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나 무시하지마! 나도 명품 들었다고! - 3

by life barista

[상담실] 구 대리님, 당신은 ‘무엇’입니까, ‘누구’입니까?


주말 오후, 구 대리가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가슴팍에 커다란 명품 로고가 박힌 티셔츠를 입었지만, 어깨는 축 처져 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가 만든 ‘기호의 감옥’에서 존재의 허기를 달래려, 쇼핑몰을 떠돌다 온 사람처럼 보입니다. 이번 상담은 이 공허한 쳇바퀴를 멈추기 위해, 실존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의 ‘현존재-실존’ 구분을 골격으로 삼고, 앞서 살핀 철학적 통찰들을 통합해 진행하고자 합니다.


먼저 칼 야스퍼스의 기본 구분을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야스퍼스는 인간을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했습니다. 하나는 이 세계 속에서 일하고, 관계를 맺고, 역할을 수행하는 현실적 인간인 ‘현존재(Dasein)’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자각하고 선택하며,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실존(Existenz)’입니다.


그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파묻혀 현존재로 머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벽에 부딪힙니다. 죽음, 극심한 고통, 죄책감 같은 ‘한계상황(Grenzsituation)’이 바로 그것입니다. 야스퍼스는 이 한계상황에서 비로소 인간이 자신과 깊이 마주한다고 봤습니다. 한계상황을 피하거나 단순히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책임지려 할 때, 사람은 진짜 자기인 ‘실존’으로 깨어납니다


이러한 야스퍼스의 철학을 상담에 적용한다는 것은, 내담자가 자기 나름의 한계상황과 정직하게 마주 서도록 돕고, 그 자리를 실존적인 물음과 결단의 대화로 바꾸는 것을 뜻합니다.


(1) 기호(Sign)를 입은 현존재의 인정 투쟁 (현상 진단)


철학상담가: 구 대리님, 오늘 입으신 티셔츠와 타고 오신 차, 눈에 확 들어오네요. 그 차를 타고 있을 때, 그리고 그 옷을 입었을 때 기분은 어떤가요?


구 대리: 짜릿하죠. 도로 위에서 다른 차들이 알아서 비켜줄 때, 제가 뭐라도 된 것 같거든요. 회사에서는 김 부장한테 깨지는 말단 대리지만, 차 문을 열고 내리는 그 순간만큼은 임원이 된 기분이니까요. 남들이 저를 올려다보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철학상담가: 지금 구 대리님은 악셀 호네트가 말한 ‘인정 투쟁’을 나름의 방식으로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회사에서 무시당한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마음 깊은 곳에서 필사적으로 싸우고 계신 거죠. 그런데 그 투쟁의 방식이,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기호(Sign)의 소비’에 머물러 있는 점이 안타깝습니다.


구 대리: 기호 소비요?


철학상담가: 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 소비는 단순히 ‘쓸모 있는 물건’을 사는 게 아니라, 물건에 붙은 상징과 이미지를 사는 일입니다. 명품 로고는 단순한 옷이 아니라 ‘성공’과 ‘우월감’을 뜻하는 기호죠.


야스퍼스의 언어로 말하면, 지금 구 대리님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보다,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의 징표를 몸에 걸친 채 안심하는 ‘일상적 현존재’ 상태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 대리님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구 대리님이 걸친 로고를 부러워할 뿐입니다. 구 대리님은 인간 구준범으로 존재하고 싶어 하지만, 정작 사람들 앞에 내미는 것은 비싼 물건으로 가려진 ‘기호화된 나’입니다.


(2) ‘소유’가 무너진 자리에 ‘존재’는 있는가 (한계상황 직면)


구 대리: 물건이면 어떻습니까? 어쨌든 남들이 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면 된 거 아닌가요? 껍데기라도 화려해야 살아남는 세상이잖아요.


철학상담가: 과연 그럴까요? 이렇게 질문을 던져보죠. “당신이 그 차를 소유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차가 당신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구 대리: 제가 샀으니까 제가 소유한 거죠. 리스비 내느라 점심에 소시지 하나로 버티는 것도 저니까요.


철학상담가: 혹시 그게 자동차에 매여 있는 노예의 삶은 아닐까요? 정작 주인인 구 대리님은 허기를 달래며 버티는데, 고급 자동차는 좋은 휘발유로 배를 채웁니다. 겉으로는 구 대리님이 차의 주인 같지만, 실제로는 차가 구 대리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만약 내일 당장 차와 명품들을 모두 잃어버린다면, 구 대리님에게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 대리: (당황하며 침묵하다가) 그게 없으면... 마치 척추를 뽑힌 것처럼 무너질 것 같아요. 카드 빚만 남겠죠. 상상하기도 싫네요. 끔찍합니다.


