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life barista
Jan 12. 2021
얼마 전, 젊은 여자의 시신이 발견됐다. 그녀는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노동자였다. 시신이 발견된 곳은 포천 외딴 농가에 비닐집이었고, 간밤의 기온은 영하 16도였다. 나는 그 기사를 무심코 읽었다.
그러다가 비슷한 한파 때 우리집 보일러가 동파되었다. 하여 단 하루, 온기 없는 방에서 자봤다. 온기가 없다? 거짓말이다. 전기매트를 최고인 4단까지 잔뜩 올려놓았다. 요와 이불도 침대 위에 몇 겹 더 깔고 덮었다. 방풍지도 다시 붙였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 소용없었다. 30년 전에 단열공사 없이 지어진 연와조 건물은 매서운 겨울바람을 방 안으로 고스란히 들여보냈다. 언발에 오줌을 눠도 이것보단 낫지 싶었다.
보일러 수리 대기번호 150번.
냉골 취침이 조기에 해결되리란 희망은 일찍 감치 접었다. 보일러를 새로 장만하기로 했다. 천신만고 끝에 연결된 보일러 기사와 옥신각신했다. 결국 밤 9시가 넘어 기사님이 오셨다. 갑자기 보일러 설치가 어렵다고 했다. 콘덴싱 보일러는 에어컨처럼 물이 계속 나온단다. 그래서 얼지 않는 하수도가 꼭 있어야 한단다. 우리 집 보일러 하수도는 야외에 있다. 날씨가 추우면 보일러에서 나오는 그 물들이 다 얼 것이 분명했다. 기사님은 얼어붙어 높게 쌓일 얼음 높이를 자기 손으로 보여주었다.
전화로 이야기한 하수도는 실내에 있는 얼지 않는 하수도였던 것이다. 하수도란 말에 그런 비싼 조건들이 붙어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나는 오늘 밤엔 따뜻한 방에서 자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기사님을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더 기다렸다. 결국 공사를 못했다. 일반 보일러는 가지고 오지 않으셨단다. 공사는 다시 내일로 미뤄졌다. 이제 추위라면 지긋지긋하단 말이 절로 나왔다. 절망스러웠다. 그러다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그녀에 관한 기사를 다시 보게 되었다.
전기료가 아까워서.....
죽은 이주노동자를 고용했던 분의 인터뷰가 짧게 인용되었다. 허허벌판 위에 덩그러니 세워놓은 비닐집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따라서 그 흔한 전기장판도 켤 수 없었다. 영하 16도 비닐하우스. 그 위력에 이가 덜덜 떨렸다. 찬 방에서 잔 건 고작 단 하루였던 나 역시 두통과 몸살에 온 몸이 쑤신다. 그런데 그녀는, 겨울 없는 동남아시아에서 나고 자란, 그 젊은 영혼은, 몇 날 며칠을 무덤 같은 그 비닐집에서 잤을 것이다. 그녀는 쉬고 싶었다. 하루종일 힘든 일에 노초가 된 밤. 그러나 육체가 너무 고달프면 영혼도 어쩔 수 없다. 극심한 고통에서 그녀는 떨고 또 떨었다. 추위는 살을 파먹는 벌레처럼 온몸을 기어 다녔을 것이다. 아니다. 배부른 보일러 동파 타령이나 하는 나로서는 그 고통을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만 쓰는 게 옳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50인 미만 사업장은 그 적용을 3년 유예했다. 어제, 두 명의 노동자가 기계에 끼여 또 사망했다. 두 사업장 모두 50인 미만 기업이었다.
나는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육체노동도 하지 않는 사무원이다. 그런 탓에 누가 이 글을 본다면, 배부르니까 고양이 쥐 생각한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동을 한다.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리자면, 노동은 인간의 조건 중 하나다. 소비사회에서 노동은 소비되어야 할 그 무엇이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고로 소비될 노동을 하는 노동자 역시 소비될 운명이다. 조직화, 자동화, 기계화로 인해 노동은 끊임없는 소비의 반복 운동에 빠졌다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진단이다. 그 말이 옳다면, 소비될 노동도, 소비될 노동자도 끝도 없이 생겼다가 사라질 것이다.
자아실현을 위한 거창한 노동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루자. 생계의 필연성에 묶여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우연한 존재로 전락한 노동자. 나 역시 바로 그런 노동자 중 한 명일 뿐이다. 소비될 노동자 중 한 명으로, 영하 16도 비닐집에서 죽어간 이주노동자를 추모한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어떤 힘을 가진 법인지 잘 모른다. 그마저 그 적용이 3년 유예된 시점에서 돌아가신 두 분의 노동자의 삶을 추모한다.
가난한 농부가 내야 할 전기료와 영세 중소기업 대표가 지불해야 할 비용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걱정은 사람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걱정보다는 한참 뒤로 밀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람을 위해 쓰는 돈은 최소한의 헌법 유지 비용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다운 나라의 제일 덕목은 사람을 가장 먼저로 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생명과 건강에 관해서는 말이다.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면 정권이 망한다고 한다. 정말 어떤 정권이 망해야 한다면 그 이유는 사람 생명에 대한 정책이 실패했을 때 아닐까.
우리 헌법 10조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나아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까지 명시해 두었다. 그 사람이 국민이건 외국인이건, 돈 많은 사람이건 돈 없는 사람이건, 인간이라면 존엄하다는 것이 그동안 역사에서 우리 인간이 배운 원칙과 상식이 아닐까.
보일러 기사님이 언제 오시려나.
전화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