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태어났는가 2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by life barista

나는 세상에 던져져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어려운 책이란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일단 책이 두껍다. 독일어 번역체라 잘 안 읽힌다. 심지어 미완성이란다. 하이데거가 죽었으니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이 발간된 이후 철학과 예술에 미친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뭔가 있긴 있는 거다. 그게 뭘까? 그리고 바틀비와는 어떻게 연결될까? 이 두 권의 책은 태어난 이유를 묻는 나에게 어떤 문장을 줄까? 나는 이런 질문을 골자로 강사에게 SOS 이메일을 보냈다. 인사말과 건투를 빈다는 사족을 빼면, 강사의 핵심 메시지는 간단했다.


1. 『존재와 시간』에 나오는 개념 중 2~3개만 뽑는다.

2. 그 개념들을 자기 말로 정리해 본다.

3. 『필경사 바틀비』의 등장인물에 이 개념들을 대입해 본다.


내가 뽑은 첫 번째 개념어는 ‘던져져 있음’(Geworfenheit, Thrownness)이다. 던져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지도, 선택하지도 않은 세계 속에 놓여있단 뜻이다. 어릴 적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바닥에 던졌던 공깃돌처럼 말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 보니 시대와 국가, 부모와 가족들이 결정돼 있었다. ‘던져져 있음’은 이런 우연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 건지, 계속 살긴 할 건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나는 이 말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이 세상에 등 떠밀려 왔다.

누가 밀었어?

뒤돌아봤더니 아무도 없다.


이렇게 보니, 바틀비가 얼핏 보였다. 바틀비는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복사기가 없던 1800년대 중반 미국 뉴욕에 '던져진' 인간이다. 그래서인지 그가 반복적으로 했던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이 다르게 읽혔다. 이 말은 바틀비가 원치 않았던 자기 삶에 대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에둘러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아가 이 말은 ‘이 소심한 거부가 나의 선택입니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바틀비는 단 한 번도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망설이면서도 공손하게, 그가 처한 세상과 자신이 원하는 세상에 대한 거리감을 보여준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은 삶의 방식과 조건을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모든 인간의 소박한 저항이 아닐까.


그렇다면 던져진 존재로서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나는 어떤 저항을 해 왔을까? 어쩌면 나도 던져진 학교생활이나 직장생활, 혹은 인간관계 속에서 바틀비처럼 마음속으로 이건 내가 원한 게 아니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물끄러미 창을 보면서,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돌리면서, 속으로 작은 불평을 삼키면서, 때로는 애써 무관심한 척하면서. 그런 작은 순간들이 어쩌면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나만의 조용한 저항은 아니었을까.


나는 나를 문제 삼는다


내가 뽑은 두 번째 개념은 '현존재(Dasein)'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독일어로 Da-sein이다. 여기서 'Da'는 '거기(here)' 또는 '그곳(there)'이라는 어떤 장소를 말한다. 그곳은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던져진 곳이기도 하다. 'sein'은 '있음(being)'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현존재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곳에 혼자 서 있는 인간이,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묻는 상황을 압축한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존재의 의미를 궁금해하는 걸까? 그냥 던져진 거라면, 특별한 이유나 의미 따윈 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 존재의 의미 같은 건, 앞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고 조기 교육하면 안 될까? 하이데거가 인간을 굳이 현존재로 부른 이유를 알 듯하다. 아무리 말려도, 인간은 내가 여기 있는 의미를 본능적으로 캐묻는다. 존재 의미에 대한 궁금증은 그렇게 하라고 배워서 하는 게 아니다.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궁금한 것이다. 그야말로 본능이다.


내가 이해한 『존재와 시간』은 존재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궁금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마냥 살지 않는다. 인간은 어떤 가능성으로 산다. 인생이란 그 가능성을 채울 선택의 시간이다. 선택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존재 의미다.


던져져 있음은 인간의 상황을 깨닫게 하는 출발점이었다. 여기서 현존재는 그 상황에서 자기 가능성을 묻는 인간을 뜻한다. 인간은 원하지도 않았고, 예측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나에 대해 질문하고 대답을 선택한다. 이제야 나는 현존재를 나름 정리할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나를 문제 삼는다.

이 문제를 풀면서,

나는 어떤 가능성으로 살아간다.


바틀비는 어둡고 꽉 막힌 벽을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에게 벽은 단순히 시야를 가로막는 물리적 장애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벽 앞에서, 아무 이유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 자신을 온몸으로 실감했는지도 모른다. 벽은 그에게 의미 없는 현실의 표면이자, 동시에 자기 가능성과 선택을 조용히 되묻는 침묵의 입이었는지도 모른다.


