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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산북스 Feb 01. 2018

5억 번 이상 인쇄된 <런던 지하철 노선도〉

<지도 위의 인문학> 에피소드 05.

그가 남긴 편지를 보면, 그리고 대부분의 사진을 보면, 해리 벡(Harry Beck)은 농담을 썩 좋아하는 사람이었을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존경을 추구할 사람 같고, 연봉 인상을 추구할 사람 같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둘 다 자격이 있었다. 


공학 제도사로 간간이 고용되어 일했던 벡은 20세기 최고의 유용한 물건으로 꼽히는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디자인했던 사람이다. 그의 노선도는 갖가지 형태로 제작되어 역사상 어떤 지도보다도 많이 인쇄되었다. 그 횟수는 5억 번이 넘을 것이고,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그리고 벡이 그 대가로 받은 돈은 단 몇 파운드에 불과했다.


사진 출처 : 셔터스톡


〈런던 지하철 노선도〉는 디자이너가 어려운 문제를 단순화하는 데 성공한 모범 사례이자 그럼으로써 사용자들에게 영감을 준 사례이다. 벡의 노선도는 체계적이고 도식적이라, 실제 지리는 무시한다. 현실에서는 당연히 역들 사이의 거리가 다 같지 않다. 런던 중심가가 교외에 비해 그렇게까지 넓지도 않다. 열차가 직선으로 달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을 숨긴 점이야말로 그 지도의 강점이다. 


그것은 사실 느슨한 의미에서만 지도이고, 오히려 그보다는 현실에 끼어든 장애물을 모조리 제거하고서 요소들 간의 관계와 방향만을 표시한 회로도에 가깝다. 실제 도시가 지도에 끼어든 부분은 템스 강이 유일하다. 나머지는 모두 시각적 해석일 뿐이다.


벡의 노선도는 런던의 여러 상징 중에서도 수명이 제일 길다. 사방팔방 어디에나 있다는 점과 특징적인 색깔 코드 덕분이기도 하지만, 1670년대 대화재 이후의 런던을 묘사했던 판화들과 마찬가지로, 마구잡이로 뻗어나가는 도시를 질서 있고 감당할 수 있는 형태로 깔끔하게 정돈하여 보여준 트릭이 워낙 뛰어났기 때문이다. 정작 벡은 오르텔리우스나 오길비와 같은 반열에 들겠다는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스스로 지도 제작자로 여기지도 않았다), 좌우간 그가 창조한 지도는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셔터스톡


벡의 지도는 어떤 점이 특별했을까? 명료성도 중요하지만, 아름다움도 한몫했다. 이전에도 도식적 노선도가 없진 않았다. 특히 조지 도가 ‘런던 & 노스 이스턴 철도’를 위해서 그렸던 노선도는 주목할 만했으나, 벡의 지도처럼 여러 노선을 설득력 있게 결합하여 보여준 지도는 없었다. 


아름다운 지도도 달리 없지는 않았다. 맥도널드 길이 1920년대에 그린 지도는 타이포그래피가 화려하기 그지없었고, 프레드 H. 스팅모어가 구불구불한 스파게티 가닥처럼 표현한 노선도는 벡이 등장하기 전에 런던 시민들이 주머니에 넣어 다니던 지도였다. 


그러나 심리학 강사이자 지하철 노선도 마니아인 맥스웰 로버츠가 모든 훌륭한 지도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핵심 요소들을 파악한 바에 따르면(로버츠는 순전히 재미 삼아서 전 세계 지하철 노선도를 더 낫게 디자인하곤 한다), 벡의 지도는 단순성, 통일성, 균형, 조화, 지형 반영 중 마지막 항목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로버츠는 벡의 지도가 직선을 썼기 때문에 특별한 게 아니라 코너를 적게 썼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분석한다.


그 천재는 농담을 잘 받아들였을까? 벡이 풍자 문학을 좋아했던 것 같긴 하지만, 그가 용인하는 범위는 어느 정도였을까? 요즘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가짜 〈런던 - 옮긴이지하철 노선도〉들도 기꺼이 받아들였을까? 그런 노선도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화가 사이먼 패터슨이 1992년에 그린 〈큰 곰〉이란 작품이다. 


그 지도는 현재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 자랑스레 걸려 있고, 런던 교통 박물관 기념품 가게에서 여러 형태의 복제품으로도 팔리고 있다. 패터슨은 모든 역의 이름을 재치 있게 고른 축구 선수 이름(주빌리 선), 철학자 이름(디스트릭스 선과 서클 선), 할리우드 배우 이름으로(노던 선) 교체함으로써 노선도를 팝아트처럼 취급했다.


