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결국 나는 자기 글쓰기에 실패하고 마는 걸까. 어떤 목사님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나의 질문에 신학 용어를 섞어 길게 대답했는데, 대충 이런 논리였다. 너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창조주를 닮는다, 따라서 창조주를 알면 너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그의 결론은 창조주를 알기 위해 성경을 열심히 읽으라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시키면 뭐든 해내는 청년이었다. 몇 년 뒤, 나는 핵심 교리가 담긴 어지간한 성경 구절은 모두 외웠다. 그런데 웬걸! 세월이 갈수록 나는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아수라 백작에 가까워졌다.
신에게서 나를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이제 강사의 두 번째 추천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기대본다. 이 책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 중 하나가 ‘신은 죽었다’이다. 그렇다면 죽은 신을 대신해 니체가 뭐라도 하나 던져주지 않을까. 강사는 이 책을 읽을 때에는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에 매달리지 말고, 마치 연극이나 뮤지컬을 보듯 넓게 읽으라고 당부했다. 책 자체가 워낙 두껍기도 하거니와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 보면 길을 잃고 만다는 것이다.
내 경우, 강사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밑줄도 치고 색깔도 칠하면서 멋진 단어에 집착했다. 여백엔 나름의 해석까지 빼곡하게 적었다. 하루가 지나자, 남은 페이지가 얼마나 되는지 자주 확인했다. 이틀이 지나자, 이걸 언제 다 읽고 글은 또 언제 쓰냐고 한탄했다. 책을 추천한 강사에 대한 원망은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 그의 당부 말씀이 환청처럼 들렸다. 아차차!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메모지를 붙인 페이지를 다시 폈다. 눈을 크게 떴다. 페이지마다 알록달록한 동그라미들이 단어를 휘감고 있었다. 그중 여러 번 등장하는 단어 두 개를 종이에 적었다. ‘신’ 그리고 ‘초인’이었다.
선택된 ‘신’ 뒤에는 죽음이 자주 따라왔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죽었다고 여러 번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신이 죽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한 말이지만, 신이 살아있을 때 했던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되겠지. 그럼, 신은 살아있을 때 어떤 일을 했을까?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른 신의 일은 뭔가 만드는 거다. 신은 창조한다. 하늘, 땅, 시간, 공간, 동물, 식물, 인간 그리고 나까지. 창조하는 신이 살아있는 한, 나는 만들어진 존재로 살아야만 한다.
두 번째로 떠오른 신의 업무는 심판이다. 신의 말씀대로 살면 천국에 가지만, 신의 말씀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 어떤 신은 죽은 사람의 생전 행동을 평가한 후 개, 돼지, 나무 등 다른 존재로 만들어 다시 세상에 보낸다. 신의 말씀을 잘 지켰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건 신의 고유 권한이다. 신의 판단에 따라 어떤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고, 어떤 사람은 영원히 고통받고, 어떤 사람은 다시 태어나니 그야말로 신은 궁극의 심판자다.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신의 소일거리는 모든 인간사에 간섭하는 것이다. 신은 모든 걸 알고, 모든 걸 할 수 있다. 신은 자신의 전지전능함으로 인간이 태어나기 전부터 뭔가를 예정한다. 인간이 태어난 후에는 삶의 중요한 갈림길마다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 개입한다. 인간이 죽어도 그의 간섭은 끝나지 않는다. 성경에 보면 신은 죽은 사람들의 기도를 듣거나 그들의 소식을 후손에게 전달한다.
창조하고 심판하고 간섭하던 신이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피조물로서 했던 질문을 그만두어야 한다. 스스로 태어난 것처럼 내 삶에 생기를 불어 넣으면서 힘차게 살아야 한다. 신이 죽으면, 내가 죽은 후 어떤 심판을 받을지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내가 나를 판단해야 한다. 나의 지식, 나의 능력 그리고 나의 양심을 선악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신이 죽으면, 신이 내게 했던 예정, 개입, 간섭도 모두 멈추게 된다. 비록 나는 전지전능하지는 않지만, 삶의 중요한 선택을 스스로 내려야 한다.
신이 죽으면, 나는 내 삶의 창조자, 내 삶의 심판자, 내 삶의 책임자가 된다. 신이 죽으면 내 삶에 대한 나의 책임이 백배, 천배 늘어난다. 그 좋아하던 남 탓도 못한다. 나는 자율적으로 살면서, 삶 자체를 긍정해야 한다. 삶이 복잡해지고 무거워질 수도 있다. 만성 피곤과 두통이 심해질 수도 있다. 요컨대, 신의 죽음은 그동안 현실에 안주하면서 누려왔던 작은 행복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나는 차라투스트라와는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신이 죽지 않길 바란다. 신이여, 만수무강하소서!
이래서 고전인가? 하필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말종 인간(der letzte Mensch)의 특징에 대해 말하는 부분을 펼쳤다. 말종 인간은 행복을 찾아냈다고 떠들어 댄다. 방금 내가 했던 바로 그 짓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나만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차라투스트라의 연설을 듣던 군중이 고함과 환호성을 질러대는 장면이 이어졌다.
