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 1

한강, 『채식주의자』

by life barista

폭력의 추억


안녕하세요! 이번 달 우리가 함께 써볼 주제는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입니다. 여러분, 요즘 스스로를 잘 돌보고 계신가요? 밥은 제때 드시는지, 잠은 잘 주무시는지, 무리하게 참거나 꾸역꾸역 버티고 계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자기 자신에게 야박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좀 쉬세요’라고 쉽게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겐 그런 말을 잘해주지 못합니다. 오늘 질문은 단순한 건강 관리를 넘어섭니다. 자기돌봄은 신체적 건강뿐 아니라 정신적, 정서적, 그리고 윤리적 안녕까지 아우르는 개념입니다. 결국,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여기면서 살아왔는가’를 전부 되돌아보게 하는 질문인 거죠.


강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우리를 침착하게 한번 바라본 후, 묵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내가 나를 무언가로 규정하는데, 폭력만큼 나쁜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대부분 학교에서 한 번쯤 맞아봤을 거라고 했다. 어릴 적 당했던 폭력은 모든 일에서 자기 안전을 최우선으로 선택하게끔 만든다. 생존 자체에 대한 위협이 나의 선택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다. 특히 때린 사람이 선생님처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일 경우, 어린 학생은 죄책감과 자기 처벌도 함께 짊어지게 된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사람이 나쁜 일을 할 리 없기에, 모든 잘못을 자기 자신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이 말이 중학교 때 사건 하나를 불러냈다. 그날 아버지는 피떡이 진 내 엉덩이에 바셀린을 발라주셨다. 그런데 아버지는 나를 위로하시긴커녕 오히려 혼내셨다.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선생님께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때리셨겠냐고. 아버지의 세계에서 선생님은 훌륭한 사람이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때리는 분이 절대 아니다. 아버지 세계에서 나는, 그런 선생님조차 매를 들도록 만든 나쁜 아이였다. 맞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마음 재판정에선 이미 내 죄를 자백하고 있었다.


다 내 잘못이지, 그래, 난 맞아도 싸!


시험 성적은 맞아도 싼 이유가 되었다. 수우미양가에서 양, 가를 많이 받은 소위 양가집 아이는 강력한 사랑의 매를 맞았다. 친구 중엔 짐승처럼 맞다가 교실에서 도망친 놈도 있었다. 결석이 2주를 넘자, 학교는 녀석을 정학시켰다. 개근상이 목표였던 나는 정학이 무서웠다. 그래서 사랑이 변신한 대걸레 자루를 끝끝내 참아냈다. 질기고 거친 폭력은 새싹 같던 나의 자존감을 뿌리째 뽑았다. 언제 맞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주물렀다. 한 인간의 존엄과 고유한 개성을 돌보기엔 애초부터 글러 먹은 환경 아닌가.



나는 아무래도 괜찮아


앞만 보고 달리면 자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나를 돌보려면 가던 길을 잠시 멈춰야 합니다. 호흡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런 후, 시선을 삶 전체로 돌려야 합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을 돌보기란 불가능하니까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나 자신을 홀대했던 순간들을 한번 꺼내보면 좋겠습니다. 그때 어떤 감정이 스쳐 지나갔는지,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도 함께 생각해 보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스스로를 홀대했던 기억이라? 이건 내가 전문가다. 회사에서 마지막 인사 발령이 났던 날, 나는 혼자 점심을 먹었다. 회사는 퇴직을 딱 1년 앞둔 시점부터 재택근무를 명한다. 말이 재택근무지 일을 하진 않는다. 형편상 위로금을 줄 수 없는 회사는 대신 시간을 주었다. 1년 동안 살길을 한번 찾아보라는 취지다. 동료들은 명예로운 퇴장이라는 뻔한 인사말을 건넨다. 아직 젊은 동료들에게 퇴직예정자의 감정 따윈 남의 일이다. 처지가 다른 사람들끼리 굳이 같이 밥을 먹어야 할까. 그래서 혼자 생각할 게 좀 있다며 점심시간에 혼자 남았다.


