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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시서점 Mar 29. 2024

Prologue Film Script 작업기

DAY6  <The Book of Us>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새들의 날갯짓을 믿는다. 

공중에 적어둔 말들이 흩어지고 

우리, 바쁜 하루를 하늘에 놓아두고 살아갈지라도. 


빈 병에 꽃을 꽂아두는 일이나 

언젠가 보낼 편지지를 고르는 일이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빈손을 채울 당신의 손을 맞잡는 날에 

한 마리 새가 내 가슴을 향해 날아오리란 걸 안다. 


나는 더는 마음을 갈구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헤매지 않는다. 

의미는 찾는 것이라기보다 만드는 것이어서, 

의미를 만들다 보면 마음을 찾아서,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사랑을 믿는다.  



DAY6 <The Book of Us> Prologue Film

https://youtu.be/1zeJETChPFE
  


2019년 5월. 작업을 시작하면서 DAY6라는 밴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을 모두 보고, 커뮤니티에 팬들이 남긴 글과 댓글도 모조리 읽었다. DAY6는 해외팬들도 많았는데 팬들과의 소통을 무척 잘하는 밴드였다. 밴드와 팬이 하나의 우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더 The Book of Us와 Gravity를 이해하고 글을 쓰고 싶었다. 특히 앨범을 나타내는 단어 'Gravity'가 잘 담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무게, 위엄, 진지함, 행동이나 성격의 엄숙함, 중요성'을 의미하는 단어 Gravity는 지구가 물체를 끌어당기는 작용인 중력으로 인해 지상의 물체가 아래로 떨어지는 가속도를 과학적으로 표현하는 '중력'이라는 뜻으로 주로 쓰이지만, 프랑스어 gravité '진지함, 사려 깊음'에서 유래했다는 걸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표현하고 싶었다. 그리고 민폐를 끼치지 않고 싶다는 마음이 커서 작업을 하는 동안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횡단 

어디서 잃어버린 걸까. 내일이 익숙해진 이후로 오늘을 잃어가면서, 그래도 어제보단 괜찮았다고 다독이며 보낸 하루.  


채워가는 날 만큼 비워가는 날도 늘어나길 바라면서, 어깨에 떨어진 낙엽만큼 화분에 물을 주면서. 풋, 사과를 베어 물었다.  


어린 날 다짐이 모순으로 변하는 순간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자신을 용서하지 않던 사람들은 용서할 수 있었다. 


나무에 그늘이 맺히면 건너편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너고픈 기분으로, 초록 불을 기다린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날씨에 감정을 휘둘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쟨 좀 무던한 데가 있어.’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비바람처럼 불면, 창문을 닫고 태풍이 몰아치는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날처럼 고요해지려 했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아침 일찍 밖으로 나가 젖은 나뭇가지를 주워들고 더러워진 길을 청소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햇빛 쏟아지는 날에도 표정 한번 찡그리지 않고 그저 땀을 닦아내는 사람, 꽁꽁 얼어붙은 밤길에 입김 쏟으며 온기를 만드는 사람.  


아직도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지키면서도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그러면서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선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   




그런 날을 

세상에 존재하는 감정을 모두 느끼는 하루가 있다. 이런 게 사는 건가 싶은 날. 그런 날. 


모르던 감정들을 한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는 때도 있다. 나도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구나, 깨닫게 되는. 


하루가 오고 가고, 한 사람이 오고 가는 일은 어쩌면 내가 잘 살아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어제까지가 내가 잘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날들이었다면, 내일은 ‘잘 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되어야 할 텐데. 


오고 간 하루와 사람, 감정이 오늘의 나를 이뤘을 테니까. 나는 ‘또 변할 수 있다.’라고 되뇌면서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런 날을.   




데이식스 


모든 것이 좋은 날에도 저녁은 온다. 완벽한 하루. 즐거운 날이 지나면 달력에 어둠이 내린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거라고 생각했던 한낮의 뜨거움은 쉽게, 쉽게 식어버렸다.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오늘이 떠났다.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 사람과 사랑이 있는데도. 붙잡을 용기 없이 지쳐버린 새벽, 밤을 밝히던 불빛들도 하나둘 꺼져갔다. 


누구 하나 입을 떼지 못하는 순간, 당신과의 이별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멋쩍은 듯이, 우리의 슬픔을 위로하려는 듯이, 모두가 떠들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좋은 여섯째 날, 아침이 왔다.  


*창세기 1장 31절: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어떤 날, 어떤 마음이라도 


실망할 만큼 기대하지 않았다. 섣부른 마음이 일면 모래에 발을 숨기는 꿈을 꿨다. 하늘로 뿌리내리고 거꾸로 자라는 나무를 상상하면서,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세계에 살아간다고 다독이면서.  