“아, 차라투스트라여, 우리에게 그 말종 인간을 달라. 우리를 그 말종 인간으로 만들어달라! 그러면 그대에게 초인을 선사하겠다!”
사람들은 자신을 말종 인간으로 만들어주면, 차라투스트라를 초인으로 인정하겠단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당신이 초인 아니면 누구겠냐는 말이다. 딱 내 모습이다. 이런 사람이 니체에겐 말종 인간이다. 내가 말종 인간이 되길 원하고 있었다니, 매우 실망스러웠다. 나는 책을 잠시 미뤄놓고 눈을 감았다. 지하 인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겁쟁이요, 노예다.”
은둔 생활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온 예언자 차라투스트라. 나도 그를 따라 지상으로 올라가고 싶다. 최소한 나 자신을 겁쟁이 노예로 부르긴 싫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가 바로 자기 자신과의 관계라고 남들에겐 잘도 떠벌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에게 겁쟁이 노예, 말종 인간이라는 낙인을 찍을 순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 자기에 대한 글을 쓰는 데 가장 필요한 덕목이 용기 아닌가! 말종 인간이 되길 바라는 겁쟁이 노예는 용기의 화살이 꽂혀야 할 표적일 뿐이다. 이대로 글쓰기 수업을 망친 순 없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따라가 본다. 그는 ‘초인’을 가르치겠다고 선언한다.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려 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무엇이다.
그대들은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초인은 독일어 위버멘쉬(Übermensch)를 번역한 것이다. 위버(Über)는 무엇을 뛰어넘는다는 뜻이고 멘쉬(mensch)는 인간이니까, 위버멘쉬를 글자 그대로 풀면 인간을 뛰어넘는 존재쯤 된다. 그래서 요즘에는 초인 대신 극복인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책에 초인과 함께 극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다리는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기 위한 수단이다. 인간의 위대함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있다니, 당황스러웠다. 칸트는 모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접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니체는 칸트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갈팡질팡한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초인이 등장하기를 바란다.
초인의 등장은 신의 죽음과 관련돼 있다. 신은 나를 창조자가 아닌 피조물로, 심판자가 아닌 죄인으로, 주인이 아닌 노예로 만든다. 그 신이 죽었다. 이제 내가 창조자, 심판자, 주인의 자리에 앉거나, 다른 어떤 것에게 그 자리를 맡겨야 할 상황이다. 신 대신 돈을 그 자리에 앉혀보자. 돈이 나를 새롭게 만들고, 돈이 나를 심판하고, 돈이 나를 부리는 삶을 살 것인가? 이건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혀보자. 다른 사람의 요구에 따라 나를 꾸미고, 그 사람이 나를 평가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 사람이 나에게 명령하기를 기다리는 삶? 이것 역시 아니다. 전혀 아니다!
나의 자아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니체가 초인을 다리로 표현한 이유를 알겠다. 여기서 다리는 수단이 아니라 과정이었다. 과정은 멈추지 않고 떠나는 상태다. 초인은 안주하고 싶은 현실에서 떠나는 사람이다. 초인은 남을 탓하거나 부러워하는 자리에서 떠난다. 초인은 왠지 모를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여기에 붙잡혀 있지 않고, 저기로 떠난다. 초인은 사소한 행복을 지키기 위해 참고 견디는 삶에서 떠난다. 초인은 존재의 의미를 길 위에서 만든다. 초인은 계속 떠나면서 계속 새로운 것을 만든다. 초인은 자유다.
나는 인간들에게 그들의 존재 의미를 가르치려고 한다.
존재의 의미는 초인이다.
나는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가진 자를 사랑한다.
우리는 모두 나 자신이 누구인지 묻지만, 그 물음 앞에서 깔끔하게 답하는 사람은 드물다. 지하 인간처럼 우리도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일단 숨고, 속이며, 때로는 자기도 몰라보는 낯선 존재로 산다. 자의식이 촘촘하고 깊을수록 혼란은 더하다. 그 혼란과 고통을 악착같이 참고 견뎌 드디어 이겨냈다. 말종 인간이라도 좋으니 이 한 몸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도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그러나 니체는 말한다. 신이 죽었다고. 이제 그대가 직접 삶을 만들고, 검토하고, 실천하라고. 지금 그대는 신이 부여한 삶의 짐을 낙타처럼 짊어지고 사막을 건너고 있다고. 이제 사자가 되어 자유를 쟁취하라고. 용기 있게 떠나는 삶을 원하라고. 순진무구한 아이처럼 끝난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삶 자체를 긍정하라고!
니체는 나에게 초인이 되어야만 한다고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초인을 그대로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초인이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대신 니체는 나에게 초인이 되길 원하느냐고 묻는다. 내가 원하는 초인은 나를 넘어서는 나만의 초인이다. 아무나 흉내 내는 보편 인간은 니체의 망치에 의해 부서져야 할 망상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의 기질, 사주팔자, MBTI를 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나로서 살아가는 방식, 나를 넘어서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나는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첫 문장을 썼다.
신은 내가 지금 여기서 나답게 사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힘이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이제 나는 지하 생활에 만족하는 말종 인간을 원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용감하게 떠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