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위의 인문학> 에피소드 04.
자신이 하는 일을 잘 안다면, 희귀 도서 및 지도 판매자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일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로런스 클레이번 위튼 2세(Laurence Claiborne Witten Ⅱ)는 그 법칙에서 예외였다. 지도 판매상이었던 그가 발견한 지도는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바닥부터 바꿔놓았다.
위튼은 코네티컷 주 뉴헤이븐에서 일했지만, 재고를 확보하기 위해 종종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1957년 가을, 그는 제네바에서 동료 중개인의 재고를 뒤적거리다가 심장이 쿵쾅거리는 물건을 발견했다. 피지에 그려진 조잡한 지도였는데, 콜럼버스로부터 약 500년 전에 고대 북유럽 탐험가들이 북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정착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바이킹이 그곳으로 항해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지리학계에 널리 알려진 전설이었으나, 지도 형태의 증거가 발견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증거가 나타난 것일지도 몰랐다. 지도에는 캐나다 뉴펀들랜드나 래브라도의 일부로 보이는 지역이 그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구체적인 지역을 막론하고 신세계를 기록한 최초의 유럽 문서일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논란도 뒤따를 것이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내용이 몽땅 거짓이었다고? 아니면 혹시 그 지도는 세계 최고의 지도 역사학자들을 속일 만큼 정교한 위조품일까? 위조품이라면, 누가 위조했을까?
〈빈랜드 지도(Vinland Map)〉 이야기는 (1000년경 바이킹이 북아메리카에 붙였던 이름이 빈랜드 또는 와인랜드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지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로 꼽힌다. 이 이야기는 또한 지도의 낭만적이고 신비로운 매력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사례이자, 지도가 겉보기와는 사뭇 다를 때가 많다는 인상을 굳히는 일화다.
래리 위튼은 버지니아에서 담배 농장을 경영하다가 가구 제조업으로 업종을 바꾼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1년에 뉴헤이븐에서 희귀본을 다루는 서점을 열었고, 중세와 르네상스의 훌륭한 필사본을 판매하면서 빠르게 이름을 알렸다. 그가 시장에 진출한 타이밍은 완벽했다. 당시 유럽의 많은 도서관과 수집가가 경제적 곤궁 때문에 귀중한 소장품을 팔아 치웠고, 전쟁 중에 약탈된 물건들은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으로 중개인에게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위튼이 신뢰했던 공급자 중에는 니콜라스 라우흐라는 스위스의 한량이 있었다. 라우흐는 유럽의 외환 거래 제약이 심하던 시절에 거래를 주선했고, 제네바에 있는 자신의 살롱에 희귀본 거래자들을 모아 정보를 나누도록 도왔다. 거액의 거래를 앞두고 열리는 라우흐의 축하 파티는 놓칠 수 없는 자리였다.
라우흐에게 정기적으로 물건을 공급하는 사람들 중, 이따금 출처가 모호한 물건을 가져오는 엔초 페라욜리 데 리(Enzo Ferrajoli de Ry)라는 남자가 있었다. 전직 이탈리아 장교였던 페라욜리는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를 쏘다니면서 찾아낸 희귀 도서와 필사본을 ‘유통’시켜서 당장 손에 돈을 쥐는 업자였다. 1957년 9월, 위튼이 마침 라우흐와 함께 있을 때, 그 페라욜리가 피아트 토폴리노를 몰고 와서 새로 입수한 물건을 내려놓았던 것이다.
그때 나타난 희귀한 물건들 중 하나가 오늘날 〈빈랜드 지도〉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지도는 가로가 41센티미터, 세로가 27.8센티미터였고 가운데가 세로로 한 번 접혀 있었다. 그리고 『타타르 이야기』라는 얇은 필사본에 딸려 있었다.
『타타르 이야기』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조반니 피안 델 카르피네가 1247년부터 1248년까지 몽골을 방문하고 쓴 여행기로, 그 책은 피지와 종이에 손으로 쓰여 있었다. 지도도 책도 1430년에서 1450년 사이에 만들어진 듯했다. 위튼이 처음 봤을 때는 현대적인 장정으로 묶여 있었지만 말이다.