‘이별만큼 사랑도 깊어서 밤하늘은 그렇게 어두운 걸 거야. 달과 별이 내는 빛은 모순을 긍정하는 거라고.’ 모래의 독백이 깊어질수록 마음도 넓어졌지만, 아무것도 심지 못한 채 걱정만 앞섰다. 


지난겨울 방치해 뒀던 화분에서 새싹이 올라왔다. 마른 흙 위로 물을 주면서 이제는, 기대만큼 실망하지는 말자고. 사랑만큼 이별도 깊 은 법이라고, 모래가 묻은 발등을 물로 씻어내었다.  


어떤 날, 어떤 마음이라도 깨끗하게 씻어 두 자고 다짐하면서. 언젠가 화분에 꽃이 피길 기대하면서. 꽃향기, 바람을 따라 떠돌다가 당신 코끝에 잠시 머물면, 그것만으로도 삶은 긍정할 이유가 있노라 하면서.   




알아도 모른 척  


꿈을 꾸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뜨면 곧바로 아침을 맞이합니다. 밤새워 뒤척이면서도 꿈을 꾸지 않는 이유는 혹시나 진실로 바라는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탓입니다. 지금은 헛된 희망일 뿐이지만,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한 톨의 꿈이라도 모아서 불확실함에 기대고 싶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만나지 못한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그 매몰찬 거절에 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계절을 모르고 피는 꽃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만개하려는 꽃을 지켜보면서 서툴게 살아온 나는 저만치 노력해 본 적이 있던가 떠올립니다. 알아도 모른 척 피어나고 싶을 뿐입니다.  




글 6편을 쓰고 나서야 가장 마지막에 쓴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으로 결정되었다. 나도 이 글이 가장 마음에 들긴 했다. DAY6와 팬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쓴 글이었기 때문에.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원안)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새들의 날갯짓을 믿는다. 공중에 적어둔 말들이 흩어지고 우리, 각자의 삶을 긍정하며 살아갈지라도. 


빈 병에 꽃을 꽂아두는 일이나 부치지 않을 편지를 적는 일이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빈손을 가득 채울 또 다른 빈손과 가슴을 가르던 찌릿한 새 한 마리가 언젠가 다시 날아올 것을 안다. 


나는 더는 마음을 갈구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헤매지 않는다. 의미는 찾는 것이라기보다 만드는 것이어서, 의미를 만들다 보면 마음을 찾아서,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사랑을 믿는다.   




피드백을 거쳐 수정한 글이 통과되었다. 이후 Prologue Film이 공개되고 팬들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나도 좋았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서 〈The Book of Us : Gravity〉 앨범을 구매하고 공연을 가기도 했다.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새들의 날갯짓을 믿는다. 공중에 적어둔 말들이 흩어지고 우리, 바쁜 하루를 하늘에 놓아두고 살아갈지라도. 


빈 병에 꽃을 꽂아두는 일이나 언젠가 보낼 편지지를 고르는 일이 의미 없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빈손을 채울 당신의 손을 맞잡는 날에 한 마리 새가 내 가슴을 향해 날아오리란 걸 안다. 


나는 더는 마음을 갈구하지 않고 의미를 찾으려 헤매지 않는다. 의미는 찾는 것이라기보다 만드는 것이어서, 의미를 만들다 보면 마음을 찾아서,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사랑을 믿는다.   


이 글은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사랑을 믿는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가장 먼저 썼다. 팬들이 팔을 흔들며 응원하는 모습을 떠올리면서. 팬들이 응원하는 목소리가 공중에 퍼지고, 흔드는 팔이 만드는 바람이 빈 공간을 채우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The gravitational force is weak. In fact, it's damned weak. but not negligible.
중력은 약하다. 괘씸할 정도로 지독하게 약하다.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다. 

James Gleick, "Genius –The Life and Science of Richard Feyman", (Abacus 1992) p.352 



물리학자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본인의 강의 중에 중력에 대해 한 말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약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체감하지 못하기도 하고 가장 보편적이지만 우주 전체에 영향을 주는 힘. 서로를 향해 끌어당기는 힘. 


의미를 찾지 않고 함께 만들어 가는 팬들이 의미를 만들면서 마음을 찾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빈손에 가득 채워질 DAY6와의 만남과 시간이 한 마리 새처럼 팬들과 밴드 맴버들에게 날아가길 기도하면서. 


그리고 '바람은 허공을 채우려는 새들의 날갯짓을 믿는다'라는 마지막 문장을 만난 뒤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날아가는 새를 바라볼 때마다 함께한 순간을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는 존재가 되기를.



다시서점,

김경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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