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커리어를 어떻게 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에 인사팀장이 답했다. 회사는 개인의 커리어를 책임지지 않으니 스스로 찾으라고. 인사팀장의 말은 배신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회사가 강조하는 성장의 가치를 철석같이 믿었다. 회사에서의 성장이란 곧 커리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커리어를 책임지지 않는단다. 입사하고 만 3년이 흘렀다. 나는 늘 제자리걸음이고 심지어 퇴보하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났다. 그것은 온전히 회사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3년간의 내 커리어는 딱 세 글자로 요약된다. 물경력. 사회생활 4년차에 주임까지 달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나를 소개하기 어려웠다. 에디터라고 하기엔 글을 안 쓴 지 너무 오래됐고, 기획자나 작가라고 하기엔 제대로 기획한 콘텐츠가 있던가? 촬영, 편집이 안 되는 사람을 PD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마케팅과 브랜딩, PR 언저리의 일을 하고 있었지만 어느 하나도 전문적으로 수행하진 못했다. 자신의 일에 프로의 자세로 임하는, 아니 이미 프로인 친구들 앞에서 항상 주눅 들 수밖에 없었다.
주먹구구식으로 일하고 새로운 것은 일단 거부하는 보수적인 회사 때문에 내 커리어는 엉망이 됐다고 늘 분노에 차있었다. 여러 동료들이 전문성 강화를 위한 교육 및 인력 충원을 회사에 요구했지만 반영되지 않았다. 반영된다 하더라도 일회성 교육에 그치거나 여전히 전문성 없는 스터디로 진행되다 흐지부지 됐다. 회사는 매번 성장을 말하면서도 성장을 원하는 직원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그 직원들은 떠났다. 인사팀장의 말이 맞았다. 회사는 개인의 커리어를 책임지지 않았다.
물론 모든 직원이 성장에 불만을 갖지는 않았다. 분명 성장하고 있는 직원도 많았다. 그러나 확실히 내 직무는 성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커리어를 찾으러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내 커리어는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순진했거나 바보 같았는지 모른다. 내 커리어를 회사가 책임진다고 생각했다니. 커리어도 내 인생인데 책임을 전가해 왔다. 인사팀장의 말은 배신이 아니라 공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