만일 지도가 진짜라면,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는 셈이었다. 첫 번째는 콜럼버스로부터 약 50년 전에 바이킹이 북아메리카로 항해했던 사실을 유럽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두 번째는, 지도에서 빈랜드가 그려진 부분에 고딕체로 깨알같이 적힌 설명을 참고하건대, 바이킹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거대한 섬을 발견한 시점 자체는 985년에서 1001년 사이라는 사실이었다.
20세기 중엽에 스위스에 있는 친구의 가게에서 그 지도를 보고서, 위튼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는 흥분을 느끼면서도 일면 회의적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지도가 진짜 같았지만(지도 중개인들은 자신의 육감을 믿는다), 중세 지도에 관해서는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전문가가 많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당시에 그가 몰랐던 사실은 그런 전문가들 중 몇몇이 벌써 그 지도를 보고서 찜찜하게 느꼈다는 것이었다.
위튼은 지도와 그것에 딸린 필사본을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몇 시간쯤 고민했다. ‘당시 내가 위조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근거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위튼은 30년 뒤에 이렇게 썼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위조품은 보통 단박에 알아볼 수 있다. 게다가 위조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굉장히 많다. 우선 적당한 가죽, 올바른 필기도구, 적절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잉크를 구해야 한다. 당대의 필기 양식과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해야 하고, 지도 제작에 관한 이론적, 실제적 지식을 든든하게 갖춰야 한다. 한 사람이 모든 기술을 다 갖고 있기란 극히 드물 테고, 여러 명이 팀을 이룬 경우라도 필요한 재료를 모두 충당하려면 여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동기의 문제도 있었다. 누가 되었든, 엄청난 수고를 들여서 그토록 훌륭한 위조품을 만들 이유가 무엇일까? 어떤 금전적 보상이 있을까? 출처는 또 어디일까? 그 지도는 공개 경매에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전에 중개인들끼리 거래한 기록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다락방에서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의 그림을 발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있을 법하지 않았지만,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지도는 언뜻 지나치게 단순해 보일 만큼 간결했지만, 알고 보면 지도 제작에 관한 당대의 온갖 지식이 반영되어 있었다. 내용은 대부분 적어도 하나 이상의 중세 지도에서 베낀 게 분명했다. 중세인의 세계를 구성했던 세 대륙(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이 그려져 있었고, 북쪽이 위쪽이며, 대충 타원형이고, 사방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필치는 조악하고, 지명은 많지 않았다. 도시는 겨우 다섯 개만 표시되어 있었다. 알렉산드리아, 로마, 예루살렘, 메카, 카이로. 제일 붐비는 대륙은 아시아로서 강과 산맥을 비롯한 여러 요소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중 다수가 『타타르 이야기』에도 언급된 것들이었다.
영국은 서쪽으로 서머싯, 데번, 콘월이 툭 튀어나온 모습이라 확연히 알아볼 수 있었고, 아일랜드(이베르니아)와 와이트 섬의 형태도 알아보기 쉬웠다. 스코틀랜드는 아직 떠올리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그 너머에 셰틀랜드와 페로 제도로 보이는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었다. 국경은 없고, 채색이나 장식도, 알레고리나 우화적인 표현도 없었다. 그래도 이 지도는 몇몇 세부적인 지점에서 충격적일 만큼 정확한데, 그런 부분은 거의 틀림없이 직접 탐사한 내용을 반영한 결과였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린란드의 윤곽과 축척은, 비록 대륙에서 멀찍이 떨어진 섬으로 그려지기는 했어도, 요즘 지도의 윤곽선과 겹치면 오싹하게 들어맞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 점은 나중에 지도가 가짜임을 주장하는 강력한 근거로 거론되었다. 빈랜드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북아메리카보다 훨씬 더 작게 그려져 있지만(세로 길이가 영국의 두 배에 불과하다), 동해안의 형태는 현대 지도와 얼추 비슷하다.
