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605년,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했을 때 스페인은 거대한 변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봉건 질서는 무너지고, 계산과 돈이 세상의 기준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토지와 혈통만 믿고 살던 하급 귀족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고, 남은 것은 겉치레뿐인 ‘명예’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돈키호테의 광기는,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맞선 몸부림이었습니다.
400여 년이 지난 지금, 2026년의 우리는 또 다른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변호사, 회계사, 개발자, 작가처럼 오랫동안 공부해서 전문성을 쌓은 직업들조차 거대 언어 모델과 각종 자동화 시스템 앞에서 일자리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AI는 이들이 평생 갈고닦은 능력을 빠르고 저렴하게 대체하고 있습니다.
돈키호테는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일단 기사도 소설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지금 당신은 AI 시대를 어떻게 맞이하고 있습니까? 어쩔 수 없는 기술 발전이라며 체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은 멀었다’며 애써 외면하고 있습니까? 어느 쪽이든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습니다. 라만차 벌판의 먼지구름은 이제 AI라는 불확실한 안개로 변해 우리의 시야를 뿌옇게 가리고 있습니다.
저는 돈키호테를 두 가지로 재해석하고자 합니다.
첫째, 돈키호테는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과거에 머물고 싶은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현실에서 존재감을 잃어가자, 그는 자신이 지난날 영웅이었던 ‘편력 기사’라는 환상에 사로잡힙니다. 이 모습은 안정된 직장과 전문가라는 타이틀을 AI에게 빼앗길 불안 속에서 게임과 유튜브 등가상 세계로 도피하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둘째, 돈키호테는 한쪽으로 치우쳐 학습된 ‘AI 알고리즘’ 그 자체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가 기사도 소설에 취해 현실과 환상을 분별할 수 없게 된 것처럼, 오늘날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계산해 그럴듯한 대답, 즉 ‘환각’(hullucination)을 만들어 냅니다. AI에게는 옳고 그름, 의무와 선택을 구분해야 할 필요와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AI의 답변에서 인간적인 지성과 자아를 읽어 내고 싶지만, 그것은 실상 각자의 기대와 욕망을 덧입는 것에 가깝습니다. 돈키호테의 수많은 공상처럼 우리는 통계 모델을 완전한 지성체로 착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세르반테스가 그린 돈키호테의 모험은, 오늘날 AI를 둘러싼 여러 문제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합니다.
· 풍차 에피소드는, AI가 만든 가짜 판례 6건을 진짜라고 믿고 법원에 제출했다는 미국에 어떤 변호사를 생각나게 합니다. 돈키호테가 본 거인이 사실 풍차였던 것처럼, AI가 내놓은 답은 이 세계를 그대로 담고 있지 않습니다.
· 양 떼를 군대로 착각한 장면은, AI가 계산한 평균과 확률을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이해하는 우리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는 나와 이웃의 얼굴에서 그 사람만의 고유한 이야기를 읽지 못하고, 숫자와 알고리즘이 내놓은 유형과 등급으로 접근합니다. 평균과 확률은 사람의 무늬를 삭제하는 지우개와 같습니다.
· 돈키호테는 거울로 장식된 기사와의 대결에서, 자신이 믿어 온 영웅 서사가 주변 사람들이 꾸민 연극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는 그동안 매진했던 공부와 쌓아 올린 경험이 AI 앞에서 갑자기 의심스러워지는 오늘 우리의 불안과 겹쳐집니다.
그럼에도 『돈키호테』는 우리에게 절망만을 주지 않습니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다시 인간답게 살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먼저 돈키호테를 보겠습니다. 그는 온갖 조롱과 실패 속에서도 자기 삶의 규칙을 스스로 세우려 합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최종 결정마저 AI에게 맡기고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AI를 잘 활용하려면 돈키호테와 같은 과감한 결단과 도전이 필요합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나의 삶에서 스스로 찾겠다는 의지와 결정은 삶의 주도권을 지키기 최소한의 태도입니다.
AI 시대에 인간성을 지키는 열쇠는 어쩌면 산초에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산초는 세상과 살을 부대끼며 사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그는 현실에 발을 딛고 있습니다. 숫자와 그래프, 가상 화면 속이 아니라, 실제 사람의 얼굴을 마주 보고, 손에는 굳은살이 가득합니다. 노동의 힘듦과 기쁨을 느끼는 몸의 울림과 의미는 AI가 계산할 수 없는 인간적인 가치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관계입니다. 산초는 주인의 광기를 알면서도 끝까지 곁을 지킵니다. 오늘날 거대 기술 기업들이 ‘디지털 봉건제’를 만들고 우리를 데이터 농노처럼 다루려 할 때, 서로를 직접 만나 돌보고 협력하려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든든한 인간의 방패입니다.
소설 속 돈키호테는 ‘하얀 달의 기사’에게 패한 뒤 현실로 돌아와 조용히 병들어 죽습니다. 환상이 걷히고 남은 것이 황폐해진 인간성뿐일 수도 있다는, 인류를 향한 냉혹한 경고처럼 보이는 결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산초처럼 현실에 두 발을 단단히 디디고 설 수 있다면, 돈키호테의 이상은 더 이상 허망한 광기가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에너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AI라는 거대한 풍차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그 한가운데에서 여전히 자기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우리의 얼굴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모두 돈키호테입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기대와 불안을 가슴에 품은 채, 같은 길 위를 나란히 걷고 있습니다. 이 책이 그 여정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작은 이정표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