변호사는 막힌 벽을 바라보는 바틀비의 모습에서 유령과 시체를 보았다. 그는 바틀비를 비정상적이고 비극적인 존재로 단정 짓는다. 상식과 관습 속에서 바틀비를 해석하면 그렇다. 그러나 나는 하이데거를 통해 벽 앞에서 자기 존재와 마주한 한 인간의 불안과 결단을 보았다. 또한 침묵 속에 가라앉은 하나의 고유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은 세상의 획일적인 틀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현존재의 저항이다. 바틀비는 지금 여기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존재하려는 고유한 가능성을 상징한다.


내가 처음 소설을 읽었을 때 형성되었던 변호사와의 정서적 유대감은 서서히 깨져나갔다. 마르틴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라는 개념이 변호사와 나를 갈라놓았다. 이제 바틀비가 반복했던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은, 번아웃(burnout)된 피곤한 노동자의 자포자기가 아니다. 바틀비의 말은 세상에 대한 그만의 고유한 응답이다. 그의 침묵과 거부는 주어진 삶에서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소박하게나마 책임지려고 했던 현존재의 결단이다. 이 점에서 바틀비는 유령이나 시체가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가능성을 실현하려 했던 현존재이다.


결국 바틀비가 필사를 하지 않기로 선언한 이유도 이제 알 것 같다. 필사는 오직 타인의 정신과 말만을 베껴내는 일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신과 말을 조용히 동여매야만 한다. 그에게 필경사라는 직업은 늘 그가 마주하던 막힌 벽과 같았다. 자기 가능성을 타진하려는 인간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침묵에서 벗어나 기계적으로 반복했던 일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한심하게만 보였던 바틀비의 소극적인 말과 침묵이, 이제는 한 인간의 응축된 운명처럼 보인다.


문득, 나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학교, 도서관, 고시원, 사무실 등 수많은 벽을 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했을까? 나는 나에게 어떤 가능성을 주었을까? 그 가능성을 위해 나는 어떤 결단을 했을까?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금 부끄러웠다.



죽음을 향한 존재


『존재와 시간』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주목한 개념은 인간이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죽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간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바둥바둥 산다. 우리가 속한 가정, 회사, 사회, 국가는 죽음을 밀어내고, 오직 생존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조직돼 있다. 나는 그 조직과 하나가 되어 바쁘게 움직인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을 언제나 남의 일로 치부하며 외면한다. 적어도 죽음은 나의 일이 아니어야 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에 빠져 그저 그렇게 사는 삶을 ‘세인’(das Mann)이라고 부른다. 세인은 나다운 삶을 묻는 찰나, 어김없이 다가와 익숙한 길로 나를 끌고 간다. 세인은 외모, 연봉, 아파트 등을 기준으로 나를 밤톨처럼 깎는다. 세인은 편안하고 예상할 수 있는 삶을 최고의 삶이라고 말한다. 이 정도면 나의 삶도 괜찮은 삶이라고, 좀 더 노력하면 더 좋은 삶을 살 것이라며 끊임없이 빈말을 쏟아낸다. 세인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삶을 방해하는 일상 그 자체이다.


세인의 이런 빈말들은, 우리가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가장 본질적인 사실을 잊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과 마주해야 자기 시간이 짧다는 걸 비로소 깨닫는다. 일상적인 잡담과 사소한 호기심에 정신이 팔린 우리에게 죽음은 삶의 이유와 의미를 묻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삶의 의미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발등의 불이 된다.

하이데거는 말했다. 죽음은 세인의 것이 아니라, 오직 나 자신의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 대신 죽을 수 없듯이,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죽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렇게 되묻는다. 죽음이 그렇게 철저히 나의 것이라면, 삶 역시 철저하게 나의 것 아닌가! 살아 있는 매 순간, 나는 언제나 나 자신으로 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 사실을 일상에서 너무 자주 잊고 있었을 뿐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란, 이젠 고유한 나에게로 돌아가라는 유턴 신호다. 나는 키보드를 두드렸다.


나는 나로서 죽는다.

고로, 나는 나로서 살아있다.