빈랜드가 그린란드 서쪽에서 살짝 내려간 지점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표현상의 문제일 뿐이다. 양피지에서 서쪽으로 제일 멀리 나아간 지점이 거기였던 것이다. 제작자는 가죽의 크기에 제약되었고, 중세의 여느 제작자와 마찬가지로 빈 공간을 놔두기를 꺼렸을 것이다. 빈랜드에는 내륙으로 깊이 파고든 만이 두 개 있다. 빈랜드가 사실 빈랜드, 헬룰란드, 마크란드라는 세 섬으로 이루어졌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위튼의 마음을 찜찜하게 만든 것은 벌레 구멍이었다. 지도에도 문서에도 벌레 먹은 구멍이 나 있었지만, 위치가 서로 맞지 않았다. 두 물건이 동시에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필적은 둘 다 같은 사람이 쓴 것 같았다), 위조자가 애초에 벌레 구멍이 나 있었던 서로 다른 두 피지에 현대의 잉크로 지도와 문서를 따로따로 위조했단 말인가?
이런 의문이 떠올랐는데도, 위튼은 페라욜리에게 3,500달러라는 적잖은 돈을 주고 물건을 구입했다. 위튼은 2주 뒤에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구입 사실을 아무에게도 밝히지 않았으나,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더 참지 못하고 옆자리에 앉은 미국인 엔지니어에게 말해버렸다.
위튼은 자신이 탄 비행기가 구불구불 미국으로 날아가는 항로가(아이슬란드에 연료 주입차 기착했다가, 그린란드와 래브라도 남단의 상공을 난 뒤, 뉴펀들랜드에 두 번째로 기착했다) 옛 북유럽 탐험가들의 항로와 아주 비슷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온 위튼은 예일 대학에 있는 친구들에게 지도와 필사본을 보여주었다. 친구들도 벌레 구멍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출처가 불명확하다는 점을 걱정했다. 심란한 수수께끼가 하나 더 있었다. 지도 뒷면에 ‘스페쿨룸의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부분에 대한 도해’라는 말이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대체 무슨 뜻일까? 이 문구가 모든 수수께끼를 풀 열쇠일 수도 있었다.
위튼은 그 지도가 논란을 일으키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당시로서는 자신이 진위를 증명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했다. 페라욜리는 지도의 과거에 대해 더 상세한 정보를 주기를 거부했는데, 위튼은 자신이 그 문제를 더 추궁하면 꼭 집착하는 것처럼 보여서 비웃음을 살까 봐 두려웠다. 처음의 흥분이 잦아들자, 위튼은 그 문제는 잠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는 지도를 판매 카탈로그에 올리지 않고 아내 코라에게 선물했다.
그래서 이후 2년 동안 지도는 위튼의 뉴헤이븐 집에 보관되었다. 가끔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을 때 꺼내서 보여주곤 했지만, 폭발적 잠재력을 지닌 역사적 문건이라기보다는 호기심을 자아내는 수집품으로 여겼다.
시간이 흐르면서, 위튼은 자신이 친구네 가게에서 우연히 그 지도를 마주쳤던 게 위대한 발견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세계 최고의 지도 전문가 중 적어도 두 사람이 이미 그 물건을 철저히 조사했다는 정보를 알게 된 것이었다. 위튼이 그 정보를 더 일찍 알았다면, 자신이 농간에 빠졌다고 믿을 수도 있었다.
위튼이 제네바를 방문했던 1957년 9월로부터 불과 몇 달 전, 〈빈랜드 지도〉와 『타타르 이야기』는 대영박물관에서 그곳 지도실 책임자인 R. A. 스켈턴(R. A. Skelton), 그리고 인쇄본 부책임자이자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31와 윌리엄 캑스턴(William Caxton)32의 전기 작가이기도 한 조지 D. 페인터(George D. Painter)의 검사를 받았다. 세상에 그 문건의 족보를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그 두 사람이었다.
스켈턴은 꼼꼼한 전문가이자 중세 지도의 최고 권위자였으므로, 〈빈랜드 지도〉는 반드시 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는 자기 의견을 이후 8년이나 비밀로 지켰고, 심지어 자신이 그 지도를 봤다는 사실조차 숨겼다.
