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스타터레터 #12
안녕하세요.
6년 차 클라이머 윤병현입니다.
클라이밍을 처음 시작한 계기는 특별하지는 않아요. 우연히 고등학생 때 김자인 선수의 경기를 보고 관심을 가지게 됐는데요. 성인이 된 후에 ‘더클라임’이 집 근처에 있어서 강습을 들어보니 정말 재미있는 거예요. 더 깊게 배워볼까 싶었는데, 당시 그곳에서 강습하고 있던 민규 쌤(서울볼더스)이 산악부를 권유해주었어요.
그렇게 대학 산악부 동아리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클라이밍에 더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실내 클라이밍뿐 아니라 엄청 다양한 클라이밍을 접하게 됐거든요. 등산부터 시작해서 리드 클라이밍, 자연 암벽 등반 등 알아갈수록 많은 종류의 클라이밍이 있더라고요. 그 종류만큼이나 클라이밍의 재미는 끝이 없는 것 같아요. (웃음)
2021년부터는 강사로서도 활동하고 있어요.
민규 쌤과의 인연으로 서울볼더스에서 강습을 시작해 지금은 서울숲클라이밍에서 일해요. 돌이켜보면 처음에는 노하우가 없어서 정보 전달에만 치중된 수업을 했던 것 같아요. 당시 저한테 수강한 분들이 재미있었는지, 어떻게 수업을 들었는지 궁금해요. 저 스스로는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그래도 아쉬움 덕분에(?) 지금은 더 좋은 방향으로 강습을 발전시키고 있어요. 실제로 강습 내용도 무조건 잘하는 방법이나 정보만 가르친다기보다 클라이밍 자체에 재미를 붙일 수 있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었죠.
무엇보다 이제는 강습생들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겼거든요. 강습생마다 좋아하는 포인트가 달라서 잘 캐치했다가 수업에 적용해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즐겁게 문제 푸는 걸 즐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세세하게 스킬을 알려주길 원하기도 하거든요. 전자인 사람이 많은 반에서 장황하게 스킬을 설명하고 있으면 눈동자에서 점점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보여요. (웃음)
아직 3년 차밖에 안 된 주니어 강사지만 앞으로도 더 즐겁고 좋은 수업을 많이 하고 싶어요. 제게 수업을 받은 분들이 계속 흥미를 느낄 수 있도록 클라이밍의 매력을 잘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클라이밍의 무궁무진한 매력을 더 많은 사람이 알 때까지!
지금은 실내 볼더링만 유행하지만 접하고 보면 다른 클라이밍도 재미있거든요. 특히 자연암벽을 오르면 거기서만 느낄 수 있는 쾌감이 있어요. 제가 가봤던 산 중에 딱 한 곳만 꼽자면 ‘인수봉’을 추천하고 싶어요. 오르는 루트만 100가지가 넘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한 클라이밍 성지인데요.
인수봉은 정상 부근에 자리한 큰 암벽이라 일단 그 아래 서 있기만 해도 압도되는 느낌이 있어요. 클라이밍을 시작한 후에는 암벽 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근데 어느 정도 올라갔을 때 쉬면서 시야를 살짝 돌리면 생각보다 높이 올라와 있어요. 그때 바위랑 서울 풍경이 겹쳐 보이는데 장관이라는 표현으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기분이 좋아요. 클라이밍을 좋아한다면 한 번쯤 느껴보시면 좋을 듯해요.
그리고 최근에는 클라이밍 선진국인 일본으로도 등반을 다녀왔는데요. 우리나라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클라이밍을 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더 발전돼 있어요. 실내 암장만 가도 느낌이 달라요. 암장마다 특색이 다 살아있어서 도장 깨는 재미가 있거든요.
세팅 퀄리티도 남달라요. 지금까지 제가 정말 많은 세팅을 경험해봤는데도, ‘이런 새로운 동작이 나올 수 있다고?’ 싶은 거예요. 노래에 비유하자면 듣자마자 ‘어? 이 노래 뭐지?’ 싶은 느낌이랑 비슷해요. 무척 신선하면서도 엉뚱하지 않은 느낌이요.
