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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서점 Mar 29. 2024

개화동, 서울이지만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개화동 산책

개화동은 제가 자란 방화동과 가깝지만 개화산을 개화초등학교 쪽이나 미타사 쪽으로 오를 때가 아니면 자주 갈 일이 없었습니다. 중학교 방송부 선배 집이 개화동에 있어서 삼겹살 구워 먹은 기억이나 방송부 1기 선배가 운영하시던 식당에서 회식할 때 빼고는요.  


개화산을 헤매면서 삐라를 줍던 기억도 있네요. 북한에서 넘어온 선전물을 주워 파출소에 가져가면 학용품으로 바꿔주었습니다. 너무 자주 가면 수고에 비해 받는 학용품이 적어서 하루는 삐라를 주으러 다니고, 또 하루는 가재를 잡으로 다니곤 했습니다. 


작년에는 연구자분들이 강서구 곳곳을 다니며 조사를 하셔서 더 많은 자료를 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강서구는 기초 자료도 없고 지역 근대사나 시민의 이야기를 들어 정리한 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 구술생애사를 진행하면 밖으로 들어난 적 없던 민중의 삶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합니다. 


어른들의 입으로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사실 확인도 어렵고 단면적이기 때문에 더 많은 자료를 모아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추측과 추정만으로 이유를 찾기는 어렵기에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박철 선생님의 작품은 얼마나 귀한지요. 작품 곳곳에서 지역 이야기를 접할 수 있습니다. 


작년에는 '문학공간 소리-채집'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박철 시인의 문학 작품에 나온 공간의 모습과 소리를 채집했습니다. 작품의 동기(모티브)가 된 공간이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당시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했습니다.

  

문학공간 소리-채집

https://www.dasibookshop.com/soundscrap 


상사동相思洞 (개화동 상사마을) 

소설 『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에서 묘사하듯이 서울이지만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상사동은 1963년 서울로 편입되었습니다.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고즈넉한 마을로 법정동으로는 개화동, 행정동으로는 방화2동에 속합니다. 상사동은 상시꼴, 상사꿀, 갯모랭이 등의 이름으로 불렸는데 행주대교 남단 나들목으로부터 개화로의 북쪽 지역에 걸쳐 발달했습니다. 옛날 어느 가난한 사람이 개화산 귀퉁이에 뽕나무로 집을 지었다고 해서 상사꿀이라 했는데 삼산곡(參山谷)이 변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한편 갯가 모퉁이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는데 굴포(屈漁)천의 배수로 허리쯤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강 하류는 인천만의 바닷물이 섞이므로 소금기가 있어서 강변이지만 갯가라고 했습니다.


개화동은 여전히 농사를 짓습니다. 너른 김포평야에 공항이 몸집을 넓히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여전히 농사를 짓는 분들이 있습니다. '경복궁 쌀'은 강서구 지역 논에서 재배한 서울시 쌀 브랜드입니다. 한강주조에서 만드는 '나루 생 막걸리'가 경복궁 쌀을 사용하고 있지요. 


최근 '로컬 크리에이터'라는 말이 횡행합니다. '지역특성(문화, 관광 등) 및 자원(공간, 생산품)을 기반으로 ICT 또는 혁신적인 비즈니스모델을 접목하여 지역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업가'라고 중소벤처기업부(2020)는 정의하고 있지만, 모종린 교수는 '골목상권과 같은 지역시장에서 지역자원, 문화, 커뮤니티를 연결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 소상공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전자는 단순히 상권을 만들거나 창업에 치중하여 지역과 이름만 다르고 똑같은 상품들을 양산하고 있고, 후자는 주목받는 로컬 상권이 '독립서점ㆍ베이커리ㆍ커피 전문점ㆍ게스트하우스 업종이 필수로 갖춰져 있다.'라고 말하여 하나의 공식처럼 이야기 하는 통에 문화콘텐츠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큰 고민없이 스스로를 '로컬 크리에이터'라고 부르는 단초를 마련하였습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지역에서 지역의 의미를 이어가며 상품을 만든 분들이 있었지만, 전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로컬 크리에이터 사업은 겉으로 화려해보이는 것에 눈길을 줍니다. 의미와 사업성을 함께 보는 것이 아니라 당장 가시적으로 보이는 사업성의 효율성을 따지다 보니, 컨설팅이 비슷하다보니 '특색, 특별, 창의' 같은 말은 홍보 기사에나 쓰이는 사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문화를 경제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사업들이 생기고 들어오면 해당 사업분야를 살리기 보다는 겉만 번지르르하고 나중에 보면 속 빈 강정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전국에 우후죽순 생겼던 청년몰이 그러했습니다. 청년몰은 사실 국가와 정책,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해괴한 착취에 가깝습니다. '지원해줄테니 장사할 기회를 잡아라!' 같지만 '손님 없는 곳에서 사업 끝날 때까지만 사고 치지 말고 있어라'였죠. '이렇게 하면 아름답겠지?'라는 오만하고 안일한 생각이 전국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문학공간 소리-채집' - 상사동 (개화동 상사마을)

