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스레터 #61
항상 우리의 클라이밍 난제를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매드프로클라임(@madproclimb) 영상 속 ‘랜선 멘토’는 바로 김인경 선생님입니다. 지금까지 그를 콘텐츠 크리에이터 혹은 클라이밍 강사로만 알고 계셨나요? 사실 그는 더 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어요. 이전에는 스포츠클라이밍 선수로 활동했고요. 현재는 매드짐클라이밍센터 대표이자 스포츠클라이밍 1급 심판이에요. 더불어 대학교에서 스포츠클라이밍을 강의하며 후배들을 양성 중입니다. 슬스레터에 미처 다 쓰지 못한 경력이 더 많아요.
인터넷에 검색하면 다 나올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김인경 선생님을 직접 만나 나눈 이야기를 4가지 주제로 요약했습니다. 끝까지 집중해 주세요!
김인경 선생님은 20대 후반,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스포츠클라이밍 선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무언가를 다른 사람보다 늦게 시작할 때 두려움을 느끼죠. ‘덜컥 도전했다가 실패하면 이 나이에 어떡하지?’ 하고 지레 겁을 먹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졌다는 불안감은 도전을 가로막는 벽이 됩니다.
도전에 나이가 어디 있겠어요?
멋있어 보이려면 이렇게 이야기하겠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두렵죠. 도전에도 용기가 필요해요. 그런데 저는 일단 동기 부여가 되면, 속된 말로 눈이 돌면 용기가 솟아나는 성향이에요.
대학생 때 산악부를 했는데 히말라야에 갔다가 크레바스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딱 떠오르더라고요. 원래 회계학과를 졸업했는데 ‘체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였어요. (웃음) 크레바스에서 나와서 바로 체육학과에 다시 입학하고 석사까지 밀어붙였어요.
*크레바스: 빙하 표면에 생긴 깊은 균열 (표준국어대사전)
“크레바스에 빠져 15m나 떨어졌는데 운 좋게도 눈턱에 걸렸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이 점점 주저앉지 뭐예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설벽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빤빤한 얼음벽이 손에 잡힐 리 있겠어요. 손톱으로 계속 긁기만 했죠. 구조될 때까지 다섯 시간은 걸렸나 봐요. 한낮에 빠졌다가 한밤중에 빠져나왔으니까요. 크레바스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그대로 실신했어요. 탈진했던 거죠.”
- 월간산, 2010.06.06 인터뷰 중
처음부터 선수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교수를 하려고 했죠. 그런데 제 자일 파트너였던 친구가 설악산에서 후배들을 도와주던 중에 추락했어요. 친구의 죽음을 제가 목격하고, 직접 시신을 수습하고… 그 후 충격으로 1년 정도 집 밖에 못 나갔어요. 문밖에, 창문에 친구가 서 있는 듯해서 문을 열 수 없었죠. 나만 살아 있는 현실이 싫었어요.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친구가 생전에 하고 싶다고 했던 세 가지 일을 내가 대신 하자.
백두대간 종주,
흰산에 가기,
국가대표로 샤모니 월드컵 참가하기.
이 세 가지를 하기 위해 스물아홉에 스포츠클라이밍 대회에 나갔죠.
*흰산: 에베레스트, 히말라야 등을 일컫는 표현.
우리나라에서 3위 안에 들면 국제 대회에 나갈 수 있는 티켓이 생겨요. 정말 미친 듯이 해서 2위에 올랐죠. 그런데 갑자기 ‘30세 이상에게 국가대표 자격을 줄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긴다는 논란이 일었어요. 어린 선수에게 기회를 주라는 말이었죠. 당시 저는 서른 몇쯤이었는데, 논란이 지속되며 출전 기회를 놓쳤어요. 물론 이 규정은 많은 반대에 부딪혀 생기진 않았지만요. 결과적으로 백두대간 종주와 흰산은 친구 대신 할 수 있었지만 아직 샤모니 월드컵은 가지 못했어요.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도전했는데 갑자기 가로막힌다면 얼마나 허무할까요? 어쩌면 다시는 클라이밍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요. 김인경 선생님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었습니다. 원래 목표했던 교수가 되고자 공부했죠. 그 후 고려대, 경희대, 인천대 등 여러 대학에서 스포츠클라이밍을 강의했어요.
여성 선수들을 제가 특별히 가려 받지 않았어요. 그 친구들이 저를 찾아왔죠. 아마 ‘코드’가 맞아서 그런 듯해요. 소위 “까라면 까” 문화를 저는 싫어해요. 무조건 따르라는 강한 명령보다, 왜 해야 하는지 논리적인 설득이 좋아요. 스스로 납득하면 움직이는 성향이죠.
물론 모든 여성이 저와 같은 코드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계급이나 서열에 따른 확실한 명령이 오히려 편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죠. 다만 저랑 안 맞을 뿐.
그리고 저는 선수들과 대화를 무척 많이 해요. 부모님은 물론이고 주변인을 다 만나서 이야기 나눠요. 선수의 진로 고민, 성적, 학업 등 인생 상담을 다 해줄 수 있을 만큼요. 선수들도 같은 여자로서 제게 고민을 털어놓기 더 편했을 거예요.
그냥, 재밌잖아요. 무언가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해요. 궁금한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다가 모든 게 명확해졌을 때 “유레카!” 하는 쾌감을 느껴요.
클라이밍 코칭도 비슷해요. A라는 선수가 어깨 통증이 있다고 가정해 봐요. A에게 맞는 훈련법과 루틴을 연구해서 코칭했더니 어깨 통증이 사라지면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선수만 기쁜 게 아니라 저도 정말 기쁘죠. 어떤 호기심이 충족됐고 모든 퍼즐이 맞춰졌잖아요.
