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
글이 나를 채워간다. 모래와 자갈로 움푹 파인 웅덩이를 메우듯, 읽고 쓴 글이 삶의 구멍을 메워간다. 몸은 더 이상 자라지 않지만, 마음만은 한 달에 한 번씩 훌쩍 자란다. 놀랍게도 말이다. 마음의 키가 커서일까.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예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그걸 못 봤다는 게 말이 돼?’, ‘그걸 기억 못 한다는 게 있을 수나 있는 일이야?’ 나와 다르면, 일단 화부터 내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람마다 보이는 것과 중요한 것이 다르다. 따라서 기억에 남는 것도 나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다른 데도 서로 말을 알아듣고 웃을 수 있는 건 기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는 순간마다 그 기적에 합당한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
독서도 마찬가지다. 작가와 통했다면, 감사해야 한다. 작가가 쓴 한 줄 한 줄에는 저마다 제자리가 있다. 등장인물의 말과 사건 중 그 어느 하나도 허투루 쓰인 게 없다. 따라서 작가와 생각이 통했다면, 독자가 조심스럽게 그리고 끈질기게 마음을 쏟은 덕이기도 하지만, 한편 행운이기도 하다. 책이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건, 이런 노력과 행운이 겹친 결과다.
이번 달 글쓰기 주제는,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이다. 주제가 마음에 쏙 들었다. 함께 읽을 책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은 소실 적에 읽은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눈으로 훑은 수준이지만, 계속되는 자살과 적나라한 성적 묘사가 주었던 불편함만은 여전히 남아 있다. 자살과 성행위는 아직도 쉽게 꺼내기 어려운 주제다. 그런 주제를 문학 작품에서 예고도 없이 마주치는 건 지금도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잘 사는 것과는 멀어도 너무 먼 자살과 섹스. 자살과 섹스가 난무하는 『노르웨이의 숲』. 이 잘못된 만남을 해결해 줄 철학자는 레비나스였다. 강사는 『전체성과 무한』이라는 레비나스의 책에서 특히 ‘타자의 얼굴’에 집중해 달라고 강조했다. 자살과 섹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얼굴이라니, 나는 살짝 어지러웠다. 남의 얼굴을 빤히 보는 것도 얼마나 아찔한 일인가. 나를 채웠던 글들이 모두 빠져나가면서 마음에 큰 구멍이 다시 생길 것 같았다. 잘 산다는 것과 이런 거북한 것들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음도 다시 가다듬을 겸 이번 달부터는 강사가 알려준 독서법대로 해볼 요량이다. 강사의 독서법은 이렇다.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만나면 밑줄을 친다. 다 읽고 나서 밑줄 친 부분만 컴퓨터로 옮긴다. 자판을 두드릴 땐 책을 끝까지 읽었기 때문에 밑줄 친 부분에서도 전체 이야기가 보인다. 부분에서 전체가 보이면 의미가 생기고 글이 출발한다. 그 의미를 키워드로 압축해 함께 적는다. 이러면 나중에 키워드로 분류된 문장들을 쉽게 따로 볼 수 있다. 분류는 생각에 순서와 구조를 만든다. 결국 체계적으로 글을 쓰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럴듯하다.
『노르웨이의 숲』은 흔히 성장소설로 분류된다. 하긴,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열일곱 살부터 스무 살까지 겪었던 일을 극복하면서 성장하는 이야기니까 적절한 분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 책이 처음 우리나라에 소개될 당시 책명은 『상실의 시대』였다. 그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의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계속 죽기 때문이다. 죽음처럼 철저한 상실이 또 있을까.
상실과 성장. 어쩌면 이 두 단어가 『노르웨이의 숲』을 읽는 데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나는 강사의 독서법에 따라, 밑줄 친 문장 끝에 괄호를 치고 상실과 성장이라는 꼬리말을 달았다. 물론 잊지 않았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란 질문 말이다. 그래서 잘 사는 것과 닮은 문장을 만나면 그렇게 꼬리말을 남겼다.
먼저, 상실로 분류된 문장들을 찾아봤다. 이 중 가장 빨리 찾아진 건 ‘들판의 우물’이다.
그녀는 내게 들판의 우물에 대해 이야기했다. (…) 그건 정말로 정말로 깊어 (…) 그런데 그게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 사람이 갑자기 없어지는 거야. 아무리 찾아도 없어.
