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인문학> 에피소드 03.
메리 애시퍼드(Mary Ashford)는 아직 지도 역사에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가련한 것 같으니라고. 1817년 5월 27일 화요일 오전 8시, 버밍엄 외곽 에딩턴 벌판의 한 웅덩이에서 그녀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녀는 추락했을 수도 있고, 살해되었을 수도 있다.
스무 살 아가씨가 왜 동네 댄스파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는가 하는 미스터리는 흥미진진하고 끔찍한 이야깃거리로서 몇 달 동안 대중을 사로잡고 신문을 도배했다. 이어진 재판은 영국 법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고, 그 스캔들은 과학 수사에 바탕을 둔 세계 최초의 상업적인 살인 지도라고 볼 만한 물건을 탄생시켰다.
애시퍼드는 술집에서 열린 연례 댄스파티에 여자 친구와 함께 갔다가 에이브러햄 손턴(Abraham Thornton)이라는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손턴은 사람들에게 자신이 바람둥이로 유명하다고 허세를 부린 바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춤을 췄고, 나중에 함께 술집을 나와서 탁 트인 벌판을 걸어 귀가했다. 애시퍼드가 살아 있는 모습으로 목격된 마지막 순간은 새벽 4시였다. 오전 6시 30분, 동네 제분소 일꾼이 그녀의 피 묻은 신발과 모자를 발견했다.
손턴은 살인 혐의로 당장 붙잡혔다. 10주 뒤에 열린 재판에서는 사건 당일 밤 벌어졌던 일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두 장의 지도가 등장했다. 하나는 동네 측량사 윌리엄 파울러가 검사 측을 위해 그린 지도였고, 다른 하나는 버밍엄의 측량사 헨리 제이컵스가 피고 측을 위해 그린 지도였다. 양쪽 다 지도에 화살표를 그려 넣음으로써 애시퍼드와 손턴이 술집을 나와 어느 길로 갔을까 하는 가능성을 배심원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때까지 무의미한 장소에 지나지 않았던 펜스 밀 레인, 클로버 필드 같은 지명들은 이제 전 국민이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입에 올리는 이름이 되었다. 어쨌든 손턴은 알리바이가 있었고, 훌륭한 변호인단을 두었다. 배심원들은 6분 만에 그를 방면하기로 결정했다.
그 판결은 대중에게 인기가 없었다. 메리 애시퍼드의 오빠 윌리엄은 결과에 격분했고, 손턴에 대한 여론이 나쁘다는 사실에 힘을 얻어 그해 11월에 웨스트민스터 고등법원에서 재심을 열도록 청구했다. 그 소식에 신문들은 물론이고 소책자 및 지도 제작자들까지도 기뻐했다. 돈을 벌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때 등장한 지도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것, 그래서 여러 판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던 지도는 그 동네 교사가 만든 것이었다.
그 교사는 자기 학생들과 동료 교사 조지 모어크로프트를 부추겨, 다들 새벽같이 일어나서 범죄 현장과 주변 지역을 측량하도록 시켰다. R. 힐(Rowland Hill)이라는 그 교사는 『미들랜드 크로니클』에 실린 ‘조잡한 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그것은 ‘측정도 하지 않고 그린 게 분명하고…… 아주 불완전한 묘사’라고 비판했다.
명석한 지리학자였던 힐은 이전에 학생들에게 가르칠 요량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도를 새로 그린 적도 있다고 했는데, 실물로 남은 것은 없다. 힐은 육지측량부 책임자였던 윌리엄 머지 소장이 육지측량부의 탄생을 서술한 책을 읽고서 ‘어떤 소설보다 흥미롭다’는 감상을 밝혔고, 이후 독학으로 삼각 측량법을 비롯한 현대적 측량 기술을 익혔다.
목판에 새긴 뒤 버밍엄에서 인쇄된 힐의 지도는 크기가 38×48.5센티미터였다. 힐은 용의자가 ‘알리바이를 주장하는 장소들까지 포함하기 위해서’ 신문에 실린 다른 지도들보다 범위를 더 넓게 잡았다. 애시퍼드의 시신이 발견된 웅덩이는 단면도로도 그려 넣고, 그림으로도 그려 넣었다(너무 한가로워 보이지 않나 싶을 만큼 곧이곧대로, 나무가 우거진 연못으로 그렸다). ‘손턴이 메리와 헤어진 뒤 걸었다고 주장하는 길’, ‘살인자가 걸었을 법한 경로’처럼 유용한 방향 설명도 적어 넣었다. 그리고 약간의 지형학적 선정주의도 가미했다. 살인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벌판을 묘사한 삽도에서 원래 ‘클로버 필드’였던 지명을 ‘페이털(치명적) 필드’로 개명했던 것이다.
지도에는 상세한 설명문이 딸려 있었으며, 평범한 서체와 장식적인 옛 서체를 함께 써서 제목도 적어두었다. ‘메리 애시퍼드가 살해된 장소 근처의 도로 지도’라는 구미 당기는 제목이었다. 설명문은 우선 사건 개요를 소개한 뒤, 에이브러햄 손턴이 파티장을 나와 메리 애시퍼드를 바래다준 다음에 걸었을 법한 경로에 대해 갑론을박하는 여러 주장을 소개했다.
문체는 흡사 경찰관의 증언처럼 이상할 만큼 감정이 배제된 스타일이었다. 예를 들자면 ‘지도를 점검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몇 가지 세목을 환기하고자 한다’, ‘여기에 표시된 수면의 높이는 살인이 벌어졌던 때와 최대한 비슷하게 그린 것이다’ 처럼. 힐의 지도는 대성공이었다. 표절이 횡행했는데도, 힐과 학생들은 15파운드의 수익을 올렸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라도 뒤이어 벌어질 법정 드라마를 담아낼 엄두는 내지 못했으리라. 손턴은 끈질기게 무죄를 주장한 것으로 모자랐던지, ‘결투 재판’이라는 고색창연한 법규를 끌어들였다. 자신의 손에 결투용 장갑을 한 쪽만 끼고 다른 쪽 장갑은 윌리엄 애시퍼드의 발치에 내던짐으로써 결투를 신청했던 것이다. 애시퍼드는 장갑을 집어들지 않았다. 그래서 손턴은 이듬해 4월에 세 번째로 재판을 치러야 했고(이 사건에 질릴 관중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무죄 방면되었다. 판사는 손턴의 결투 재판 신청을 유효한 변론으로 볼 수 있다고 선언했다. 이후 곧 법령이 개정되어 결투 재판 제도가 사라졌지만 말이다.
손턴은 미국으로 건너가 육십 대 후반까지 살았다고 한다. 메리 애시퍼드의 무덤은 서턴 콜드필드 교회 묘지에 있다. 묘비에는 엄숙하고 교훈적인 비문이 길게 새겨져 있는데, 그녀의 끔찍한 운명은 ‘제대로 보호되지 않은 채 부주의하게도 오락적 장면으로 변질되고 말았다’고 꼬집는 말도 있다.
우리의 지도 제작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잘해나갔다. 그는 교직과 미들랜드를 떠나 런던 북서부 햄스테드의 집과 공직에 안착했고, 이후 재무부로 승진했다. 그리고 메리 애시퍼드가 살해된 지 23년이 지난 1840년, 그는 1페니 우편 요금 제도와 최초의 우표 ‘페니 블랙’을 선보임으로써 세계의 우편 체계를 혁신했다. 과거의 그 살인 지도는 롤런드 힐 경이 한때 지도학자였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다.
글 및 사진 출처 : <지도 위의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