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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barista Jan 15. 2021

정인이 사건에 대한 독한 반성문

이 글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쓰지 않고서는 이 어둡고 무거운 죄책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다는 게 그 동기다.


인간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생후 16개월 된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면서, 제목은 꼭 반성문으로 하고 싶었다.

이런 무지 상태에서 쓰다 보니,

고장난 수도꼭지에서 물이 새듯, 모르겠다는 말이 나도 모르게 계속 새어 나온다. 덩달아 눈물도 그렇게 다.

나는 어디가 고장난 걸까.

모르겠다.     


왜 그랬을까?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피해자 편을 들었다.  

혹시 좋은 사람이라는 윤리적 평판무의식적으로나마 기대한 건 아니었나 모르겠다.

가해자는 나쁜 사람이니까,

피해자 편에 선다는 건 좋은 사람이 된다는 기대  말이다.

잔뜩 구겨진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는다.     


잘 모르겠지만, 내가 고장난 지점이 여기 어디가 아닐까 싶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별명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가 왜 중요한지 설명한다.

그것이 좋은 이웃을 불러 모으는데 유리하때문이다.

한편, 정치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또 다른 별명은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에 너무 연연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정치적 계산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지라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 나는,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 경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목적도, 상대방도 모르는 묻지마 인정 투쟁이 고장의 원인 아닐까.      


이런 무의식적 인정 투쟁은 나로 하여금 피해자의 고통에 최대한 감정이입 하도록 만들었다. 나뿐만이 아니다. 정인이의 억울한 혼령이 빙의됐다며 유튜브 방송을 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언론을 보면서, 우리 주변에 아직도 좋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착각을 나는 덤으로 챙겼는지도 모른다.     


검색 몇 번이면, 정인이가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죽었을 당시 흘린 피의 양이 얼마인지, 다친 장기와 부러진 갈비뼈의 상태가 어떠했는지, 가해자인 양부모가 무슨 짓을 얼마 동안 어떻게 했는지, 마치 그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다.


이런 세상이 나를 아무 생각없이 그저 피해자 편을 들어야만 한다고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새 나는 정인이가 되어 울고 있다.

가해자 재판정에 찾아간 800여 명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피해자 편은 금세 다수가 되어 “내가 정인이 엄마 아빠다”라는 피켓을 든다. 나도 그랬다.


우린 이런 피해자 경험이 많다. 

우리 사회는 지금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부모와 자식을 고통스럽게 잃어가고 있다. 한두 명이 아니다. 세월호 사건은 304명이었다. 작년 7월 사회적 참사 특별위는 가습기 살균제 관련 사망자 수를 1만 4,000명 안팎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유해 화학물질 누출이나 물류창고 화재, 그 불을 끄기 위해 목숨을 바친 소방관, 만취 운전자에 의해 희생된 분들까지 합치면 우리 곁에서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고통스럽게 생명을 잃어간 영혼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나는 돌아가신 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들으면서

인심 좋은 사람처럼 함께 울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많이 울었는데 바뀐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얼마 전, 가습기 살균제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 무죄 사유였다. 법원 앞에서 피해자 중 한 분은 “아픈 내 몸이 증거다”라는 피켓을 들고 울었다. 이처럼 인과관계를 입증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중대재해처벌법 발의안 중에는 인과관계를 추정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나 논의 과정에서 삭제된 채 최종 통과되었다. 어려운 입증책임은 다시 피해자에게 돌아갔다.


이제 내가 느꼈던 죄책감의 실체를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지금 피해자 편에 서는 윤리적 본능을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문제 삼는 것은 피해자 편이 되어 좋은 사람으로 만족하고 너무 빨리 잊어버리는 먹튀 습관이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피해자를 한없이 동정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며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지만, 피해자 편에 선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고 여겼다.     


마음 독하게 먹고, 나는 나를 가해자로 규정한다.

내가 정인이 사건의 가해자라고 생각하니, 모래를 한 주먹 퍼먹은 것 같다.

그래도 뱉지 말아야 한다고 꾸욱 참는다.


내가 가해자로서 반성하는 이유는 하나다.

피해자 편에 선 것으로 그치는 먹튀 좋은 사람은 그만하자.

그것 역시 반복되면 가해자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가해자는 나쁜 사람이다.

나쁜 짓을 했으면 벌을 받고 자신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사람이다. 그런 나라가 사람 사는 나라다.


무지한 나와 달리, 천재 작가로 불리는 에밀 시오랑의 말로 반성문을 마치고자 한다.


삶의 비극을 무시한 자, 유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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