사무실이 비자, 나는 조용히 편의점으로 향했다. 소비기한이 오늘까지인 김밥을 반값에 팔고 있었다. 재택근무할 땐 월급이 반으로 줄어든다. 당장 오늘부터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 내키진 않았지만, 미리 편의점 음식에 적응도 하고 돈도 아낄 겸, 반값 김밥을 집어 들었다. 그래도 먹을만하니까 팔겠지.


그렇지 않았다. 김밥은 안 그래도 상하기 쉬운 음식이다. 이런 무더위에 유통 과정 어디서 잘못됐는지 김밥에서 살짝 시큼한 냄새가 났다. 그렇다고 먹어보지도 않고 다 버릴 순 없었다. 딱 한 개만 먹어보고 결정하자. 김밥을 입에 넣고 판독에 들어갔다. 김밥을 몇 번 씹어 넘기려 하자, 구역질이 올라오면서 목구멍이 좁아졌다. 막 넘어가려던 시금치와 단무지가 토해졌다. 비릿한 위액 냄새까지 올라왔다. 쓰레기통에 김밥을 모두 처넣었다. 버려진 김밥이 나를 핀잔하는 것 같았다. ‘그냥 먹지, 그랬어. 너는 아무래도 괜찮은 놈이잖아.’ 사실이었다. 버려진 김밥에 자꾸 눈길이 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김밥과 자기 부정


자신을 소홀히 대하는 걸 넘어서, 아예 내가 아니길 바랐던 적도 있었다. 소풍날 아침, 엄마는 내가 소풍 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을 손에 쥐여 주곤 급하게 출근하셨다. 그 돈에 고무된 나는 황급히 가게로 갔다. 아뿔싸! 먹고 싶은 과자와 음료수는 천 원을 훌쩍 넘겼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짝꿍은 자기 도시락은 물론, 담임 선생님 도시락까지 3층으로 싸 왔다. 착했던 짝꿍은 나에게 김밥을 두 개나 주었다. 고급 재료가 잔뜩 들어간 왕김밥 두 개를 한입에 밀어 넣자, 목구멍이 답답했다. 목구멍보다 더 답답했던 건 속마음이었다. 이상한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나는 왜 쟤가 아니라, 나일까?


고작 김밥 때문에 나는 나라는 사실이 싫었다. 엄마가 준 천 원이 원망스러웠고, 김밥을 건넨 짝꿍에겐 고마우면서도 미운 마음이 들었다. 복잡한 감정이 지나가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불효자다. 그깟 김밥 때문에 엄마를 원망하다니. 엄마가 없었다면 나는 태어날 수도 없지 않았는가. 기껏 낳아주고 길러주었더니 부잣집에서 태어나지 못한 걸 부러워하다니!’ 나는 내가 비겁하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를 배신한 아들을 참을 수 없었다. 왕김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나는 마치 대역죄인처럼 울었다.


지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엄마가 준 천 원을 짝꿍에게 주고 김밥을 팔라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 물정 모르는 짝꿍은 도시락을 통째로 주었을 거다. 영업으로 다져진 수완이 글쓰기까지 타락시키고 있다. 하긴 그 오랜 세월, 영업맨과 사기꾼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얼마나 자주 했던가.


친구야, 김밥 정말 고맙다. 이거 우리 엄마가 사주신 과자야, 같이 먹자!


그때 차마 하지 못했던 이 말을, 나이 오십이 훌쩍 넘어서야 한다.



자기 돌봄과 자기 경계


이번 달 함께 읽을 책은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입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이미 읽어보신 분도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소문대로 어렵고 거북한 책입니다. 청소년 유해 도서 논란이 있기도 했죠. 이 책을 읽은 제 아이들의 한 줄 평은, ‘한강 아줌마, 좀 이상해!’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불안과 검열 의식이 여전히 작동 중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이 자기돌봄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기돌봄을 원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돌봄이 나의 몸과 마음을 지금보다 건강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돌봄이 지금의 나를 개선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기돌봄의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면만을 강조합니다. 이런 편견은 자기돌봄을 오히려 자기 강박으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더 개선되고 개량된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닙니다. 그런 나는, 지금 여기엔 없는, 먼 미래 어디에 있을 법한 상상의 존재일 뿐입니다. 긍정에 매몰된 자기돌봄에는 지금 여기 있는 나를 희생해 허울 좋은 가상의 나에게 갖다 바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보고 천천히 살펴야 할 대상은 먼 미래에 있는 내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기에 엄연히 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앞으로도 별 볼 일 없으니 하루하루 막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건강해야 과거의 나를 좋게 추억합니다. 그래야 미래의 나를 건강하게 상상합니다.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삶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를 건강하게 통합하는 삶의 뿌리가 됩니다.


