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1

도스토옙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

by life barista

1부 자기 발견과 이해


인간은 자기 존재의 근거에 대해 질문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 하이데거






1. 나는 누구인가


알아야 쓴다.


“잘 아는 걸 쓰세요!”


첫 수업이라 그럴 거다. 글쓰기 수업 강사의 목소리가 힘차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모르는 걸 쓸 순 없으니, 글쓰기는 결국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강사의 말에서 불편을 느낀 이유는 간단하다. 고백하건대, 나는 내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잘 모른다. 따라서 무엇을 ‘잘’ 아는지는 더더욱 잘 모른다. 모르는 건 불편하다.


“내가 제일 잘 아는 게 뭘까요? 나 자신 아닐까요! 그래서 선택했습니다. 글쓰기 첫 번째 질문은.”

노련하다. 여기서 호흡을 조절한다.


“나는 누구인가? 입니다!”


이쯤 되면 자신감이 아니라, 오만이다. 하긴 강사는 우리를 이쪽으로 유도해야만 한다. 수업 이름이 ‘자기 발견과 돌봄을 위한 글쓰기’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급작스럽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질문 아닌가. 뭔가 쓰긴 써야 하겠기에 머리를 쥐어짰다. 역시 알아야 쓰는 법. 미리 읽어오라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자기 자신을 말하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숨기지 말라.


나는 잠시 멈칫했다. 과연 나는 나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나에 대해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내가 나를 그대로 쓴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내가 나를 쓴다고 했을 때, 문장의 주어인 ‘나’가 진짜 나일까, 아니면 목적어 자리에 있는 내가 진짜 나일까? 실상 이런 문법은 말장난일 뿐이고, 진짜 나하곤 전혀 상관없는 건 아닐까?

설치 미술 작품을 본 적이 있다. 좌우에 있는 거울 가운데 사람이 서도록 한 작품이었다. 그러면 좌우 거울에 그 사람의 반사체가 무한히 생겨난다. 나도 거울 사이에 서 봤다. 무수히 많은 나를 보면서 이게 모두 나일까 물었던 기억이 난다. 혹시 나는 진짜 나를 안 보고, 수많은 반사체 중 하나를 붙잡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할수록 혼란스럽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나에 대한 글쓰기의 몇 가지 특징을 적어보았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쓴다는 건 반성문을 쓰는 것과는 다르다. 반성문은 나보다 힘센 누군가의 통과 처분을 받기 위한 글이다. 그 사람에게 맞추기만 하면 되니, 어쩌면 반성문이 더 쉽다. 하지만 내가 나에 대해 쓸 땐, 이미 자기 검열이 시작된다. 자기 검열은 통과하기도 어렵지만, 통과하더라도 만족스러운 글이 되긴 어렵다. 자괴감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자기 글쓰기는 과거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일도 아니다. 뉴스의 자료 화면처럼 사건을 있는 그대로 쓰는 건, 사실 불가능하다. 인간인 이상 자기 해석 없는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썼다는 건, 자신만의 개성을 다른 사람들 눈에 맞춰 편집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런 글은 쓰레기이다. 아무도 천천히 음미하지 않는다. 악취를 참고 한참 뒤져도 재활용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싱싱한 글은 지금 나를 살리는 글이다. 쓰면서 재미있고, 고치면서 뭉클한 글이 자기에 대한 좋은 글이다.


결국 강사와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청은, 자기 검열이나 남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당부이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새롭게 선언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자기 글쓰기는 용기의 문제다. 용기는 자기 발견의 글을 쓰고, 비겁함은 자기 은폐의 글을 쓴다.



레이첼 코리


강사는 뉴스 링크를 하나 보냈다.


2003년 3월 16일 오후, 스물세 살 평화운동가 레이첼 코리. 그녀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라파 지역에서 이스라엘군 불도저에 치여 숨졌다. 사건은 이스라엘군이 장갑 불도저 두 대를 팔레스타인 민간인 집에 보내면서 발생했다. 불도저의 무게는 62톤. 불도저는 형광색 안전 조끼와 다른 국제 활동가들의 경고 그리고 레이첼의 비명까지 무시하고 계속 전진했다. 결국 불도저는 그녀를 덮쳤다. 레이첼은 긴급 후송되었으나, 병원 도착 직후 사망했다.


이스라엘군은 “운전자가 그녀를 보지 못했다”는 짧은 입장만 밝혔다. 반면 레이첼이 소속된 국제연대운동은 불도저 운전자가 고의적으로 사람을 향해 돌진했다고 주장했다. 레이첼 코리는 사망 당시 대학생이었다. 그녀는 평화와 인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보호하려던 그녀의 비폭력 저항 운동은 불도저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나는 머리를 싸매고 책상에 엎드렸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인간은 죽으면 싹 다 끝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레이첼은 이렇게 무모한 선택을 했을까? 그녀도 나와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을까?


