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은 얼굴을 지운다
청년 실업률 7.5%, 20대 대출 연체율 최고치 같은 숫자는 뉴스의 단골 메뉴입니다. 우리는 그 숫자 뒤에 있는 개인을 떠올리기보다는 ‘요즘 젊은 세대’와 같은 어떤 집단이 생각납니다. 회사에서 지원서를 볼 때도, 이름보다 먼저 학력·연차·자격증을 훑어보며 ‘아, 이런 부류의 사람이겠군’하고 미리 짐작해 버립니다.
최근에는 유튜브와 쇼츠가 이런 틀을 더 굳혀 줍니다. ‘조용한 퇴사 세대’, ‘라떼 부장 vs 신입 직원’같은 제목은 복잡한 사람들의 삶을 몇 글자의 캐릭터로 줄여 버립니다. 그걸 보고 있다 보면, 어느새 나 자신과 동료들까지 그런 꼬리표에 맞춰 ‘그쪽 부류’로 분류해서 이해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본능은 누군가의 고유한 삶을, 몇 개의 숫자와 그래프로 덧칠하기도 합니다. 회의 자리에서 팀원의 얼굴보다 ‘90년대생, 이직 잦은 MZ’ 같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면, 우리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 쌓인 평균 구름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돈키호테와 산초가 광야를 지나던 어느 날, 저 멀리서 거대한 먼지구름이 일어납니다. 먼지 때문에 자세한 건 하나도 보이지 않지만, 돈키호테는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장면을 묘사합니다.
“저기 보병과 기병이 줄지어 서 있고, 노란 깃발에는 사자가 공주에게 무릎 꿇고, 저쪽에는 황금 왕관 문장이 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먼지뿐이고, 나머지는 머릿속에 이미 들어 있던 기사도 소설이 현실을 메꾼 것입니다. 산초는 조심스럽게 “주인님, 저건 양 떼 같습니다”라고 말하지만, 돈키호테는 듣지 않습니다. 먼지가 걷혀 양 떼가 드러나도, “마법사가 내 눈을 속이고 있다”고 우깁니다. 결국 그가 돌진해 찌른 것은 적군이 아니라 목동들이 몰고 가던 순한 양들이었고, 그는 화가 난 목동들이 던진 돌에 맞아 이가 부러진 채 쓰러지고 맙니다.
우리는 보고 있지 않으면서도 안다고 믿습니다. 돈키호테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물의 실체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까지 줄줄 꿰어 맞춰주는 ‘이야기 틀’이었습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도시는 커지고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 세상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때 등장한 것이 사람을 묶어 내는 ‘인구’라는 틀입니다. 출생률·실업률·평균 수명 같은 통계와 개념은 세상을 다르게 보도록 만듭니다. 혼자 사는 인구 36%같은 말을 들으면, 그 안에 있는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기보다, 1인 가구라는 집단의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인간을 집단이나 체계 안에 넣어 ‘이미 다 안다’고 치부하는 태도를 ‘전체성’이라 부르며 경계했습니다. 상대를 ‘MZ세대’, ‘저신용자’ 같은 범주로 규정하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고유한 개인이 아니라 내 머릿속 틀에 맞는 하나의 ‘사례’가 되어 버립니다. 레비나스가 두려워한 것은, 그 사람이 사라지고 분류 항목만 남는 것입니다.
오늘날 AI는 이 전체성을 가장 세련되게 구현하는 기계입니다. ‘이 지역 재범률이 몇 %다’, ‘이 점수대 고객은 위험하다’는 알고리즘의 판단은, 어느새 ‘그러니 이 사람도 그렇다’는 결론을 객관적 사실로 포장합니다. AI는 그가 왜 그날 연체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방대한 데이터의 패턴 속에서 우리를 ‘위험군’이라는 집단 뒤로 숨겨버립니다. 평균이 우리 이웃의 얼굴을 덮어버리는 셈입니다.
돈키호테는 먼지 속 양 떼를 군대로 착각하고 돌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통계와 알고리즘이 만들어 낸 먼지를 보면서 머리에 있던 편향된 이야기를 마구 쏟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MZ는 다 그렇지 뭐.”
“저 점수대 고객은 원래 리스크가 높아.”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가운데 하나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고 말 걸 수 있는 ‘다성성’을 꼽았습니다. 숫자는 이런 차이들을 하나의 평균치로 섞어 버리지만, 실제 삶은 언제나 여러 사람의 서로 다른 입장이 어울려 있는 장면에 더 가깝습니다. AI가 세상을 알고리즘의 언어로 단순화하려 할수록, 우리는 다시 인간 각자의 고유한 모습과 그 차이가 만들어 내는 가능성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차가운 데이터 속에서 소중한 한 사람을 구해 내기 위해, 이런 질문을 되풀이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보는 이 숫자는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추고 있는가?”
구체적인 한 개인의 특징까지 파악해 적절한 처방을 내리는 AI 정밀 의료는 좋은 사례입니다.
통계 수치보다 상대의 따뜻한 체온과 표정에서 진실을 읽어 내는 능력, 그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건 거창한 철학책이 아니라, 아주 기본적인 두 가지 감각일지도 모릅니다. 통계를 읽는 눈, 그리고 사람 이야기를 듣는 귀입니다.
통계 문해력이란 평균이 그 사람의 전부가 아니며, ‘인구’가 곧 공동체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힘입니다. 실업률 통계 속에서, 편의점 구석에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끊임없이 자소서를 고치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는 것이 통계를 읽는 눈을 더 밝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문학적 해석력은 사회적 구조와 역사, 그리고 수많은 삶의 굴곡에서 겪는 감정들을 바탕으로 AI가 토해낸 숫자와 문장을 나의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입니다. 같은 대출 연체라는 통계도, '위험군'이라는 꼬리표로만 볼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을까'를 한 번 더 상상해 볼지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은 언제나 개별적이기 때문입니다.
통계와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 줄 수 없다는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 어쩌면 그것이, 돈키호테가 돌진했던 먼지구름을 걷어내고 우리 곁에 있는 진짜 사람의 얼굴을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지렛대가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