운 좋게도 제 주변에는 결혼하라고 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요. 가족들도 “능력 있으면 너 혼자 살아라”라고 말하곤 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다른 분들께 드릴 수 있는 조언은 많지 않아요.
다만, 이 말을 해주고 싶어요. 30대까지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반려동물도 생명이잖아요. 나의 삶을 충만하게 살고 싶어서 아이를 안 낳는다면 반려동물 또한 마찬가지예요. 동물은 아기의 대체제가 될 수 없어요. 대신 40대가 넘어 삶이 안정되고, 주변을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면 유기 동물을 데려다 키워도 좋겠죠.
그리고 가능하면 독립하지 마세요. 독립하면 돈 모으기는 어렵고, 다시 들어가기는 더 어려워요. (웃음)
첫째는, 좋은 이웃을 곁에 두거나 내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함께할 수 있는 친구를 만드세요. 둘째는, 루틴을 만드세요.
저는 늘 정해진 시간에 수업이 있기 때문에 저는 똑같은 시간에 (인터뷰 중인) 이 카페에 오거든요. 만약 제 차는 주차돼 있는데 카페에 제가 없으면 이웃들이 전화해 줘요.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확인해 주죠.
또 사람이 너무 집에 처박혀서 혼자 있으면 대화하는 방법을 잊어요. 짧은 스몰토크라도 사람과 대화를 나눠야 해요. 내 신체적 건강과 건강한 사회생활을 위해서라도 좋은 이웃과 루틴을 꼭 만드세요.
김인경 선생님의 코칭은 꼭 프로선수가 아니어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매드프로클라임 영상을 통해서 누구나 (심지어 클라이머가 아니어도) 알짜 클라이밍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데요. 유튜브에 올라오는 영상은 모두 김인경 선생님의 실제 강의예요. 동호인 대상으로 진행하는 강의에서 핵심만 쏙쏙 뽑아 짧게 정리한 편집본이 주요 콘텐츠입니다. 방구석에 앉아서도 클라이밍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다니 영광이 아닐 수 없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인의 지식도 돈이 되는 시대에 무료로 클라이밍 강의를 공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요.
2018년 무렵 여러모로 힘든 일이 있었어요. 당시 뇌가 정지되는 듯한 증상으로 응급실에 두 번이나 갈 정도였죠. 스트레스와 정신적 피로가 그만큼 쌓였던 듯해요. 두 번째 응급실에 간 날, 딱 이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 머리에 있는 것들이 다 사라질 수도 있겠네.’
제가 가진 노하우와 정보, 지식이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너무 아까웠어요. 어떻게든 남겨둬야겠다고 결심했죠.
우리나라는 아직도 클라이밍 정보와 노하우가 잘 공유되지 않아요. 지도자급 클라이머들이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줘야 새로 시작하는 분들이나 젊은 세대들이 뒤따라올 텐데…. 누군가는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런 작업을 하기에 이미 늦었으니 일단 올리자고 했죠. 그래서 영상이 정말 라이브에 가까운 수준이에요.
네, 한 분이 촬영부터 편집까지 해줘요. 제가 강의하다가 ‘이거 괜찮다’ 싶으면 촬영해 달라고 얘기하고 바로 핸드폰으로 촬영해요. 저는 평소처럼 강의하면 되는데 편집하는 우리 임 매니저가 고생하죠. 정말 고마워요.
아! 임 매니저가 슬스팀과 비슷해요. 클라이밍 한 지 약 3년 정도 됐고, 천천히 성장하고 있어요. 실제 강의는 더 어렵고 심오한 내용도 많은데요. 임 매니저가 이해하는 내용들만 편집해서 업로드해요.
아마 추후에 임 매니저가 더 많은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 심오한 이야기들도 콘텐츠로 나오지 않을까요?
영상을 올리는 목표가 구독자 수를 높이고,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임 매니저가 이해하는 내용 위주로 쉬엄쉬엄 올려도 괜찮아요. 저는 노하우와 정보를 나누기만 하면 어떤 것이든 좋아요.
사실 인터뷰를 진행한 날, 김인경 선생님은 클라이밍 국가대표 감독 공개 채용에 지원했어요. 지난달 말에 그 결과가 나왔는데요. 아쉽게도 고배를 마셨습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해요.
세 가지가 있어요. 먼저, 아직 스포츠클라이밍 분야에는 한 번도 국가대표 여성 감독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제가 최초의 여성 국대 감독이 되면 좋겠어요. 국가대표 감독이 돼서 샤모니 월드컵에 나가고 싶어요. 그 친구를 위한 도전은 아직도 진행 중인 셈이죠.
두 번째는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서 마당이 넓은 작은 집을 짓고 강아지와 함께 살고 싶어요. 혹은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고 싶기도 해요. 이를테면 국제 심판을 하면서요. 강아지와 세계를 돌기는 어려워서 지금은 못 하지만, 언젠가 그렇게 살아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죽고 난 후 조금이나마 재산이 남아있다면 청소년 및 유소년을 위한 대회를 열도록 지원하고 싶어요. 제 이름은 걸지 않고요.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청소년, 유소년 대회가 있었으면 해요. 이런 대회가 누군가에겐 목표가 되고,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는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도 있고요.
돌이켜보니 클라이밍을 33년 했더라고요. 옛날에 어깨가 한 번 끊어졌는데, 앞으로 클라이밍을 영영 못 할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이제 뭐 하고 살지?’ 싶더라고요. 삶의 의미가 없다고 느꼈어요. 그때 알았죠. 클라이밍을 진짜 진짜 좋아하는구나. 클라이밍은 제게 삶의 의미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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