클라이머 윤병현이 뽑은 한일 암장 BEST
일본 암장 이야기가 나왔으니 혹시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클라이머를 위해 한 곳만 추천하자면, 도쿄의 마부(Maboo)를 말씀드리고 싶어요. 굉장히 오래된 암장이기도 하고 우리나라에는 없는 감성이 있거든요.
커다란 창고형 암장인데 들어가면 살짝 서늘해요. 그런데 가운데 가스난로가 하나 있어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운동도 하고, 가족 단위로 와서 놀기도 해요.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여서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을 거예요.
한국 암장도 한 곳만 꼽자면, 서울볼더스를 추천해요. 수도권 외에 많은 암장을 가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비교 대상은 한정적이지만, 수도권 내에서는 가장 좋은 퀄리티의 세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일했던 암장이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아직 서볼을 경험해보지 못한 클라이머라면 꼭 방문해보세요.
클라이밍을 가장 행복하게 즐기는 방법
여러 암장을 방문하며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자연 암벽에 올라 색다른 쾌감을 경험할 수도 있지만, ‘행복한 클라이밍’을 위해 가장 중요한 건 안전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낙법은 클라이밍 기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떻게 하면 클라이밍을 잘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꾸준히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다치면 꾸준히 할 수 없어요. 클라이밍을 잘하고 싶으신가요? 항상 안전에 유의하시고 낙법을 제대로 연습해보세요.
실제로 낙법 실력과 클라이밍 실력은 비례해요. 낙법을 잘하면 높은 곳에 올라가도 별로 무섭지 않거든요. 안전하게 떨어지는 법을 아니까요. 그러다 보면 동작도 대범하고 수월하게 나오죠. 낙법 실력 없이 클라이밍 실력만 쭉 오르는 사람은 결국 다쳐서 정체기를 맞게 돼요.
더불어서 클라이밍 실력을 키우기 위한 보조 운동도 한 가지만 추천해드릴게요. 데드리프트 동작을 익혀보세요. 클라이밍은 몸통에서 가장 먼 손끝과 발끝만으로 벽에 붙는 운동이잖아요? 그만큼 손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근육의 연결을 잘해야 해요. 데드리프트 역시 발끝으로 땅을 지지하고 손으로 바벨을 들어 올리는 운동이라 메커니즘이 비슷해요.
그리고 기본적으로 클라이밍은 당기는 운동이어서 몸의 뒷면을 많이 써요. 데드리프트도 마찬가지로 후면사슬을 발달시켜주는 운동이죠. 어느 하나라도 연결이 깨지면 다른 부분에서 부담을 져야 하므로, 특정 부위만 발달해서 잘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에요. 상체 힘만 좋으면 어느 순간 몸의 전체적인 연결성이 깨지고 하체를 잘 활용하지 못하면서 결국에는 한계에 부딪혀요.
클라이밍이란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물론 클라이밍의 진정한 재미는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죠. 요즘 도파민 중독이라고 표현하던데, 성취감을 느끼는 데 중독된 듯해요. 루트 파인딩을 하며 퀘스트를 하나씩 깨고 레벨을 올리고 더 잘하려고 수없이 노력하고… 한순간에 이뤄지는 것은 단 한 개도 없는데 끝없이 버티고 다시 도전하게 되죠.
클라이밍을 하면서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배운 것 같아요. 어려움 앞에서 버티는 힘도 기르고요. 문제가 생겼을 때 좌절하기보다 해결하려는 의지도 키울 수 있었어요. 앞으로 제가 어떤 사람이 되고 무슨 일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클라이밍에서 배운 삶의 태도가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요.
최근에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하며 코딩 수업을 듣고 있는데요. 개발할 때도 에러가 뜨고 잘 안 풀리기도 하지만 끈기 있게 붙잡고 하다 보면 언젠가 되더라고요. 클라이밍과 비슷한 성취감을 줘서 즐겁게 배우는 중이에요. 클라이밍에 관련된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데 언젠가 출시한다면 많은 관심 부탁드려요!
슬로우스타터 레터를 구독하고 싶다면?
지난 슬로우스타터 레터를 보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