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은 통장을 스칠 뿐이고 마음은 늘 가난한 구 대리. 철학자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까요?
(1) 당신이 명품을 사는 진짜 이유, ‘인정 투쟁’ (악셀 호네트)
독일의 사회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는 인간 사회의 모든 갈등의 근원을 ‘인정 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온전한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차원의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인정: 가족이나 연인에게서 받는 정서적 배려 (자신감 형성)
권리의 인정: 법적 주체로서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 (자기 존중감 형성)
사회적 인정 (가치 부여): 공동체 안에서 나의 능력과 기여를 인정받는 것 (자긍심 형성)
구 대리의 문제는 세 번째, ‘사회적 인정’의 결핍에 있습니다. 회사에서 그는 무능하거나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받습니다. 호네트에 따르면, 이러한 ‘무시’는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인간의 자긍심을 파괴하는 사회적 질병입니다.
구 대리가 명품을 사는 행위는 바로 이 무너진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왜곡된 ‘투쟁’입니다. “나를 능력 있는 사람으로 봐줘!”라는 인정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나를 비싼 물건을 가진 사람으로 봐줘!”라고 절규하는 것입니다. 호네트는 구 대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네의 소비는 허영심이 아니라, 사회적 투명 인간이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이네. 하지만 물건을 통한 인정은 유효기간이 너무 짧다네.”
(2) ‘소유’가 ‘존재’를 삼키다 (가브리엘 마르셀)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은 구 대리의 상태를 소유(Having)가 존재(Being)를 압도한 상태로 진단합니다. 그는 삶의 양식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하나는 소유(avoir, to have)입니다. 고급 차와 명품 등 소유물을 추구하는 삶입니다. 소유물로 잠시나마 겉모습을 위장할 순 있지만, 한편 소유물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삶의 양식은 존재(être, to be)입니다. 이것은 인격, 사랑, 창조성 등 잃어버릴 수 없는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뜻합니다. 참여와 관계의 세계로 나아가는 자기만의 역동적 경험을 특징으로 합니다.
구 대리의 착각은 ‘더 많이 소유하면(Having), 더 그럴듯한 존재(Being)가 될 것’이라고 믿는 데 있습니다. 그가 자동차 엠블럼을 존재의 중심인 척추로 여기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마르셀은 이를 두고 소유물이 주인을 역습한다고 경고합니다. 소유로 비대해진 자아는 부풀어 오를 대로 오른 풍선 같아서, 단 한 번만 찔려도 쉽게 터져 버립니다. 구 대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 예상과 다른 표정, 말투, 비난에 그는 크게 분노하고 좌절을 느낍니다.
(3) 나 혼자서는 '나'일 수 없다" (찰스 테일러)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의 위기를 가장 예리하게 파헤친 사상가입니다. 그는 구 대리의 명품 소비를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불안한 현대적 자아'가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진단합니다. 테일러의 철학으로 구 대리의 내면을 더 깊숙이 들여다봅니다.
① 자아는 관계 속에서 태어난다
테일러 철학의 핵심은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대화적(Dialogical)'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인도에서 혼자 명상하며 '나는 누구인가'를 깨닫는 존재가 아닙니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이 나를 바라봐 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대화해 줄 때 비로소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구 대리가 괴로운 진짜 이유는 회사라는 공간에서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입니다. 김 부장의 호통과 동료들의 무관심은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는 일종의 '부정적 대화'입니다. 테일러는 인간의 정체성이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형성될 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대화 속에서만 유지된다고 봅니다
구 대리의 명품 과시는 단절된 대화를 강제로 잇기 위한 비명입니다. "제발 나를 좀 봐줘! 나랑 대화 좀 하자!"라는 절박한 신호죠. 하지만 비싼 차와 가방은 말을 할 줄 모릅니다. 백화점 직원의 깍듯한 존대는 물건을 향한 것이지 구 대리를 향한 것이 아닙니다. 쇼핑 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독백 속에서 외롭습니다.
② 명예(Honor)와 존엄(Dignity) 사이의 딜레마
테일러는 오늘날 인정의 형태가 바뀌었다고 지적합니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 인정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였습니다. 양반이나 기사는 태어날 때부터 사회적 인정이 주어졌기에, 굳이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반면 현대 민주주의 사회는 존엄성을 근거로 평등한 인간관 위에 서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평등한 존엄의 원칙은 오히려 구 대리를 더 불안하게 만듭니다. 모두가 존엄하다고 선언하지만, 현실은 소유물·학력·직급과 연봉으로 사람을 끝없이 줄 세우고, 그에 따라 어떤 이들은 법과 헌법이 말하는 존엄과는 전혀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구 대리는 지금 자기 존엄을 실제로 증명해 보여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압박을 느낍니다. 테일러가 말하듯 주어진 신분이 아니라 타인의 인정 속에서 끊임없이 검증되는 정체성의 부담을 떠안고 사는 것입니다.
③ ‘의미의 지평’을 잃어버린 가짜 진정성
구 대리는 항변할지 모릅니다.
"이게 진짜 내 모습(Authenticity)이에요. 내가 좋아하는 걸 사서 나를 표현하는 게 뭐가 나빠요?"
하지만 테일러는 이런 생각 속에 진정성에 대한 오해가 숨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진짜 자기다움은 그저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선택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더 큰 가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성찰할 때 비로소 진정성이 생깁니다. 테일러는 이를 ‘의미의 지평’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자신보다 큰 무대 위에서 살아갑니다. 역사, 자연, 공동체 같은 더 넓은 세계 속에서 내 선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할 때, 비로소 내 취향과 행동이 깊이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구 대리의 명품 소비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선택이 가격에 따른 서열 이상의 의미를 담지 못한다면, 결국 그는 다른 사람들이 만든 기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은 구 대리의 존재가 아니라, 그가 걸친 브랜드입니다. 진정한 자기표현은 타인의 시선 속에서 반짝이는 로고가 아니라, 그 너머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에 있는 것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