좀 더 최근에 시도된 패러디로는 〈데일리 메일 도덕 노선도〉가 있다(런던 교통 박물관 기념품점에선 팔지 않지만 코미디 웹사이트인 ‘포크’에서 전체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노선과 역은 중산층 영국인의 흔한 두려움과 집착을 표현한다. 


디스트릭트 선은 ‘성가신 것 노선’으로 바뀌어 트위터, GPS, 쓰레기 같은 학생들, 24시간 음주 등등의 역을 포함하고, 베이컬루 선은 ‘의학적 공포 노선’으로 바뀌어 비만, 백내장, 심정맥 혈전증 등등을 포함한다. 노던 선(‘최대의 적 노선’)도 타 볼 만하다. 《가디언》 독자,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 공격적으로 구걸하는 사람, 이민자, 프랑스 사람 등등에서 골라서 하차할 수 있으니까.


벡이 이런 패러디를 싫어했을지 아닐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 위는 예전 지도이고,아래는 실제 지리를 대대적으로 정비한 벡의 〈회로도〉다.



그는 개인용 컴퓨터의 등장으로 누구나 쉽게 그의 지도를 조작하며 즐길 수 있게 된 때로부터 20년쯤 전인 1974년에 죽었으니까. 그러나 그도 알았을 법한 패러디가 하나 있었다. 1966년에 한스 웅거가 디자인한 런던 지하철 공식 포스터였는데, 사이먼 패터슨 작품의 선배처럼 보이는 그 지도는 노선도의 일부 역에 옵아트, 추상표현주의 같은 이름들을 붙여 미술 사조를 표현했다.


이후에 나온 패러디 중에는 정말 유용한 것도 있었다. 노선도를 교란시키기보다 그 위에 정보를 얹은 지도들이었다. 이를테면 지하철이 실제로 지하를 달리는 부분이 어디인지 보여주는 지도가 그렇고(전체의 45퍼센트에 불과하다), 역에서 역 사이 거리를 보여줌으로써 걷는 게 더 빠를지 지하철을 타는 게 더 빠를지 알려주는 지도도 그렇다(레스터 스퀘어에서 코번트 가든까지 몇백 미터는 걷는 편이 늘 더 빠르다).


우아하고 예술적인 패러디도 있었다. 고노 아이치의 〈활자체 지도〉는 유명한 활자체 수백 가지를 종류에 따라 각각의 노선으로 배열했다. 그 지도에서 푸투라체와 벨센테니얼체는 ‘산세리프 노던 노선’에 있고, 조지아체와 발바움체는 ‘모던 디스트릭트 노선’에 있고, 에어리얼체와 코믹샌즈체는 ‘장식적 오버랜드 노선’에 있다. 바버라 크루거의 감정 노선도에서는 역 이름이 배신, 연민, 교만 등등이다. 


H. 프릴링거의 번역 작품은 또 어떤가. 프릴링거는 대담하게도 만일 독일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오늘날 런던 시민들이 어떤 장소를 돌아다니고 있었을지를 상상해보았다. 그렇다면 런던 시민들은 바서클로에서 쾨니히스크로이츠로, 론돈브뤼케에서 모르겐토넨크로이산트로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각각 워털루, 킹즈 크로스, 런던 브리지, 모닝턴 크레슨트라는 지명을 독일식으로 바꾼 것이다 - 옮긴이). 〈세계 지하철 노선도〉도 있다. 마크 오번든은 벡의 노선도를 전 세계로 확장하여, 역마다 세계의 지하철 이름을 달아놓았다.


맨 위는 〈데일리 메일 노선〉 가운데는 고노의 〈활자체 지도〉다.맨 아래는 벡이 직접 그렸던 패러디 노선도다.



머리에 브릴 크림을 바르고 두꺼운 안경을 썼던 우리의 디자이너는 그런 패러디를 좋아했을까? 모르긴 해도 꽤 좋아했을 것 같다. 벡의 노선도를 패러디한 최초의 지도는 사실 벡 본인이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노선도가 공개되고서 두 달밖에 안 지났던 1933년 3월, 벡은 (혹은 벡의 스타일과 서명을 사칭한 다른 누군가가) 런던 교통국의 사내 잡지에 장난 같은 지도를 한 장 실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노선도를 보고는 전기 회로도를 닮았다고 말했기에, 그는 정말로 가짜 회로도를 그려보았다. 실제 라디오 조립에 써도 될 것 같은 그럴싸한 회로도를 노선도 형태로 그렸던 것이다. 베이컬루 노선은 ‘베이클라이트 관’으로 바뀌었고, 첫 역과 끝 역은 ‘어스(접지)’와 ‘에어리얼(안테나)’로 바뀌었다. 저항, 단자, 증폭기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역의 아래에는 템스 강이 흐른다.




글 및 사진 출처 : <지도 위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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