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글쓰기 수업 두 번째 시간. 책을 두 권이나 읽고 끙끙대며 글까지 썼더니 한 달이 후다닥 지나갔다. 시간 잘 보내기는 일단 성공한 셈이다. 은퇴 후 이 많은 시간을 어떻게 다 감당하나 막막했는데, 글쓰기 수업을 따라가기만 한다면 적어도 9개월은 쉬이 보낼 수 있겠다. 혹시 또 누가 알겠는가. 9개월 후에 자기답게 사는 법을 알았다면서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될지. 그땐 하고 싶은 일도, 만나도 싶은 사람도 많아져 어쩌면 바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안녕하세요! 한 달 동안 잘 지내셨나요? 보내주신 글들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공통된 피드백은 이겁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일어나는 감정을 체크하라!”
‘감정을 체크하라고? 어떻게?’ 질문하려다가 다른 사람이 하겠지 싶어 그만뒀다. 다른 사람 눈치도 그동안 내가 섬기던 신 중 하나다. 그렇다면, 그 신도 죽은 거 아닌가! 그래도 누군가 죽었는데 느낌표는 도리가 아니다. 나는 조신하게 손을 들어 질문했고, 강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기감정에 이름을 붙여서 종이에 적는 겁니다. 되도록 좋다, 나쁘다는 쓰지 않고요. 꼼꼼한 이름을 붙이는 게 더 효과적입니다. 예컨대 ‘나쁘다’ 대신에 ‘넌더리가 난다, 떨떠름하다, 꼴불견이다, 깔아뭉개고 싶다.’처럼요. 제가 또 하나 잘 쓰는 방법은, 욕지거리를 막 쓰는 겁니다. 나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목격한 기분이 듭니다.”
강사가 크게 웃었다. 다들 따라 웃었다. 맞다. 욕만큼 내 감정을 잘 드러내는 말도 없긴 하다. 강사가 말을 잇는다.
“욕을 막 쓰고, 그 위에 빨간색 볼펜으로 이름을 붙입니다. 분노, 거부, 혐오, 무시, 잘난 척, 소외 등등요. 그러면 제 감정을 눈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방법이다. 나도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봐야겠다. 그러면 좀 더 탱글탱글한 글이 되지 않을까.
감정에 이름을 붙일 기회는 당장 찾아왔다.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두 번째 질문은 ‘나는 왜 태어났는가?’입니다.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이유,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입니다.”
질문을 받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광활한 우주에 혼자 떠 있는 막연함, 얼이 빠져나간 듯한 멍청함, 고구마 백 개를 한꺼번에 넘긴 목 막힘. 갈피 잡을 수 없는 감정 끝에 이어진 장면에서 나는 엄마 뱃속에서 꿈틀대는 태아를 봤다. 아기는 웃음과 울음 사이에서 애매하게 입을 삐죽거린다. 이어 생일날 친구들이 불러주었던 생일 축하 노래가 들려왔다.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요 꼴로 살건 데 왜 태어났니~.”
나는 왜 태어났을까. 누군가는 나란 존재는 필연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부모님의 번식 본능이 만든 우연한 존재라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런 우연을 필연처럼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일까? 이번 글쓰기도 만만치 않겠다.
강사는 허먼 멜빌이 쓴 소설 『필경사 바틀비』와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추천하면서, 이번 글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나는 허먼 멜빌이란 이름을 읽고 기겁했다. 그가 쓴 『모비 딕』을 읽었던 기억 때문이다. 『모비 딕』은 길어도 너무 긴 장편소설이다. 내가 가슴을 쓸어내린 건 『필경사 바틀비』가 단편 소설이라는 걸 확인하고 나서다. 번역본으로 채 70페이지가 되지 않는 분량이다. 얇다는 것만으로도 난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필경사란 생소한 직업에 관심이 갔다. 필경사는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 손으로 문서를 똑같이 베껴 쓰던 사람을 말한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필경사의 몸값도 올라간다. 근대, 중세, 고대로 갈수록 문맹률이 가파르게 올라가기 때문이다. 고대 왕의 명령을 받아 적은 공문이나 중세 수도원의 성경 구절에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신성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신성한 힘은 필경사의 글씨에 예술적 아우라까지 더해 준다. 그 때문에 필경사는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특별한 신분을 보장받았다.