들판의 우물은 깊고도 깊다. 문제는 우물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사람이 빠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멀쩡한 사람이 갑자기 없어진다. 아무리 찾아도 없다. 완벽한 상실이다. 위치를 모르니 우물이 언제 어디서 사람을 삼킬지 알 수 없다. 들판의 우물은 소리 없이 찾아와 한 인간을 완전히 삼켜버리는 죽음과도 같다.
상실로 찾아진 두 번째 문장은 말과 관계있다.
말을 잘 못하겠어. 요즘 들어 계속 그래.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이상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 거야. 맞지도 않는 말이거나 완전히 반대거나. 그걸 고쳐 말하려 하면 이번에는 혼란에 빠져서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도 모르게 돼.
소설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인 나오코는 말을 잃어버렸다. 모든 말을 잃어버린 게 아니라, 적절한 말을 잃어버렸다. 이를 소설에서는 말 찾기 병이라고 한다. 말 찾기 병은 이상한 말, 부적절한 말, 반대말은 떠오르지만, 적절한 말만은 생각나지 않는 병이다. 실어증처럼 말 전체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언어가 뒤틀려 자꾸 틀리는 것이다. 마치 깨진 거울 속에서 하는 말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상황과 맥락에 맞는 적절한 말이다. 깨지고 부서진 말은 인간관계 전체를 망친다. 인간에게 관계의 상실은 죽음과도 같다. 나오코의 말 찾기 병은 그녀에게 죽음과도 같은 상실감을 준다. 결국, 들판의 우물과 말 찾기 병은 모두 죽음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모두 나오코로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나오코와 죽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오코는 세 번의 죽음을 겪는다. 첫 번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언니의 자살이다. 언니는 스스로 모든 일을 해결하던 똑똑한 사람이었기에, 유서 하나 남기지 않은 그녀의 자살을 가족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너무 머리가 좋아서,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랬을 거라며 수근댔다. 아버지는 자살한 삼촌 일로 핏줄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자살한 언니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어린 나오코였다는 점이다. 죽은 언니의 얼굴과 정면충돌한 그녀는 얼이 나갔다. 머리로는 엄마를 불러야 한다고 외쳤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니의 목을 조이던 끈을 풀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 일 후, 나오코는 사흘 동안 말을 잃었다. 이 첫 번째 죽음은 나오코에게 세상과 자기 자신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걸 각인시킨다. 삶은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것이다.
두 번째 죽음은 기즈키의 자살이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지나칠 정도로 각별한 사이다.
우린 세 살 적부터 같이 놀았어. 우린 늘 같이 지내면서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잘 이해하면서 자랐어. 처음 키스한 게 초등학교 6학년 때, 정말 좋았어. 내가 초경을 한 그날, 그 앨 찾아가 엉엉 울었어. 어쨌든 우린 그런 관계였어.
세 살은 자아 정체성이 막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이 시기부터 매일 함께 놀며 자란 두 사람은 애착 대상을 넘어, 마치 한 사람처럼 끈끈했을 것이다. 기즈키와 나오코는 가장 가까운 친구 이상의 존재, 어쩌면 또 다른 자기 자신처럼 서로를 느끼지 않았을까. 특히 나오코가 초경 사실을 엄마가 아니라 남자인 기즈키에게 말했다는 건, 두 사람 사이에 신뢰와 정서적 유대가 어느 정도 인지 잘 보여준다.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하나처럼 얽혀 있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자란 벌거벗은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어. 배가 고프면 바나나를 먹고 외로우면 둘이서 끌어안은 채 잠들었지.
그런 기즈키가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세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삶의 거의 모든 걸 공유했던 유일한 친구. 무엇보다 언니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를 함께 감당했던 단 한 사람. 그가 자살한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렇게 죽음은 나오코와 소중한 사람들을 사정 없이 갈라놓았다. 죽음은 절대 회복할 수 없는 상실, 절대적인 단절이다. 나오코는 이 고통을 들판의 우물에 비유한 건 아닐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걷던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슬픔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이다. 언어를 훌쩍 뛰어넘는 상실의 고통이 그녀에게 말 찾기 병으로 나타난 건 아닐까.
