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규정의 서막
1장에서 우리는 성문 밖으로 나갈 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성문 앞에 서 보면, 발목을 잡는 건 언제나 ‘준비는 잘 되었나? 빠트린 건 없나?’는 강박입니다. AI가 저렇게 잘하는데, 내가 과연 잘 따라갈 수 있을지 의심까지 들면, 우리는 다시 성벽 안으로 물러나 ‘완벽한 준비’라는 유령에 쫓기기 시작합니다.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일수록 이 함정에 잘 빠집니다. 저 또한 그랬습니다. AI를 업무에 도입하자는 후배의 제안에 “조금 더 검토해 보자”고 답하며 성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실은 내 밑천이 드러날까 뒷걸음질 친 것이었습니다. 계획이 정교해질수록 몸이 더 무거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 때의 준비는 변화를 미루는 가장 우아한 핑계가 됩니다.
돈키호테는 이 지점에서 기묘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그는 창고의 낡은 갑옷을 닦고, 부족한 얼굴 가리개를 판지로 오려 붙입니다. 당연히 칼질 한 번에 판지 투구는 박살이 납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판지를 붙이고 쇠막대를 덧댄 뒤,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는 시험하지 않겠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겉으로 보면 자기기만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는 투구의 강도를 믿은 것이 아니라 “이 정도면 나간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칼날의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해야만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는 아마 영원히 서재를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철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태도를 ‘브리콜라주(bricolage)’라고 불렀습니다. 완벽한 재료를 기다리지 않고, 손에 쥔 부스러기들을 엮어 지금 당장 의미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AI 시대에 우리가 느끼는 무력감은, 기계가 보여주는 ‘강철 같은 정답’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매끄럽게 완성된 답 앞에서, 인간이 만든 허술한 초안은 금세 초라해 보입니다. 하지만 AI가 쏟아내는 결과물에는 ‘나’라는 주체가 거의 남지 않습니다. 돈키호테가 판지를 덧대어 만든 투구는 허술하지만, 그 안에는 출발의 기준을 스스로 만들려는 한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AI에게 어설픈 질문을 던지고, 평생 쌓아 온 경험과 새로운 기술을 어떻게든 이어 보려 애쓰는 모습은, 남들이 보기엔 판지 투구처럼 위태로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짜 비극은 판지 투구가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완벽을 기다리다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돈키호테가 건네는 메시지는 투박합니다.
“내 투구의 쓸모를 칼날에만 맡기지 마라.”
어느 순간, “이 정도면 한 번 나가 보겠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순간 새로운 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강철 투구를 기다리며 성벽 안에서 늙어갈 것인가, 아니면 어설픈 판지 투구라도 고쳐 쓰고 한 번쯤 모험의 세계로 나가 볼 것인가. 그 선택 앞에서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부를지에 따라, 3장에서 보게 될 세계의 모습도 달라질 것입니다. AI라는 같은 풍차를 두고도, 어떤 이는 거인을 보고, 어떤 이는 든든한 날개를 보게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