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스레터 #40
여름이 막 시작됐을 무렵에 휴가 일정이 확정됐다. 마침 단팥 언니의 휴가 기간과도 맞아떨어져 그동안 얘기만 나누던 테마 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우리의 휴가 테마는 클라이밍과 콘텐츠! 부산에 있는 클라이밍장 중 아직 가보지 못한 곳도 경험하고, 로컬 클라이머 인터뷰도 하고, 알찬 콘텐츠도 만들어보자고 야심 차게 떠났다. 여기에 창원 당일치기 일정까지 넣었는데, 클라이밍 에세이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지』를 쓴 장참미 작가님이 운영하는 서점 '오누이 북앤샵'에 가기 위해서였다.
참미 님과의 인연은 슬스레터 인터뷰를 통해 시작됐다.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도전하는 마음을 안고 퇴사 후 서점을 꾸린 그. 좋아하는 책을 가까이하면서 클라이밍과 러닝에 도전하고 즐기는 경험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에세이들을 보며 '작가님이 하나하나 가꾼 서점에 안 가고는 도무지 못 배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침 창원에도 로컬 클라이밍 센터가 있다고? 책과 클라이밍, 이 조합 못 참지, 못 참아!
부산에서 창원으로 갈 때는 시외버스를 이용했다. 서부사상버스터미널에서 오가는 버스가 30분 간격으로 꽤 자주 있는 편이어서 자리도, 시간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우리가 여행한 기간에는 현장 예매만 가능했다. 슬스팀의 루트처럼 부산에서 창원으로 이동한다면 버스 예매 방법을 미리 확인해 보면 좋겠다.
오누이북앤샵은 창원 남산시외버스정류소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가면 나온다. 창원시청 근처가 시내인 듯했는데, 서점은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창원대학교 쪽에 있었다. 버스 창 너머로 동네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깨끗하고 넓은 차도와 잘 정리된 인도, 언뜻언뜻 보이는 창원천의 모습, 낮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데서 오는 어떠한 안락함. 이곳에 있는 서점은 어떤 느낌일까, 클라이머가 가꾼 서점은 어떨까. 다이내믹할까? 스태틱할까? 가는 내내 두근거렸다.
서점의 첫인상은 '밸런스'였다. 깔끔한 느낌의 흰색 건물에 귀여운 책 간판, 누구나 쉬어갈 수 있도록 자리한 초록색 벤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진하게 풍겨오는 나무 향기, 편안하게 앉을 수 있는 원목 의자와 테이블, 보는 것만으로도 차분해지는 원목 서가로 이뤄진 내부. 나도 모르게 절로 아, 하는 탄식을 뱉고 말았다. 마냥 고요하면 오히려 책에 집중할 수 없고 그렇다고 또 이런저런 것들을 두면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당황하고 만다. 하지만 이 서점은 기분 좋은 긴장감이 깃든 곳이었다. 균형이 잘 잡힌 공간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최선을 다해 무언가를 좋아한다면 이런 결과물이 나오는구나, 그 마음을 놓치지 않고 더욱 좋아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장소였다.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은 동네 서점이었다. 제발 사라지지 말아주세요!
참미 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동네 클라이밍장인 '핫클라이밍'으로 향했다. 서점에서 창원대 방향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참미 님이 인근 맛집이라고 소개해 준 밀면집과는 더더욱 가까웠다. (식당 후기는 잠시 뒤에 나옵니다!) 서점에서도 밀면집에서도 가까워 여러모로 이곳 사람들은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길을 오르면서 도저히 암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아파트 단지와 빌라가 다수 있어서 '이곳에 어떻게 클라이밍장이 있지?'라고 잠시 의아해했다. 그리고 센터 앞에 도착한 우리는 들어갈지 말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지하 1층인 암장 입구로 내려가는 계단이 엄청난 던전의 분위기를 자아냈던 것. 고오오- 하는 음산한 소리가 났던 것도 같다. 아니, 정말 들었다!
네이버 후기를 더 찾아보니 볼더링 위주보다는 지구력 위주인 듯했다. 게다가 함께 간 단팥 언니가 운동복을 두고 왔다는 것! 아, 어쩔 수 없다. 우리 다음에 또 오자! 우리 진짜 강해져서 오자! 하고 백 스텝으로 물러났다. (휴, 할렐루야!) 서울로 원정 오는 클라이머들이 어려운 문제도 쉽게 푸는 듯한 느낌이 든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점심쯤 창원에 도착한 터라 서점을 둘러보고 나니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참미 님에게 인근 맛집을 추천해달라 부탁했다. 여행 와서 뭘 먹었는지 꼼꼼히 묻던 그는 이내 "밀면!"을 외쳤다. 부산 밀면은 들어봤는데 창원 밀면은 처음이었다.