철학상담가: 바로 그 지점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벽이 무너지는 순간, 삶 전체가 흔들리는 경험이죠.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와 소유(Être et Avoir)』에서, 자아를 소유물 위에 쌓아 올리면 그 소유가 사라질 때 실존적 충격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구 대리님은 지금까지 ‘내 것’을 늘리는 데 몰두하느라, 정작 ‘나 자신’이라는 존재를 키우는 데는 소홀했습니다. 명품 갑옷이 벗겨진 구 대리님의 맨살은 너무 연약해서, 김 부장의 말 한마디에도 피가 나는 상태가 된 겁니다. 이 불안은 단지 소유의 부족이 아니라, 소유에 과도하게 의존한 자아 구조에서 비롯된 실존적 불안입니다.


(3) 가짜 대화를 넘어 ‘실존적 소통’으로 (해법)


구 대리: 그럼, 다 갖다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란 말입니까? 찰스 테일러 말처럼 현대 사회는 인정을 못 받으면 죽은 거와 다름없는데, 맨몸으로 어떻게 버팁니까?


철학상담가: 테일러가 말하는 인정은, 소유물로 타인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의 인격으로 받아들여 주는 상호인정에 가깝습니다. 그는 인간을 ‘대화적 존재’라고 부릅니다. 구 대리님, 친구들을 만나면 주로 어떤 대화를 하십니까?


구 대리: 뭐... 차 바꾼 얘기, 코인 대박 난 얘기, 누구는 어디 아파트로 이사 갔다더라... 그런 얘기죠. 서로 은근히 자랑하고 견제하기 바빠요.


철학상담가: 그것은 서로의 ‘껍데기’를 비교하는 가면무도회에 가깝습니다. 테일러가 말하는 진짜 대화는, 자연·역사·공동체 같은 더 큰 의미의 지평 속에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묻는 자리입니다. 돈과 소유 말고는 함께 붙잡을 만한 가치가 없으니, 그런 모임 후에는 더 공허하고 쓸쓸해지는 겁니다.

구 대리: 네. 맞아요. 인정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철학상담가: 야스퍼스가 말한 ‘실존적 소통(Existenzielle Kommunikation)’을 한 번 떠올려 보죠. 실존적 소통이란, 쉽게 말해 서로의 전부를 걸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만남입니다. 가면을 벗고, 두려움·죄책감·희망·혼란까지 포함해 “내가 진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나누는 대화입니다.


구 대리: 약점을 보이면 무시당한다니까요?


철학상담가: 껍데기만 보고 무시할 사람들은 떠나보내셔도 됩니다. 그들은 구 대리님의 친구가 아니라, 구 대리님 차와 명품의 구경꾼에 가깝습니다. 대신, 소시지로 끼니를 때우는 지금의 마음과 불안을 털어놓을 단 한 사람만이라도 찾아보십시오. 테일러가 말했듯 우리의 정체성은, 나를 진지하게 들어 주는 ‘중요한 타자’와의 대화 속에서만 단단해집니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비싼 걸 가졌으니 무시하지 마’라는 시위에서 한 발 물러나, 사람과 일 그 자체를 진심으로 만나 보세요. 김 부장의 인정을 구걸하거나 자동차 엠블럼 뒤에 숨는 대신, “내가 지금 하는 이 일이 어떤 가치를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십시오. 그 질문에 자기 나름의 분명한 답이 세워질 때, 명품 같은 가짜 갑옷 없이도, 구 대리님은 ‘무엇’이 아니라 ‘누구’로서 올곧게 서게 될 것입니다.


상담을 마치며: 3초의 하차감보다 평생의 승차감을 위하여


구 대리가 집착하던 하차감은 차 문을 열고 내리는 찰나, 길어야 3초면 끝나는 신기루입니다.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그것은 실재가 아닌 기호(Sign)의 이미지에 가깝습니다. 남의 시선을 확인하기 위해 백미러를 들여다보는 습관을 멈추지 않는 한, 그는 끝없이 비교와 불안 속을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 과정에서 드러난 것은, 구 대리가 두르고 있던 명품 갑옷이 방패가 아니라 진정한 대화를 막는 차단막이었다는 겁니다.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백화점 영수증의 길이나 로고 크기가 아니라, 오래 버티며 쌓아 올린 시간, 일과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신뢰, 그리고 내면의 밀도입니다. 로고가 없어도 당신은 이미 그 자체로 대체 불가능한 ‘한정판’ 인간입니다.


기호에 기대어 서 있던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지고, 남의 시선이 아니라 자기 삶의 방향을 바라보며, 스스로 실존의 핸들을 잡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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