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 2

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

by life barista

나였던 것을 밀어내기


스마트폰이 울린다. 새 메일이 들어왔다. 강사가 보낸 『공포의 권력』에 관한 글이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 들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너무 답답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공포의 권력』을 펼쳤다. 하얀 건 종이, 까만 건 글씨. 누군가 했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책을 읽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독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강사는 『공포의 권력』을 이렇게 설명했다.


아이 낳는 장면을 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첫 아이를 수중 분만으로 낳을 때, 아내 곁에서 그 과정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출산은 온통 피였습니다. 아내의 옷은 피로 흠뻑 젖었고, 아이는 핏물 속에서 건져 올려졌습니다. 맑았던 물은 양수와 피로 점점 탁해지고 끈적해졌습니다. 축축하게 뭉개진 태반과 끊어진 탯줄도 제 눈에 또렷이 보였습니다. 피, 양수, 땀, 배설물까지 섞인 냄새는 역겨울 정도로 비렸습니다. 아이를 감싸던 흰 막은 출산의 여러 분비물과 함께 아기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습니다. 아내의 입술은 죽은 사람처럼 바짝 마르고 창백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정말 아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출산은 아기와 엄마가 분리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이에게는 단순한 신체적 독립을 넘어, 정신의 독립을 뜻하는 사건입니다. 심리학에선 이러한 과정을 주체화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기는 엄마와 하나였던 흔적들을 그대로 지닌 채 세상에 나옵니다. 탯줄, 태반, 양수, 피와 같은 어머니의 흔적은 방금까지 나를 기르고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이젠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제 나의 독립을 방해하는 장애물일 뿐입니다. 내가 나로 태어나기 위해서 나는 그것들을 반드시 밀어내야 합니다. 이처럼 '나'와 '나 아님' 사이에 있으면서 주체성을 위협하는 것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트’(abject)라 불렀습니다.


아브젝트는 단순히 버려야 할 쓰레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외부에서 온 무엇이 아니라, 한때 나의 일부였고 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피, 상한 음식, 시체, 토사물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나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들이 바로 크리스테바가 말하는 전형적인 아브젝트입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는 육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녀는 육식으로 생겨난 불쾌한 그 무엇을 자신 안에서 강렬하게 느낍니다. 아브젝트는 이처럼 나를 마구 흔들고 위협하지만, 동시에 나를 만든 뿌리이기도 합니다.


어떤 고함이, 울부짖음이 겹겹이 뭉쳐져, 거기 박혀 있어. 고기 때문이야.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들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틀림없어.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아브젝트는 한때 나의 일부였기에, 이를 밀어내는 과정은 살점을 떼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이 따릅니다. 아기가 태어나며 엄마와 물리적으로 분리되는 순간이 그렇죠. 만약 아기가 계속 엄마 뱃속에 머무른다면 '나'는 결코 탄생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아브젝트는 고통스럽지만, 내가 되기 위한 필수 과정입니다.



내가 되기 위한 근원적인 싸움


비무장지대(DMZ)를 떠올리면 아브젝트의 개념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그 누구의 땅도 아니지만, 동시에 남과 북의 한계를 규정하고 긴장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경계입니다. 아브젝트 역시 비무장지대처럼 나의 경계선에 위치하면서, 나의 질서를 위협하고 혼돈을 유발합니다. 마치 비무장지대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불안과 혼란이 커지듯, 나의 경계를 이루고 있던 아브젝트가 갑자기 나의 질서를 흔들면, 우리는 불안, 공포, 혐오와 같은 강렬한 감정을 경험합니다. 이런 감정들은 극심한 정체성의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을 우리는 영혜의 꿈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시 꿈을 꿨어.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겨줬는데, 깨는 순간 잊었어. 죽인 사람이 난지, 아니면 살해된 쪽인지. 죽인 사람이 나라면, 내 손에 죽은 사람이 누군지, 혹 당신일까.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아니면, 당신이 날 죽였던가...... 그럼 그걸 감춰준 사람은 누굴까. 그건 분명히 나나 당신이 아닌데.


아브젝트를 밀어내고 주체의 경계를 확립하려는 행위,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내가 겪는 극심한 공포, 혐오, 불안, 현기증, 역겨움과 같은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반응을 크리스테바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이라고 불렀습니다. 영혜가 육식을 하지 않는 계기가 되었던 꿈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는 단순히 불쾌한 악몽이 아닙니다. 영혜가 자신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벌이는 근원적이고 치열한 싸움입니다.