스켈턴과 페인터는 애초에 어떻게 그 지도를 봤을까? 페라욜리는 위튼에게 지도를 보여준 시점으로부터 적어도 3개월 전에 런던의 제일가는 중개상 어빙 데이비스에게 그 물건을 내보였다. 데이비스는 물건을 점검해보고 괜찮으면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빌렸지만, 출처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에 곧장 대영박물관으로 가져갔다. 그렇게 해서 며칠 동안 스켈턴과 페인터가 지도를 조사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지도를 본떠 베끼기까지 했는데, 일반적으로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행동이었다.
사실은 페인터도 스켈턴도 지도가 진짜라고 믿었다. 세월이 흐른 뒤, 페인터는 〈빈랜드 지도〉를 가리켜 ‘세계 역사와 아메리카 대륙 발견의 역사에서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순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중세가 우리에게 보내온 중요하고 진실한 메시지’라고 평가하며, ‘과거에서 온 진실한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두 번 다시 침묵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 페인터와 스켈턴은 그 지도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가 과거에 내렸던 어떤 결정보다도 더 큰 논란거리가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스켈턴은 자신의 평판을 걸면서까지 그 지도가 진품이라고 보증할 마음은 내키지 않았다. 지도가 장물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지도는 데이비스에게 돌아갔고, 데이비스는 다시 페라욜리에게 돌려주었다.
위튼은 대영박물관 일화를 까맣게 몰랐으니, 그 지도가 진짜라고 믿는 사람이 자기 혼자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958년 겨울, 벼락같은 행운이 찾아왔다. 위튼은 비로소 자신이 세기의 지도를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발단은 예일대 도서관에서 중세 및 르네상스 문헌을 담당하는 학예사 톰 마스턴(Tom Marston)의 전화였다.
마스턴은 위튼에게 흥미로운 진품 필사본을 몇 점 입수했으니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위튼은 처음엔 내키지 않았다. (위튼의 친구이자 정기적인 고객이었던) 마스턴이 자랑하려고 그러겠거니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못해 새로 입수했다는 물건들을 구경했는데, 그중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도미니크회 수도사 뱅상 드 보베가 쓴 백과사전적 세계사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의 일부를 담은 필사본이었는데, 표지는 새로 댄 것 같았고, 심하게 닳은 장정은 15세기에 작업한 것 같았다. 위튼은 그 책의 고딕 필기체를 〈빈랜드 지도〉나 『타타르 이야기』의 필체와 비교해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스페쿨룸’이라는 단어도 어쩐지 낯익었다.
위튼은 그 책을 하룻밤 빌려서 두 필사본을 비교해보았다. 희한하게도 두 필사본은 황소의 머리 모양을 한 워터마크(watermark)가 같았다. 위튼은 1989년 10월에 이렇게 회고했다. ‘두 번째 엄청난 충격은 자를 손에 들었을 때 왔다. 두 필사본의 페이지 크기가 정확하게 같았던 것이다.’ 게다가 본문 필체도 비슷했고, 여백을 준 방식도 같았다. 그러고도 한 가지 더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수수께끼의 마지막 조각이었다. 벌레 구멍이 서로 일치했던 것이다.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 앞면의 구멍은 〈빈랜드 지도〉와 정확히 같은 위치였고, 뒷면의 구멍은 『타타르 이야기』와 정확하게 겹쳤다. 위튼은 한때 세 문서가 하나로 묶여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아드레날린이 치솟기 시작했다. 도로 합친 부분들은 서로를 보완했을 뿐더러 이제 어느 한 부분이라도 현대의 위조품일 가능성은 상상할 수 없었다.’
위튼은 그날 밤 마스턴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스턴은 위튼이 1957년에 유럽에서 돌아온 뒤 처음 〈빈랜드 지도〉를 보여준 사람 중 하나였다. 마스턴은 그때부터 지도에 열광했지만, 그도 역시 엉뚱한 벌레 구멍이 신경 쓰인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가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끼었으니, 두 사람은 사건의 경과를 그럴싸하게 재구성해볼 수 있었다.