박철 시인 소설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 낭독

https://youtu.be/dpWL0b-h3-Q?si=Vx4bfZsgAw-12nWp 


서울이라지만 벌판 건너 경기도보다 못한 시골이 상사동이었다. 어느 날이었던가. 나는 술좌석에서 직장 동료들에게 상사동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소리를지른 적이 있었다. 예상대로 손을 드는 이는 없었다. 10여 명이 넘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동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커녕 그런 동네가 당신의 만화가 아닌 서울에 실제 존재하냐는 표정들이었다. 아니면 지방의 어느 소도시에 있는 동네 이름이던가. 그러나 엄연히 상사동은 서울특별시에 있었으며 그것도 서울로 편입된 지가 35년이 넘는 동네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동네를 가보았다거나 들어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별로 치면 우주의 저 편, 끝자리 쯤에 놓여 있을 처지였다.  


박철 소설 『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 ‘흔들새’ 82쪽  



절판되어 중고책으로만 만날 수 있는 소설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실천문학사)』는 서울로 편입된 김포지역 주민의 정서를 만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지역에 무엇이 필요하고, 지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우선하지 않으면 이름뿐인 허울만 남습니다. 1963년 김포군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편입되고 1977년 강서구로 분구. 1988년 신월동, 신정동, 목동을 양천구로 분리시킨 후 지금의 모습이 된 강서구는 지나가는 동네였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내려 지나가거나, 차를 타고 지나는 곳. 이촌향도로 서울에 온 사람들이 자리잡던 곳, 비교적 저렴한 월세 탓에 잠깐 머물다 떠나는 곳.  


새말·내촌·신대·부석·상사. 5개 마을로 이루어진 개화동은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과 9호선 개화역,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등이 인접해 있고 자전거도로와 둘레길 등이 조성되는 등 변화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1종 전용주거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개발되지 않고 있습니다. 1979년 취락구조개선 사업 이후 주택, 상수도, 각종 설비 등의 노후화가 심화하였지만, 미흡한 주거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있습니다. 층고 2층 이하, 대지건물비율 50%, 용적률 100%, 근린생활시설 불가.  


서울이지만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모습을 지닌 이곳의 모습이 변한 이유를 박철 시인이 쓴 소설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소설 『평행선은 록스에서 만난다』에서는 ‘박정희 시절 마을을 온통 갈아엎었다는 얘기도 들었다. 마을은 강화로 가는 행길에 산자락을 등에 업고 놓였는데 박정희가 강화도에 오고 가며 보기 싫다고 단장을 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른바 새마을식 주택으로 멀리서 보면 무슨 수용소처럼 일제히 시퍼런 기와지붕을 한 양식 주택가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집 모양만 고스란히 바꾸어놓았지 지세 변경이나 개발은 전혀 되질 않고 옛 마을 그대로였다. 말하자면 주변에 다른 마을이 들어선다든가 주택가나 번화가가 생긴다든가 하는 발전이 없이 마을의 크기가 30년 전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번듯한 음식점이나 약국 하나 없었다.’라며 마을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1983년 개교한 공항고등학교가 마곡으로 옮기기 전에 사용하던 건물은 펜타곤 모양이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 씨가 펜타곤 모양으로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다'라는 말을 공항고 선생님께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손짓 한 번이면 지역의 겉모습이 바뀌고 시민의 삶이 영향 받는 건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민주화 이후 그 절차와 과정이 합의에 따라 진행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절차와 과정 안에 시민의 의견은 반영된다기 보다 반영되는 듯 보입니다. 그 이면을 들춰보면 각종 이권이 얽혀 있습니다.