요즘에야 복사기나 프린터가 흔하니까 똑같은 서류, 즉 사본을 만드는 게 일도 아니지만, 이런 기계가 없던 시절에 필경사는 그야말로 고된 작업이었다. 생각해 보라! 필경사는 재미라곤 전혀 없는 무미건조하고 시시콜콜한 공문이나 경전을 기계처럼 똑같이 써야 한다. 옛날엔 펜에 잉크를 묻혀 썼으니 조금만 부주의해도 잉크가 떨어져 종이가 더러워졌을 것이다. 만약 그 문서가 왕의 명령서라면? 깨끗한 종이에 처음부터 다시 써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필사본은 원본과 100% 일치해야만 한다. 단 한 글자만 틀려도 문서의 신뢰성은 떨어지는 법. 만약 자기 키보다 더 큰 두루마기 원본에서 마지막 몇 글자를 남겨두고 실수했다면? 확 혀를 깨물고 싶진 않았을까.
필경사는 다른 사람의 말은 고스란히 허용하되, 나의 말은 완전히 차단해야 한다. 필경사는 다른 사람의 정신은 오롯이 드러내되, 나의 정신은 철저히 감춰야 한다. 나를 차단하고 은폐하기 위해, 필경사는 완전히 집중시켜야 한다. 이처럼 필경사는 완전한 다른 사람의 도구로 살아간다.
『필경사 바틀비』는 19세기 중반 미국 뉴욕의 한 변호사의 이야기다. 그는 바틀비라는 사람을 자신의 필경사로 채용했다. 변호사는 다른 필경사에 대해선 성격과 업무 스타일까지 속속들이 알지만, 바틀비에 대해선 절대 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바틀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바틀비에 대해 쓴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그러면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과연 나는 바틀비에 대해 알 수 있을까?
일이 많아진 변호사는 바틀비를 필경사로 고용했다. 바틀비는 필사하는 내내 말이 없었고, 창백했고, 기계적이었다. 필경사의 직업 특성상 이런 바틀비의 성격은 오히려 유리하다. 성격 덕분인지 바틀비는 일을 잘했다. 하지만 바틀비에겐 치명적인 결점이 있다. 원본과의 면밀한 대조가 필사본의 운명이건만, 그는 자신이 필사한 문서를 재검토하지 않는다. 사실 검토 작업만 하지 않는 게 아니다. 바틀비는 사용자인 변호사의 그 어떤 업무 지시나 부탁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변호사가 뭔가를 시킬 때마다 바틀비는 마치 유령처럼 이렇게 대꾸할 뿐이다.
“저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I would prefer not to)
변호사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바틀비에 대한 변호사의 끝없는 고난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틀비는 그렇게 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말로 사회적 기대를 모두 거부한다. 편안한 삶을 최고의 삶으로 여기는 변호사가 이런 사람을 고용했으니, 그가 느꼈을 불편함, 당황스러움, 분노는 엄청났다. 그런데 바틀비의 거부는 일하기 싫다는 월급쟁이의 단순한 투정이 아니다. 그는 삶 자체에 의욕이 전혀 없다. 그의 일상이 이를 잘 말해 준다.
절대로 먼저 말하지 않고 대답만 합니다 … 절대로 뭔가를 읽는 경우가 없습니다 … 심지어 신문조차 읽지 않습니다 … 막다른 벽돌 벽을 하염없이 내다보곤 합니다 … 식당 같은 곳을 가는 법이 없습니다 … 홍차나 커피 같은 것도 마시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 제가 알 만한 어떤 곳으로 찾아가는 일도 없습니다 … 산책을 나가지도 않습니다 …자신이 누군지, 어디 출신이지, 일가친척이라도 있는지에 대해서도 대답을 거부해 왔습니다 … 그렇게 깡마르고 창백하면서도 어디가 아프다고 하소연한 적이 없습니다.
이제 변호사에게 바틀비는 수수께끼가 된다. 그는 바틀비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 바틀비가 저런 기괴한 행동을 하는 데에는 분명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는 자기 눈에 비친 바틀비를 설명하고, 상상하고, 가정해서 그 원인을 추론해 본다. 결국 그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의 결론은 안전하고 착하다. 바틀비는 부도덕한 인물이 아니다, 바틀비는 안식일을 어기는 사람이 아니다, 바틀비는 치료할 수 없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따라서 바틀비는 자신이 돌봐야 할 불쌍한 존재이다!
“뭐든 좋으니 자네 자신에 관해 말해 주겠나?”
“전 그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는 무슨 합당한 이유라도 있나?”
제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바틀비 군은 저를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변호사는 굴욕감과 분노를 넘어 두려움마저 느낀다. 바틀비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직원들의 말투까지 바꿔놨다. 모두 바틀비로부터 악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다. 바틀비는 미친놈이다. 우리까지 미칠지도 모른다. 당장 해고해야 한다. 하지만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다시 한번 인심을 베푼다. 해고할 때 하더라도 나중에 더 좋을 때 하자. 임금도 지금보다 올려주자. 그러나 바틀비는 한술 더 뜬다. 자기는 이제 본업인 필사마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이상 안 합니다.”
