 찍어내도 물가가 화폐발행량보다 빨리 상승하므로 화폐가 부족해진다. 화폐량이 2배 증가했는데 물가가 4배 상승한다면, 구매력의 관점에서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돈은 더 적어지는 셈이다. 경제학자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가격 변동 추이가 반영된실질 통화량이 감소했다’고 한다. 쉽게 말해 100만 마르크 지폐 한 장으로 단독주택 한 채 대신 치즈 크래커 하나밖에 못 산다는 얘기다.
글 및 사진 출처 : <인플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