윤리적 관성


하이데거의 통찰은 『필경사 바틀비』를 새롭게 읽게 만들었다. 그의 철학은 바틀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소설 속 변호사와 동료들은 세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늘 그래왔듯 살아간다. 그들에게 삶은 선택이 아니라 관성이다. 그들에게 상식과 관행은 질문거리가 아니라, 그대로 베껴 써야 할 정답이다. 따라서 그들은 바틀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바틀비는 이상하고 불편한 존재일 뿐이다.


나 역시 그랬다. 나는 지금껏 쌓아 올린 규범과 준수 의무로 바틀비를 읽었다. 그래서 침묵과 거절에 담긴 그의 고유한 삶을 보지 못했다. 이제 나는 묻는다. 혹시 바틀비는 자기 죽음 앞에 스스로를 세웠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는 필사적으로 나다운 삶을 지키려고 했던 건 아닐까?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말은 자기 삶을 지키는 가장 고요하고 평화로운 선언 아닐까.


바틀비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죽음을 선택한다. 여기서 나는 강사가 염려했던 실수를 범했다.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바틀비! 너는 너무 우울해. 우울한 건 나쁜 거야.


자살은...... 제일 나쁜 선택이야!


강사의 염려는 추신 형태로 남아 있다.


(추신)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기다운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누구도 대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건 오직 그 사람 자신의 몫입니다. 때론 극단적인 선택마저도 우리는 그의 선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군가의 삶에 섣불리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됩니다.


강사는 죽음마저 사회적 쓸모를 따져 평가하는 윤리적 관성을 경계했다. 바틀비는 죽음 앞에서도 자기 것이 아닌 삶을 거부했다. 그는 생명을 거는 가장 치열한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인간은 결국 죽는 존재일 뿐이야. 삶은 결국 허무한 거야.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바틀비는 스스로 자신의 존재 방식을 결정했다. 그의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가장 뾰족한 자기표현이다. 바틀비는 묻는다. 진정으로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 맞다, 그의 선택은 삶의 허무함을 말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모든 순간이 우리 자신의 선택과 책임 아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그의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질문, 즉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바틀비만의 대답이 아닐까. 이제야 비로소 보인다. ’왜 태어났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이렇게 묻고 있던 것이다.


이미 태어나,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두 번째 문장


나는 한탄스럽게 자주 묻곤 했다. ”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을까?“ 그런데 이 질문은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태어나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왜 태어났는가'라는 질문은 사실상 출발이 아니다. 실상 여기에는 진짜 질문이 숨어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미 태어난 나에게 왜 태어났냐고 되묻는 이유는 결국 하나다.


지금 삶에 만족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바틀비는 죽더라도 나답게 살고자 펄럭인 침묵의 깃발이다. 그는 죽지 못해 사는 삶에 대한 거부를 침묵으로 선언했다. 비록 그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세계와 자신의 어긋남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세상은 어딘가 분명히 부조리하다. 나답게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묘한 거짓말과 은근한 강압이 일상으로 위장해 입을 막고 있다. 바틀비는 그런 세계와의 불협화음을 끝내 죽음으로 연주했다.


아마 바틀비도 처음부터 이런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하진 못했을 것이다. 숱한 세월, 직업이라는 명목으로 자기 삶을 떼어다 팔면서, 세계와 자기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어떤 벽을 조금씩 느꼈을 것이다. 그 벽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 벽은 분명히 있었다. 어쩌면 바틀비는 배달 불능 우편물을 소각하면서 그 벽의 실체를 제대로 깨달았을지 모른다. 끝내 수취인에게 도달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태워지는 우편물 속에서 그는 자신의 마지막을 본 건 아니었을까. 자기 삶 역시 결국, 배달되지 못할 약속이요, 전해지지 못할 사랑이며, 끝내 용서받지 못한 어떤 이름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도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기보다, 세인처럼 세상이 정한 방식에 숨어 살아간다. 때론 자신조차 어떤 모습이 진짜 나인지 헷갈린 채 살아간다. 사회적 역할과 의무감이 촘촘하고 깊을수록 더욱 그렇다. 나 역시 이런 세상을 악착같이 견디고 있다. 그 보상으로 얻은 익숙하고 편안한 삶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럼에도 내 마음 어딘가에는 바틀비가 살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라는 작은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죽음은 오롯이 나의 죽음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이 삶도 고스란히 나만의 삶이다! 내 삶에 책임져야 하는 사람은 과연 누구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다.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나는 자기답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두 번째 문장을 얻었다.

내가 태어난 이유는 내 삶에 선택이 끝난 뒤에야 알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나답게 살자.

그것은 내 방식대로 세상과 사이좋게 어긋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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