“그럼, 이유가 뭐지?”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
무심한 말투였습니다.
이제 바틀비는 막 나간다. 필사도 안 하면서, 사무실에는 계속 있겠단다. 사람 좋은 변호사는 바틀비에게 애매한 연민과 책임감을 느낀다. 심지어 바틀비를 쫓아내는 대신 자신이 사무실을 옮긴다. 급기야 오고 갈 곳 없는 바틀비에게 자기 집에서 지낼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바틀비도 만만치 않다. 그는 변호사의 호의를 거부하고, 거부하고, 또 거부한다.
결국 누군가 바틀비를 신고하고, 그는 감옥에 갇힌다. 바틀비가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한 후, 변호사는 과거에 바틀비가 우체국에서 ‘배달 불명 우편물’ 담당자였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변호사는 배달 불능 우편물이라는 힌트를 듣고 바틀비라는 수수께끼를 다음처럼 풀어낸다.
배달 불능 우편물이라니! 죽은 편지들이란 말 아닙니까! 죽은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선천적으로 그리고 불행한 일들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기질을 갖게 된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끊임없이 죽은 편지들을 처리하고, 또 소각하기 위해 정리해야 하는 일보다 더 그런 기질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또 있을까요? 해마다 몇 수레씩 헤아려야 할 만큼 엄청난 수의 죽은 편지들이 소각되니까요. 가끔 창백한 얼굴의 직원이 접힌 종이에서 반지를 끄집어내는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반지를 껴야 할 손가락은, 아마도 무덤에서 썩고 있었겠지요. 긴급하게 자선을 베풀기 위해 보낸 은행권일 때도 있었겠지요. 그 도움을 받기로 된 사람은 더 이상 먹지도 굶지도 못하게 되었을 것이고요. 절망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을 위한 사면령, 희망없이 죽어 간 사람들을 위한 희망, 재난에서 구제받지 못한 채 생명의 숨결이 꺼져 버린 사람들을 위한 희소식, 모두 생명을 전하러 나섰다가 이른 죽음을 맞이한 편지들입니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소설 내내 변호사는 바틀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러나 정작 내가 알아낸 건 변호사에 대한 것 뿐이다. 안전 추구형 인간인 변호사는 바틀비를 고용한 후 복잡한 감정 변화를 겪는다. 처음에는 바틀비의 효율성에 만족하고 그의 업무 거부에도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찾아 관대하게 넘어간다. 그러나 바틀비의 이해할 수 없는 거부와 무반응이 계속되자, 변호사는 당혹감과 혼란, 그리고 좌절과 분노를 느낀다. 그러면서도 그는 바틀비를 매정하게 내치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바틀비를 면회하는 등 인간적인 연민과 책임감도 보여준다. 바틀비의 죽음 후에는 깊은 회한과 동정을 느끼며 인간 존재의 비극성에 탄식하기도 한다.
우울, 허무, 의기소침, 무기력, 권태, 분노, 짜증, 연민, 동정 등등. 소설을 읽으면서 체크한 나의 감정들이다. 나 역시 바틀비가 불편했다. ‘이 사람 미쳤군. 도대체 왜 이래? 저런 건 당장 잘라야 해!’ 갑질에 막말까지 했다. 내 감정은 변호사의 감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변호사를 이해했고, 그와 한통속이 되었다. 그랬다. 나는 이 변호사를 새롭게 안 게 아니다. 그저 변호사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 확인했을 뿐이다.
문제는, 정작 바틀비에 대해선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변호사와 같은 편인 내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이제 더 이상 필사를 하지 않겠다는 바틀비에게 변호사가 그 이유를 묻자, 바틀비가 무심하게 던진 대답이 자꾸 맴돈다.
이유가 바로 보이지 않나 보군요
바틀비는 더 이상 필사를 하지 않는 이유를 변호사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 대답한다. 다시 말해, 자신이 더 이상 필사를 할 수 없는 이유가 너무나 명백해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는 것이다. 바틀비에겐 너무나 당연해 말할 필요조차 없는 이유. 아쉽게도 그건 내게도 보이지 않았다. 나도 변호사처럼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어쩌면 작가는 진짜 바틀비를 감추고 일부러 독자를 따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변호사처럼 사는 당신은 바틀비를 이해할 수 없다고, 그가 거부하는 이유를 왜 볼 수 없냐고,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도 아직 그걸 모르겠냐고. 이렇게 생각하니 이 묘한 따돌림과 조롱에는 뭔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바틀비는 나에게도 수수께끼가 되었다. 강사가 이 소설과 함께 추천한 『존재와 시간』에 이 수수께끼를 풀 힌트가 혹시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