언니,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결국 아브젝시옹은 '나'로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한때 '나'였던 것을 끊임없이 밀어내는 역설적인 과정입니다. 진정한 나를 향해 나아간다는 건, 어쩌면 이러한 고통의 과정을 고스란히 거쳐야 가능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물구나무는 이러한 역설적 과정을 극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돌봄이란 단순히 나의 울타리를 견고하게 지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나였던 것들, 즉 아브젝트를 끊임없이 추방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처럼 아브젝시옹을 거치면서, 우리는 버림의 고통과 재탄생의 기쁨이 교차하는 신비한 변신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네 번째 문장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할까?'


이 질문은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가꾸지 못했다는 얕은 자책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여겨왔는지를 깊게 되묻는다.


집, 학교, 군대, 직장에서 경험한 폭력은 내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폭력을 내면화한 것이다. 폭력의 내면화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폭력의 일부로 살고 있단 뜻이다. 이런 폭력을 그대로 둔 채, 나는 나를 돌볼 수 있을까? 오히려 내면화된 폭력은 자기 돌봄마저 또 다른 폭력으로 만드는 건 아닐까? 폭력과 같은 편이 되어, 폭력을 인정하고, 권유하고, 변호하는 나는, 나를 돌볼 수 없다.


'나를 돌보는 일'은 폭력으로 잃어버린 진정한 나를 그려보는 데서 출발한다. 폭력 이전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 사람이 원한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그도 생명과 영혼에 무심한 사람이었을까? 그 역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생명의 피와 목숨을 먹어야만 하는 사람이었을까? 어쩌면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나무를 보고 폭력 이전에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영혜는 지금처럼 살지 않고, 나무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그렇다. 영혜는 살고 싶었다. 나무처럼 평화롭게, 모두 형제처럼. 땅에 박힌 채 그 누구의 영역도 침범하지 않고서, 햇빛과 비만 먹고서도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처럼, 영혜는 살고 싶었다. 밥을 먹기 위해, 살기 위해, 때리는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나무를 영혜는 얼마나 부러워했을까. 살기 위해 폭력을 견디지 않아도 되는 꽃과 풀을 보면서 영혜는 이런 몸을 벗어버리고 꽃과 풀이 되고 싶진 않았을까.


나, 이제 안 먹어도 돼. 이렇게 밝은 영혜의 얼굴을 그녀는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 보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무처럼 모두 형제로 사는 게, 어쩌면 인간이 오랫동안 살아온 방식 아니었을까. 폭력을 견디는 건 삶이 아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시간은 그저 고통이었을 뿐이다. 언니 인혜는 이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인혜는 끊임없이 동생을 ‘정상’으로 돌리려 애썼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감당해 온 삶의 고통과 억지스러움을 자각했을 것이다. 억눌러 온 고통과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만든다.


나도 그랬다. 별다른 물음 없이 무난하고 평온한 삶을 원했다. 나를 돌보는 일도 오직 내가 쌓아온 틀 안에서, 그것을 허물지 않는 선에서만 조심스레 허락했다. 정작 돌봐야 할 폭력 이전의 나에 대해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지금까지 쌓아 올린 나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이 성역을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그래서 기쁘지 않았다. 억지스러운 삶이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했다. 누구라도 나의 가상이미지를 건드리면 역겨웠고 화가 났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고통이 아니었다. 잃어버린 체면과 자리를 되찾으려는 욕망의 관성이었을 뿐이다. 삶이 아니었다.


『채식주의자』와 『공포의 권력』은 이러한 자기돌봄의 이면에 숨겨진 복잡한 감정들을 바로 보게 만들었다. 영혜가 육식을 거부한 것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몸과 정신을 파괴해 온 폭력의 흔적에서 벗어나려는 탈출이다. 내면 깊숙이 묻혀 있던 ‘다른 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경험, 유전처럼 반복되는 폭력, 피와 토사물, 상한 음식처럼 우리가 멀리하려는 것이 지금에 나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모호하고 위태로운 것인지 일깨운다.


진정한 자기돌봄이란 과거의 나였던 것들, 내 안의 상처와 불편한 기억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것들이 더 이상 지금의 나를 규정하지 않도록 고통스럽게 분리해 내는 것이 먼저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만나는 것이다. 그 고통을 기꺼이 지켜볼 때 비로소 나는 나를 돌볼 수 있게 된다. 이제 나는 자기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문장을 하나 더 쓴다.


나를 돌본다는 건, 지금의 나를 지켜는 일이 아니다.

지금의 나를 더 이상 외면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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