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사람부터 챙긴다
회사는 경계와 제한이 차고 넘친다. 누가 책임질까를 놓고 따져야 하기 때문에 일은 쪼개지고 기능은 분절된다. 쪼갠 일과 분절된 기능을 시스템으로 연결하려 해 보지만, 깨진 도자기를 테이프로 붙인 것처럼 볼썽사납고, 위태롭다.
시스템에는 사람과 같은 마음이 없다. 매뉴얼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에서 만들어진 복잡 미묘한 감정을 잡아내지 못한다. 내가 나로 살지 못해 생긴 고랑을 도무지 알아채지 못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이심전심이니 염화미소는 런타임 오류에 걸리기 십상이다. 칼같이 따지고 샅샅이 훑지만, 정작 인간적인 것은 하나도 얻어내지 못한다. 그 속에서 우린 반쯤은 기계로 산다.
『데미안』을 읽어내면서 회사생활에 지친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소환했다.
어디 있니? 괜찮은 거지? 아직, 거기 있는 거지?
내 안의 데미안과 이야기하기 위해 나는 단 하나만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살기 위해서 내면에서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 말고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
데미안의 충고대로, 다른 사람과 자기 자신을 비교하는 일을 멈췄다. 박쥐로 태어났다면 타조가 되려고 애쓰지 않았다. “각자를 위한 진정한 천직이란 자기 자신에 도달하는 단 한 가지뿐이다.”라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내가 지금 미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이는 건 어쩌면 내 안에 있는 데미안을 만나기 위한 때가 가까워졌다는 신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것에 집중하니 삶의 에너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큰일이 생길 때마다, 속 사람부터 챙겼다. 속 사람은 연봉이나 직급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개성을 온전하게 가꾸고 지켜 내는 일이라고 했다. 나만의 고유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부여받은 사명이었다. 그 일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이다. 그 일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길은 불안하지만, 아름답고 자유롭다.
그 길에는 아무도 없다. 오직 단 사람, 속 사람과 동행할 뿐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죽음의 비릿한 냄새 때문에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이러다 나만 왕따 되는 거 아닌가, 낙오자 되는 거 아닌가, 불안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데미안』의 에바 부인은 이렇게 되묻는다.
“돌이켜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그러나 역시 아름답지는 않았는가?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도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나는 나로서밖에 살 수 없다. 내 삶을 내가 버린다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스스로 버린 삶을 누가 거두겠는가. 다들 자기 삶도 무거워 휘청거리고 있는 판국에.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나는 나의 꿈을 꿔야 한다. 그렇다고 그 꿈만을 고집한다면, 개꿈에 단단히 걸려든 꼴이다. 그 무엇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멈추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꿈을 발견해야 하는 거예요. 발견하고 나면 길은 한층 쉬워지지요. 하지만 영원히 계속되는 꿈이란 없어요. 또다시 새로운 꿈이 나타나지요. 어떤 꿈에도 집착해서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