나는 누구인가?


그녀는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했을까? 그녀의 선택은 자기 규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전혀 다른 인물,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지하 인간’을 떠올렸다.


아픈 사람


레이첼 코리처럼 딱 부러지게 자신의 신념대로 사는 사람은 드물다. 현실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따위를 전혀 묻지 않거나, 나처럼 자기 발견과 자기 은폐 가운데에서 흐리멍덩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그런 작자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지하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쓴 글이다. 소설은 1부와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현재 이야기이고, 2부는 이 작자가 스물네 살 때 벌어진 과거 사건을 회상하는 이야기이다. 1부에 드러난 그의 신상은 대체로 이렇다. 그는 작년에 하급 관리직을 은퇴한 마흔 살 남자로, 가족 없이 늙은 하인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변두리에 살고 있다.


가장 중요한 건, 그가 20년째 지하에 틀어박혀 살고 있단 점이다. 지하 인간은 자기에 대한 글을 광기에 사로잡혀 휘갈긴다. 글에는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을 오락가락하는 지하 생활의 히스테리가 잘 드러나 있다. 따라서 정상인이라면, 공감하기 어렵다.


나는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인간이다, 나는 벌레조차 될 수 없다, 나는 괜스레 참새들이나 놀래는 주제에 그걸 자기 위안거리로 삼은 인간이다, 나는 ‘모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가장 잘 의식할 수 있는 상태에서 볼썽사나운 짓거리를 하는 인간이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표독스러운 위안이나 하며 나 자신을 약 올린다, 나는 나 자신이 역겹다, 나는 겁쟁이이자 노예이다, 나는 방탕하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추잡한 파리다, 나는 누구에게 권력을 행사하고 횡포를 부리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위인이다.


왜 소설이 “나는 아픈 인간이다.”로 시작하는지 알 수 있다. ‘아프다’는 말만큼 이런 정신 상태를 잘 표현하는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픈 사람의 고백은 측은하게 들리기 마련인데, 이 작자의 말은 쇠꼬챙이로 시멘트벽을 긁는 소리가 난다. 읽다 보면 짜증도 나고 화도 난다. 그 짜증과 화가 읽는 내내 계속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반전이 일어났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멋대로 굴고, 가끔 내 자신을 비하하기도 하는데......’


미친 사람의 글에서 공감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던 속마음을 지하 인간이 대신하고 있단 생각이 든다. 이제 나는 웃는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당신도 다시 한번 읽어보시라. 누가 알겠는가? 당신도 지하 인간일지.


그는 자신이 아픈 이유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기 자신을 계속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가 보기에 19세기 근대 인간은 무엇이든 과잉 의식하는 인간이다. 인간의 의식이 1인칭이란 점을 감안하면, 근대 인간의 과잉 의식은 곧 자의식 과잉이기도 하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자의식은 축복이 아니라 병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파헤치고 분석하지만, 그 과정은 어떤 치유나 깨달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과잉된 자의식은 주변 사람들을 모두 집어삼키다가, 결국 자기 삶마저 먹어 치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만나지, 오직 자기 이익과 체면만 알뜰히 챙긴 그 끝은 지하의 어두움이다. 지하는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않는 자기 모순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간 내면을 상징한다.


소설의 1부는 이성, 합리성, 자기 통제를 마냥 믿는 인간에 대한 비아냥으로 가득하다. 근대 인간은 ‘2×2=4’와 같은 법칙적 결정론에 의지해 장밋빛 미래를 계산한다. 그러나 지하 인간이 보기에 인간은 이따금 고통을 끔찍하게 좋아하는 비합리적 존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의 선택과 행동은 계산할 수 없다. 인간에게 딱 부러진 계산값을 주는 2×2=4도 훌륭하지만, 이런 세상에는 안일과 권태만 가득하지 않겠는가. 인간에겐 2×2=5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결정적 사건


지하 인간에게 지상으로 올라갈 기회가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2부는 지하 인간을 세상 밖으로 탈출시켜 줄 수도 있었을 어떤 사건 이야기다. 당시 그는 스물넷 젊은 공무원이었지만, 주변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따돌림당했다. 이 때문에 그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말이 복수지, 그가 혼자 계획하고 뒤집고 후회하고 다시 계획하는 망상의 연속이다. 지하 인간은, 어떤 군인이 잘 지나가도록 자신이 먼저 길을 터준 것에 대해 대단한 모멸감을 느낀다. 그는 밤낮으로 복수를 계획한다.