그래도 개화동은 길이 넓어 걷기 좋고 건물이 높지 않아 하늘을 보며 사는 맛은 있겠다 싶습니다. 주민분들의 여러 고충이 있을 테지만 걸으며 느낀 건 공용주차장과 공용화장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살고 있는 주민분들의 고민은 더 많지 않을까요. 


제274회서울특별시의회(정례회) 본회의회의록

2017년 6월 15일(목)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71년 그린벨트로 지정되어 각 종 개발이 부재되고 1979년에는 취락지구 개선도 정부 정책에 의해 자기 토지 20%를 기부채납했으며 강제로 시행되는 과정에서 빚을 많이 진 분도 있고 심지어 주민 중에 자살자가 나올 정도로 그때 당시 어렵게 주택이 형성되었습니다. 


서울특별시의회 회의록

https://ms.smc.seoul.kr/record/pdfDownload.do?key=2b70f6c354cee36b147e51863e4e0bf9ab82ce04c40dfa4c88f066b72b0aee2bc49e83f762c06cca 


한국전쟁 당시 김포 공군기지(현 김포공항)에 머물러 있던 미군 조종사들은 계양산을 '마녀의 가슴(witch's tits)'이라고 불렀습니다. 비행을 위한 항해 랜드마크 산이 된 계양산은 그렇게 영문 모를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http://yocumusa.com/sweetrose/2017career.htm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pfbid0319WtBVt4SdpZjnqXy6N5sfxEufL7LNniXi61MkGqAKmwKRLHyB1WaCvFQWVeRSnWl&id=105975288752220  



하지만 현재 공유마당에 올라온 사진은 설명에 오류가 있는 듯합니다. 


설명에는 '1952년 10월 김포초등학교 아침조례_뒤에 보이는 산을 미군들은 마녀의 가슴이라 불렀다'라고 쓰여 있는데, 사진의 산은 계양산이 맞는 듯 보이지만 김포초등학교가 위치한 북변동과 계양산은 꽤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1. 계양산이 맞고, 김포초등학교가 아니다.
2. 계양산이 아니고, 김포초등학교이다.
3. 계양산이 맞고, 그 당시 김포초등학교가 그곳에 있었다.
4. 계양산이 맞고, 다른 학교이나 김포초등학교로 기록했다.


공유마당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153249&menuNo=200018  



계양산은 일제가 1945년 패망 후 한반도에서 내쫓기며 처분하지 못한 부동산과 동산 등을 일컫는 '적산' 중 하나였습니다. 부천군은 귀속재산으로 관리하던 계양산 일대를 이화학당에 불하(매매)했고, 이화학당이 다시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에게 팔았습니다. 이화학당(이화여자대학교) 이사장 김활란은 인천 출신 여성학자인 동시에 친일부역자였습니다. 김활란(창씨개명 아마기 카츠란(天城活蘭))은 해방 직후 미군정청에서 '한국 교육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당시 박정희 육군 소장과도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적산의 恨] (상) 계양산은 적산이었다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8760 


[적산의 恨] (상) 비극의 현대사 질곡의 명산…롯데家 유산 상속 한복판에

https://www.inche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8764 


제274회서울특별시의회(정례회) 본회의회의록을 보면 조선시대, 일제강점기 건물은 없고 대부분 콘크리트 건물이기에 보존가치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가려져있던 집들의 모습을 보면 당시 어떻게 집을 짓고 살았는지 이해할 근거가 되기는 하겠습니다. 개화동 건물을 보다 보면 시간이 날 때마다 변하기 전에 기록해놓고픈 욕심도 듭니다. 주민들의 바람처럼 언젠가는 고도제한이 풀리지 않을까요.



다시서점,

김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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