페라욜리는 원래 〈빈랜드 지도〉와 『타타르 이야기』, 그리고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를 동시에 손에 넣었다(그때 이미 분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예전에 한 권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채,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만 런던의 어빙 데이비스에게 팔았다. 데이비스는 그것을 카탈로그에 올렸고, 카탈로그를 본 마스턴이 100파운드도 안 되는 가격에 사들였던 것이다.
다음으로 위튼과 마스턴은 지도가(세 부분 중에서 명백히 가장 값지고 중요한 부분이었다) 위조품일 가능성에 대한 갖가지 설명을 떠올려보았다. 위조자가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를 ‘향상시키기’ 위해서(이 필사본의 진실성은 추호도 의심되지 않았다) 중세의 아무 필사본이나 골라 (즉 『타타르 이야기』) 빈 장에 지도를 그린 뒤 하나로 엮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그러나 거기에는 그럴듯한 동기가 부족했다. 위조자가 기껏 그렇게까지 하고서 본문을 도로 떼어낸 이유를 도통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본문이야말로 지도에 진실성을 부여하는 요소인데 말이다. 마스턴은 문서들이 다시 흩어지지 않도록 보장하기 위해서, 『스페쿨룸 히스토리알레』를 코라 위튼에게 증여했다. 마스턴은 훗날 이렇게 썼다. ‘내 입장에서 그 행동이 전적으로 돈키호테적인 짓만은 아니었다. 그 너그러운 조치 때문에, 나중에 혹시 위튼 부인이 지도를 팔기로 결정하면 우리 예일 도서관이 그 거취에 조금이나마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이제 위튼과 마스턴은 자신들의 발견을 남들에게 차근차근 설득시켜 나갔다. 그들이 모두를 설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지도에 유달리 매료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부유한 독지가이자 예일 졸업생인 폴 멜론이었다. 멜론은 〈빈랜드 지도〉가 진짜라고 믿었고, 자신이 그것을 익명으로 예일에 기부해서 좀 더 연구하도록 하고 그 결과 그것이 정말 진품으로 밝혀진다면 영구 전시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려면 먼저 그가 지도를 소유해야 했다. 멜론은 코라 위튼에게 그녀의 남편이 치른 가격의 여든다섯 배인 30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녀는 수락했다.
그런데 곧 그 돈을 도로 물러줘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발생했다. 1961년에 엔초 페라욜리가 사라고사 대성당에서 고서를 훔친 죄로 스페인 경찰에게 체포되어 구금되었던 것이다. 페라욜리는 감옥에서 18개월을 살고 가석방으로 나왔고, 위튼은 페라욜리와 성당의 거래는 모두 참사위원들의 축복하에 이뤄진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줄곧 그의 결백을 항변했다. 불확실한 몇 달이 흐른 뒤, 위튼은 페라욜리가 훔쳤다는 기나긴 물품 목록에 〈빈랜드 지도〉나 관련 필사본은 이름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한숨을 돌렸다.
이후 5년 동안, 세계 최고의 지도 전문가들이 비밀 엄수를 맹세한 채 〈빈랜드 지도〉의 온갖 측면을 파헤쳤다. 예일대는 온 유럽의 피지, 잉크, 장정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영박물관의 스켈턴과 조지 페인터는 예일로 날아와서, 한 작업에 들인 시간으로는 최고로 긴 시간을 그 문서를 점검하는 데 쏟았다. 톰 마스턴을 포함한 예일의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마다 확신의 정도는 차이가 있었지만, 다들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 지도가 진짜라는 데 자신들의 명성을 걸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주장을 뒷받침할 두툼한 자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예일대 도서관의 지도 담당 학예사인 알렉산더 오어 피에토르는 이렇게 적었다. ‘몇몇 중대한 역사적 문제에서는…… 단 하나의 새로운 문서가 발견됨으로써 기존에 정설로 인정되던 패턴이 심대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런 문서의 출간은 피할 수 없는 의무다.’ 피에토르는 자신은 소개하는 대상이 그렇듯 ‘극적으로 새로운’ 물건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이제 그 부담을 질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빈랜드 지도〉가 ‘구체적인 지역을 불문하고 아메리카 대륙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표시했던 지도들 가운데 우리가 아는 최초의 사례’라고 주장하며, 모든 증거와 모든 전문가의 의견이 ‘일말의 유보도 없이 이 필사본의 진실성을’ 보증한다고 결론지었다.