마침내 그는 자칭 천재적인 복수 방법을 고안해 낸다. 1단계, 작전이 티 나지 않게 우연히 그 군인과 길에서 마주친 것처럼 꾸민다. 2단계, 이번에는 먼저 길을 비켜주지 않고 버틴다. 3단계, 무례하다 싶지 않을 타이밍에 맞춰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간다. 결국 그는 복수에 성공한다. 그러나 복수의 환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흘 뒤 싹 사라진다. 복수는 그를 지하에서 구원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은 자신이 역겨워하는 동창들 사이에 억지로 끼면서 벌어진다. 그는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 채, 참가비까지 빌려 가며 굴욕적으로 한 동창의 송별회에 낀다. 모임에서 그는 때론 웃고, 때론 침묵하고, 때론 어슬렁거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애쓰지만, 아무도 그를 의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무시하면서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 지하 인간은 이들에게 복수를 결심한다. 진눈깨비를 맞아가며, 동창 무리가 몰려간 ‘거기’까지 끝내 따라간다.


거기서 그는 성매매 여성인 리자를 만난다. 그는 리자에게 인생의 허무와 도덕을 설교하고, 놀리듯 위선적인 동정을 베푼다. 그는 리자에게 집 주소까지 건낸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과 함께. 다음 날부터 그는 리자가 진짜 자신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안절부절못한다. 이런 불안에 더해 하인과의 신경전까지 겹쳐 그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가장 더러운 순간에 리자가 초인종을 누른다.


리자를 본 그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하고 악랄하고 잔인한 말을 퍼붓는다. 지하 인간은 한 참 후에야 깨닫는다. 리자는 완전히 짓밟히고 가련한 존재였다. 그러나 그녀는 가장 불행한 누군가를 제일 먼저 이해했고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들은 정열과 환희에 차서 두 번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지하 인간은 그녀에게 화대를 찔러 준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거부한 것이다. 리자는 그의 후회에 찬 목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자기 목격담


나는 소설에서 나 자신을 두 번 목격했다. 첫 번째는 리자가 지하 인간의 일장 설교를 잠자코 들은 후 내뱉은 말에서였다.


“당신은 왠지……꼭 책을 따라 하는 것 같아요.”


지하 인간은 생생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 이유를 리자는 꿰뚫어 봤다. 이런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자기 생각처럼 남들에게 떠벌리는 것이다. 책에 박힌 검게 죽은 글자를 천연색 삶에 욱여넣는 것이다. 소설 속 지하 인간은 낭만주의, 문학적이라는 말로 지하 생활을 덧칠해 왔다. 지하 인간은 말만 번드르르한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자기 무력감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가장 먼저 자신이 알고, 그다음엔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안다. 무기력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설령 사랑을 받더라도 자기 무력감을 감출 거짓을 섞게 된다. 거짓말을 계속 믿고 사랑할 순 없는 법이다. 결국, 거짓의 껍데기를 고집하는 사람은 자신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랑마저 잃는다. 그는 스스로 고립된다. 지하 인간이 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내가 아는 것을 미사일처럼 쏴댔다. 잘난 척하는데 바빠, 정작 내 앞에서 진심을 말하는 사람을 놓치곤 했다. 대인 관계도 두 가지로 정리됐다. 내가 잘난 척하는 게 먹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먹히면 더 큰 거짓말을 했고, 들키면 불같이 화를 냈다. 거짓과 복수가 쌓이더니 안 그래도 큰 얼굴에 석고 마스크까지 들어붙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가 인생 최대 관심사였다. 혹시 내게 찾아와 마음을 털어놨던 사람도, 리자가 지하 인간에게 했던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았을까.


두 번째 내 모습은 아래 문장에서 발견했다.


심지어 우리가 인간이라는 것조차, 자신만의 진짜 육체와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이것이 너무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나머지, 지금까지는 존재한 적도 없는 무슨 보편 인간이 되려고 안달복달한다.


보편 인간! 내가 만난 두 번째 나다. 고유한 몸과 생각을 가진 내가 아니라, 누가 언제 만든 것인지도 모를 잘난 사람들의 조건에 맞는 인간. 억대 연봉, 외제 자동차, 강남 아파트, 힘 있는 자격증 등등. 매번 바뀌는 그 조건에 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나는 안달복달했다. 나는 내가 유일무이한 특이점을 가진 인간이라는 걸 부담스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도스토엡스키는 소설 주인공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 덕분에 나는 이 주인공이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나처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면서 사는 모든 사람의 대표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나는 내 이름을 주인공에게 줘버렸다.


도스토옙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는 인간 정신을 해부한 기록이다. 소설에서 인간 정신은 자기 기만과 자기 인식이 끊임없이 충돌한다. 그러나 인간 정신은 끝까지 자기 자신을 놓지 못하면서도 결국 자신을 이해하는 데는 실패한다. 인간 정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에 비례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타인의 시선에 갇힌 자의식은 자기 이름을 가질 수 없다. 그에게 어울리는 이름은 보편 인간이다.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자의식에게 허락된 이름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보편 인간이라니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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