지금 여기 있는 나에게 집중할 때 중요한 것이 ‘자기 경계’입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나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는 어디일까요? 지금까지 아무 의심 없이 나라고 생각했던 모습 중 어떤 것은, 진정한 나를 감추는 가림막일 수도 있습니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인 영혜에게 육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을 선택한 이유도 자기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2주 후에 따로 유인물을 드릴 겁니다. 여러분이 글을 쓰는 데는 이 유인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공포의 권력』 읽기는 여러분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이 두 권의 책이 여러분의 자기돌봄을 어떻게 이끌지 궁금합니다. 이제 막 3개월이 지났지만, 벌써 저는 여러분의 글에서 큰 감동과 따뜻한 위로를 얻고 있습니다. 이번 달도 기대하겠습니다.



수상한 채식주의자


책 읽기보다 책 사기를 더 좋아하는 나는 일단 『채식주의자』와 『공포의 권력』 두 권을 모두 샀다. 『채식주의자』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우리나라 작가의 대표작이니까 무조건 사고 싶었다. 『공포의 권력』은 어렵다고 하니까 오히려 호기심이 생겼다. 녹슬었던 도전 정신까지 삐걱대며 움직였다. 어쩌면 내가 그 어려운 책을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은가! 어디서 많이 써먹던 수작이다. 어쩌면 내가 당첨될지도 모른다며 숫자 6개를 고르는 바로 그 속임수.


『채식주의자』는 한 권이 아니었다. 『채식주의자』 안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이렇게 세 권의 중편 소설이 함께 있었다. 한강 작가는 이를 ‘고통 3부작’이라는 파일명에 넣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채식주의자』는 고통에 대한 소설 세 개가 합쳐진 장편소설인 셈이다. 어떤 고통일까?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게 자기돌봄의 출발점일까.


‘고통 3부작’의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인 영혜의 1인칭 관점이 없다는 것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이 자기 관점으로 말한다. ‘몽고반점’은 영혜의 형부를 중심에 둔 3인칭 시점이다. 마지막 ‘나무 불꽃’은 영혜의 언니인 인혜를 중심에 둔 3인칭 시점이다. 몽고반점의 형부와 나무 불꽃의 인혜는 부부 사이다. 하여튼, 여기서도 주인공 영혜는 형부와 언니의 시점으로 그려진다. 독자는 이들의 시점에서 영혜의 말과 행동을 전해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왜 나를 잘 돌보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머리에 넣고 『채식주의자』를 읽으니, 건강에 채식이 좋긴 하지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강사가 이 말을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을 거다. 하지만 채식을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영혜의 남편도 그랬다. 그의 말처럼, 건강하게 오래 살 생각으로, 체질을 바꾸려고, 환경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은 채식주의자가 된다.


남편이 영혜와 결혼한 이유는 딱 하나다. 영혜가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악몽 한번 꿨다고 고기를 싹 내다 버리는 여자와는 더 이상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남편은 영혜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닐까. 그나저나 영혜는 도대체 어떤 꿈을 꾼 걸까.


거적때기를 걷고 들어가 순간 봤어. 수백 개의,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 어떤 덩어리에선 아직 마르지 않은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어. (중략)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 먹었거든.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순간 나는 잘 만들어진 공포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을 느꼈다. 사이코패스가 사람을 죽이고 인육을 보관하는 창고에 잠입한 형사가 된 기분이랄까. 그런데,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대표 같았던 영혜는 어쩌다가 이런 끔찍한 꿈을 꾸게 되었을까? 나는 이 질문을 품고 계속 읽어나갔다. 그러다가 ‘고통 3부작’ 모두에 등장하는 공통 사건이 하나 있다는 걸 발견했다. 어쩌면 이 사건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은 인간을 타고 우리를 맴돈다