지도와 두 필사본은 1965년 10월 9일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예일대 출판부는 문서를 해독하고 그 기원을 짐작하여 분석한 300쪽짜리 해설서를 냈다. 지도와 책은 얼마 전에 막 문을 연 바이네케 도서관에 전시되었는데, 인상적인 외관을 자랑하는 그 신축 건물은 예일의 탁월한 희귀 도서 및 필사본 컬렉션을 소장하기 위해서 특별히 설계된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빈랜드 지도〉는 구텐베르크 성서 곁에 자리하게 되었다.
언론의 뒤이은 폭발적 관심은 작은 폭탄이 터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로런스 위튼의 회상에 따르면, ‘이탈리아 사람이나 이탈리아계 미국인은 한 명도 빠짐없이 웬 인간이 감히 콜럼버스에게서 신대륙 발견의 선취권을 강탈하려 든다며 분개했다. 예일대의 발표일이 하필 콜럼버스의 날 직전이었기 때문에 모욕이 더욱 가중된 것 같았다.’ 위튼은 언론의 공세에 시달렸다.
기자들은 위튼의 집 대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는데, 1965년만 해도 그런 짓은 관행적인 취재 활동이 아니었다. 위튼은 기자들에게 사연을 있는 그대로 알려주었지만,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문서를 손에 넣었는지는 신중을 기하는 차원에서 밝히지 않았다.
지도의 진위를 증명할 의무는 당연히 그 진실성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넘어갔다. 이후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지도의 재료와 출처에 관한 예의 익숙한 주장들을 들먹이면서 옥신각신했다. 1966년에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관련된 내용으로 국제 학회가 열렸고 그 이듬해에는 대영박물관에서 추가로 분석이 이뤄졌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그러던 1974년, 지도에 대한 과학적 검사가 최초로 이뤄지면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현미경 분석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시카고의 선도적 연구업체 ‘매크론 어소시에이츠’는 지도의 잉크를 분석해보았다. 결과는 참혹했다. 월터 매크론과 루시 매크론 부부는 지도의 29군데 지점에서 잉크 미세 입자를 채취하여 분석한 뒤, 그 속에 티타늄이 아나타제의 형태로 3~50퍼센트까지 들어 있다고 발표했다. 문제는 순수한 이산화티타늄 염료인 아나타제가 1920년 무렵부터야 상업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었다.
분석가들은 위조자가 속임수를 쓴 방법도 알아낸 것 같다고 말했다. 먼저 황갈색 잉크를 칠하고 그 위에 검은 잉크를 칠한 뒤 전체적으로 함께 긁어내어 ‘퇴색한 잉크처럼 꾸민’ 것이라고 했다. 월터 매크론은 자신이 검출한 아나타제가 중세 잉크에 들어 있을 가능성은 ‘넬슨 제독이 트라팔가 해전에서 썼던 기함이 호버크라프트(Hovercraft, 수륙 양용 배)일 가능성’에 맞먹는다고 표현했다. 예일은 마지못해 지도가 ‘현대의 위조품일 수도 있다’고 인정해야 했다.
위튼과 페인터를 비롯한 여러 관계자는 이 분석을 최종 선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육감과 역사적 근거를 믿었다. 그리고 〈빈랜드 지도〉는 이후 반격에 나서는 듯했다. 1985년, 전문가들이 다시 한번 지도를 분석했다. 그동안에도 과학은 발전하여, 캘리포니아 대학 데이비스 캠퍼스의 크로커 핵 연구소가 새로 장만한 자랑스러운 엑스선 기계가 이야기를 한 단계 진전시켰다.