나오코가 겪은 마지막 죽음은 그녀 자신의 자살이다. 이 죽음은 나오코, 죽은 기즈키, 와타나베 세 사람 사이에 놓여있다. 와타나베는 기즈키-나오코라는 ‘둘이지만 하나같은 존재’에게 처음 등장한 낯선 사람, 즉 타자다. 타자의 의미에 대해 나오코는 와타나베에게 이렇게 말한다.
기즈키는 정말로 너를 좋아했고 어쩌다 보니 네가 우리에겐 처음으로 겪는 타자와의 관계였던 거야. 그건 아직도 계속돼. 기즈키가 저세상으로 가 버린 뒤에도 넌 나와 바깥 세계를 이어 주는 유일한 연결 고리야, 지금도.
나오코는 타자를 자신과 바깥 세계를 이어 주는 연결 고리로 이해한다. 나와 바깥 세상 사이에 타자가 끼어있다. 타자는 나와 바깥 세계의 경계가 된다. 타자는 내가 바깥 세계로 쓸려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동시에, 바깥 세계가 나에게 범람하는 걸 막아준다.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방파제인 셈이다.
이와 달리, 기즈키와 나오코는 서로에게 이런 타자가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너무 잘 알고 너무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경계가 아니라, 일부였다. 따라서 바깥 세계의 거센 파도를 함께 맞을 수는 있어도, 서로 막아줄 수는 없었다. 나오코와 기즈키 사이엔 나를 나로 만드는 온전한 자기 경계가 없었던 것이다. 소설에는 두 사람이 성적으로 결합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이 장면을 통해 두 사람이 한 몸처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 와타나베가 나타났다. 기즈키가 보는 와타나베, 나오코가 보는 와타나베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같은 인간을 두고 두 사람 사이에 '다름'이 생긴 것이다. 와타나베는 자신도 모르게 기즈키를 기즈키로, 나오코를 나오코로 만드는 분리선이 된 셈이다. 이러한 균열은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동요를 일으켰을 것이다. 기즈키는 작지만 결정적인 이 혼동 속에서 결국 자기다움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나오코에 따르면, 기즈키는 와타나베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오직 좋은 점만 보이려고 애썼다. 사실 기즈키는 어릴 적부터 계속 그랬다. 기즈키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에게 자신은 늘 고쳐지고 나아져야 할 고장난 무엇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바꿔 보려고 나아져 보려고 하다가 잘 안되면 안절부절하거나 슬퍼하거나 했어. 그렇게 훌륭하고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스스로 자신감을 갖지 못한 채, 저것도 해야 하고 이것도 바꾸어야 하고, 그런 생각만 했던 거야. 불쌍한 기즈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고장 나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즈키. 기즈키는 나오코 앞에선 대인 관계에서 오는 긴장감을 풀어 버릴 수 있었지만, 와타나베 앞에선 불안에 휩싸였다. 기즈키와 나오코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둘이서만 살 순 없는 노릇이다. 두 사람 모두 점점 커 갈 것이고, 언젠가는 사회에 나가야만 한다. 그래서 와타나베는 그들에게 정말 중요했다. 그들은 와타나베를 징검다리 삼아 바깥 세계로 나가려고 나름 노력했다. 아쉽게도 그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기즈키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나오코는 여전히 죽은 기즈키와 함께 살았다. 기즈키 없는 기즈키와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그녀는 와타나베에게 이러한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한다. 나오코는 생각한다. 만약 기즈키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 ‘만약’을 넘을 수 없었다. 나오코는 살아있는 와타나베가 아니라, 죽은 기즈키를 선택한다. 그녀는 바깥세상으로 나오길 주저했다.
아마도 우린 세상에 빚을 갚아야만 했을 테니까. 나오코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성장의 고통 같은 것을. 우리는 지불해야 할 때 대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청구서가 이제 돌아온 거야. 그래서 기즈키는 그런 선택을 했고 지금 나는 이렇게 되었어.”
그녀는 죽기 전에 와타나베로부터 온 편지를 모두 불태웠는데,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모든 것을 처리하고 지금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것
죽음으로 살아있는 사람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 과연 새롭게 태어나는 것일까. 그리고 나오코가 말한 세상에 진 빚이란 또 무엇일까. 성장의 고통이 왜 지불해야 할 대가인가. 머리 속이 새까맣게 뒤엉켰다. 지금까지 내가 쓴 내용과 잘 사는 건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등장인물의 계속된 자살은 이런 물음들을 압도했고, 나는 들판의 우물에 빠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