"온육수를 내어주시는데, 만두 주문해서 그 육수에 말아 먹으면 완전 만둣국이에요!"
망설이던 우리에게 쐐기를 박은 말이었다. 밀면에 만둣국까지 즐길 수 있는 방법이라니! 그동안 내가 쩝쩝박사라고 생각했는데, '학사' 정도에 불과했음을 깨달으며 고가밀면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고가 밀면'에 도착한 우리는 코다리 밀면과 만두 한 판을 주문했다. 사실 코다리는 학교 급식에서 자주 먹던 메뉴인데 먹을 때마다 질기고 이상하게 비린 맛이 나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이날은 무언가에 홀린 듯, 코다리 밀면 맛집이라는 참미 님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 나도 모르게 코다리 밀면을 주문하고 말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먼저 코다리조림을 한입!
오?! 고가밀면은 그동안 먹었던 코다리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이 싹 날아가게 할 정도였다. 이제 제 코다리조림 경험은 고가밀면을 맛보기 전과 후로 나누겠어요! 육수와 함께한 만두의 맛은 어땠냐고? 이상 말을 줄이겠다. 이 감동은 그저 직접 맛보는 수밖에 없다. 역시 로컬의 추천은 믿음직하다.
부른 배를 통통 두드리며 식당을 나왔다. 이제 후식을 맛볼까. 카페를 찾으려고 주위를 돌아보는데 눈길을 끈 곳이 있었다. 창원천을 바라보는 쪽으로 크게 통창이 난 2층 건물이었다. 일단 가볼까? 그런데 가까워질수록 눈에 더욱 들어오는 문구가 있었다.
'DOUGHNUT'
이쯤 되면 이 동네, 나를 위해 준비된 곳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참미 님이 서점 근처에 분위기도 좋고 도넛도 파는 카페가 있다고도 말했다. 그곳이 바로 '메리스도넛샵'이구나! 문을 열자마자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다양한 맛의 크림 도넛부터 시나몬롤, 사과파이까지. 각종 디저트가 진열돼 있었기 때문에. 죄다 맛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고 커피와 도넛 두 개를 주문했다. (배부르니 하나만 사서 둘이 나눠 먹자고 했던 단팥 언니는 어디로…) 그러고 자리를 잡으러 뒤를 돌아본 순간, 우리가 걸어온 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큼 커다란 창이 펼쳐졌다. 맛도 멋도 다 갖춘 카페였다.
점심과 후식 모두 알차게 즐겼으니, 이제 운동할 차례가 돌아왔다. 사실은 터미널로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가던 중 산책로를 만나 우연히 걷게 된 거였지만. 창원천변은 물도 깨끗해 보이고, 길이 참 잘 닦인 산책로였다. 흙길도 잘 다져있고 나무로 된 데크길도 울퉁불퉁한 곳이 없어 무척 걷기 편했다. 열심히 양팔을 휘두르며 운동하는 중년 남성과 한낮의 달리기를 즐기는 러너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참미 님의 말에 의하면, 창원의 러닝 크루들이 곧잘 달리곤 하는 코스라고. 참미 님의 최애 러닝 코스이기도. 이토록 좋아하는 것들이 넘쳐나다니. 아무래도 조만간 또 창원을 방문할 것 같다.
부산으로 향하는 시외버스 안에 몸을 실었다. 반나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창원이라는 도시에 단단히 빠져버린 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만큼 위안을 받은 여정이었다. 올해 초 본격적으로 소설을 배우고, 쓸 거라며 호기롭게 퇴사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불안해졌다. 왜 원하는 만큼 쓸 수 없지? 글 쓰는 걸 좋아한다면서 지금 내 모습은 어떻지? 생각한 만큼 성장하지 못했고, 원하는 결과물을 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급해졌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직접 두 눈으로 확인했다. 자기 생각과 신념을 따라 꾸준히 노력하며 각자의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을, 공간들을. 켜켜이 쌓이고 쌓여야 비로소 빛나는 것들을. 역시 좋아하는 마음엔 실패가 없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는 계속 좋아하고 노력할 것이다. 버스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창 뒤로 창원 풍경이 지나갔다. 나는 오래오래 이 풍경을 담아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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