연구소가 사이클로트론(cyclotron)34의 양성자 빔을 지도에 쏘여서 얻은 결과는 매크론의 보고서에 의문을 던졌다. 매크론이 시료로 썼던 잉크 입자들은 지도의 잉크 전체를 대변하지 못하는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데이비스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티타늄 원소는 극미량만 검출될 뿐이었고, 그들이 조사한 영역의 절반가량에서는 아예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사이클로트론에서는 구리, 니켈, 코발트, 납 같은 다른 미량 원소도 스무 가지가 더 검출되었는데, 매크론이 대개 놓쳤던 그 원소들은 중세 잉크에는 흔했지만 현대 잉크에는 결코 포함되지 않는다고 말해도 좋은 천연 물질이었다. 게다가 문제의 티타늄은 구텐베르크 성서에서도 검출되었으며, 그것도 〈빈랜드 지도〉에서 검출된 양보다 더 많았다.
그리하여 지도는 다시금 활약에 나섰다. 또 한 번 국제 학회가 조직되었고, 예일대 출판부는 1965년에 지도를 공개하면서 펴냈던 해설서를 업데이트하겠다고 발표했다. 편집자들은 1995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 그 해설서를 통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도학적 발견 중 하나가 복권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거의 40년 전에 대영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빈랜드 지도〉를 검사했던 조지 페인터는 ‘과거에서 온 진실된 목소리는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두 번 다시 침묵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떤 전문가들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아메리카나(미국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각종 물건을 통칭하는 말로, 지도 분야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이 표시된 고지도나 고서 등을 뜻한다 - 옮긴이)의 세계적 권위자인 윌리엄 리스(William Reese)는 〈빈랜드 지도〉를 여러 차례 조사한 뒤 ‘가짜일 가능성이 80퍼센트, 진짜일 가능성이 20퍼센트’라고 최종 결론 내렸다.
2004년에 지도 역사학자 커스틴 시버(Kirsten Seaver)는 〈빈랜드 지도〉가 가짜임을 주장하는 것을 넘어서, 앞선 조사자들이 종종 간과했던 문제인 위조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의견을 냈다. 시버는 오스트리아의 예수회 수도사였던 요제프 피셔(Josef Fischer)에게 비난(또는 공로)의 화살을 돌렸다. 피셔는 중세 지도와 바이킹의 탐험 역사에 정통한 전문가였는데, 시버는 피셔에게 금전적 소득보다 더 깊은 동기가 있었다고 주장했다(금전적 소득은 미미해 보인다). 그것이 일종의 복수였다는 것이다.
피셔와 동료 예수회 수도사들은 1930년대 중엽에 나치와 사이가 틀어졌다. 전쟁이 터지자 피셔는 살던 곳을 떠나 여러 차례 옮겨야 했고, 결국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의 볼페그 성에 정착했다. 어쩌면 피셔는 그곳에서 나치 학자들을 갖고 놀 요량으로 지도를 그렸을지도 모른다.
나치는 빈랜드 발견의 우선권이 북유럽인에게 있다는 지도의 주장을 승인하면서도, 그 발견이 로마 가톨릭의 교세를 확장하려는 욕망에서 추진되었다는 생각에는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도적인 지도학 학술지 「이마고 문디」는 이 가설에 대해서 ‘기발하고 설득력 있다’면서도 증거는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빈랜드 지도〉와 그에 딸린 필사본은 지금도 바이네케 도서관 카탈로그에서 가장 귀중한 소장품일지 모른다. 보험가를 책정하기 위해서 감정했을 때 가격이 2,000만 달러(약 224억 원)에 달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우스울 만큼 줄여서 말한 표현이지만, 이 지도는 여전히 ‘상당한 논쟁의 대상’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빈랜드 지도〉가 위조품이라도(확실히 알기는 영영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 지도의 진정하고 영속적인 가치는 진품이냐 날조품이냐 하는 문제를 넘어선다.
〈빈랜드 지도〉의 가치는 그 속에 담긴 이야기에 있기 때문이다. 빈랜드의 미스터리는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도는 우리를 매료시키고 흥분시키고 자극한다는 것, 역사의 경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는지에 관한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묵묵히 전달한다는 것을.
글 및 사진 출처 : <지도 위의 인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