공통 사건은 이렇다. 아버지는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영혜의 뺨을 때렸다. 뺨에 피가 비칠 정도로 억센 폭력이었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영혜의 입술에 아버지는 강제로 탕수육을 짓이겨 넣으려고 한다. 그래도 영혜가 먹기를 거부하자, 아버지는 뺨을 한 번 더 때린다. 그러곤 가족들에게 영혜를 꽉 붙잡으라고 명령한다. 이를 뿌리치고 나온 영혜는 과도를 집어 든다. 자기 손목을 긋는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영혜의 아버지는 월남전 파병 군인이었다. 베트콩 일곱을 죽여 무공훈장까지 받았다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긴다. 영혜는 그런 아버지로부터 열여덟 살까지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다. 언니 말에 따르면, 아버지의 폭력은 영혜에게 집중되었다. 자신은 지친 어머니를 대신해 아버지의 술국을 끓여주었기 때문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영혜의 엄마도 일상 맞았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어쩌면 임신 중에도 폭력이 계속되었을지 모른다. 전쟁터에서 각인된 폭력이 전후 사정을 봐줄 리 없지 않은가. 전쟁을 탓하며 퍼마신 술도 사리 분별을 망쳤을 것이고.


참혹한 전쟁이 아버지에게 남긴 폭력은 어머니에게, 뱃속 태아에게, 태어난 아이들에게 유전자처럼 전해졌을 것이다. 폭력은 한 때 사건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인간을 타고 우리 주위를 돌며 계속된다. 폭력의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어 다시 피해자를 만든다. 소설에서 폭력은 결국 영혜의 자해로 이어진다. 자해는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모두 자기 자신이다. 폭력이 피해자와 가해자를 동시에 만드는 특성을 자해는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영혜는 폭력의 순수한 피해자 아닌가? 그녀는 왜 스스로 자기 몸에 폭력을 행사한 걸까? 폭력을 아버지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을까? 자기를 칼로 베야 할 이유란 게 과연 있을까?

내 잇몸과 입천장에 물컹한 날고기를 문질러 붉은 피를 발랐거든. 헛간 바닥, 피웅덩이에 비친 내 눈이 번쩍였어.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고기에 내장된 폭력이 꿈으로 영혜를 덮쳤다. 남들 다 하는 육식,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즐겼던 고기가 왜 갑자기 악몽으로 영혜를 공격하는지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처음 이상한 꿈을 꾸기 전날에 있었던 아침 상황이다. 그날 영혜는 폭력적인 상황에 쫓겨 매우 불안했다. 불고기를 만들려고 냉동육을 자르고 있는데, 뒤에서 남편이 화를 내며 재촉했다.


제기랄, 그렇게 꾸물대고 있을 거야?
알지, 당신이 서두를 때면 나는 정신을 못 차리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허둥대고, 그래서 오히려 일들이 뒤엉키지. 빨리. 더 빨리.


그러다 영혜는 칼에 검지를 베인다. 피가 떨어지는 손가락을 빨면서 영혜는 마음이 진정되는 묘한 기분을 느낀다. 분명 내 안에 있는데,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지금껏 전혀 문제가 없던 것, 잘 견뎌왔던 것, 아니 견디고 있는지조차 몰랐던 자연스러운 일상 중 그 무엇이 짐승처럼 번쩍 눈을 뜰 때가 있다.


뒤뚱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죽이고 싶어질 때, 오래 지켜보았던 이웃집 고양이를 목 조르고 싶을 때, 다리가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맺힐 때,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때, 다른 사람이 내 안에서 솟구쳐 올라와 나를 먹어버린 때.


이건 평소 영혜가 아니다. 영혜는 자기 안에서 피를 먹고 안정을 찾는 자신과 만난다. 아무 이유 없이 살아있는 것을 죽이고 싶은 나를 목격한다. 가장 무난하고 평범했던 영혜는 자기 안에서 잔인한 짐승을 확인한다. 혹시, 이 짐승을 죽이려고 영혜는 자신을 칼로 벤 걸까? 이 짐승을 굶겨 죽이기 위해 영혜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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