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변신-벌레로 변하기 전에 나에게 묻다

by life barista

회사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그 책, 『변신』



나는 자고 일어나면 오른쪽 어깨가 단단히 뭉쳐있다. 그레고르처럼 늘 오른쪽으로 누워 자는 습관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쇠똥구리로 변해 있다. ‘그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그리고 반원같이 둥근 등을 가졌다. ‘지금 같은 몸을 해가지고는 그런 자세를 취할 수가’ 없다.


그레고르는 벌레로 변했지만 회사와 밥벌이에 대한 노여움은 여전하다. 아마도 그는 지금 자기 모습이 벌레로 변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회사 생활이 너무 고단해서 생긴 망상 정도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생각했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 날이면 날마다 여행 중이라니. (중략) 기차의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나쁜 식사, 자꾸 바뀌는 바람에 결코 지속되지도, 결코 정들지도 못하는 인간관계 등. 마귀나 와서 다 쓸어가라지!」’ 그는 회사원들이 멍청해지는 이유를 잠을 잘 자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니까」 그는 생각했다. 「사람이 아주 멍청해지지.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해.」’


모든 걸 다 잊고 그는 출근을 준비한다. 벌레로 변한 자기 처지를 잊은 모양이다. ‘「우선은 일어나야겠다. 타야 할 기차가 다섯 시에 떠나니까」’ 그러나 ‘기차 시간에 댄다 하더라도 사장의 호된 꾸지람은 면할 수가 없다.’ 오늘 지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럴듯한 이유가 뭐 없을까. ‘몸이 아프다고 하면 어떨까?’ 그도 영락없는 보통 사람이다. 하지만 이 핑곗거리는 통하지 않을 예정이다. 왜냐하면 ‘그레고르는 5년 동안 일해 오면서 한 번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벌레로 변한 건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이제 말을 할 때마다 ‘억누를 길 없는 고통스러운 찍찍하는 소리가 섞여서’ 나온다. 괜찮다. ‘목소리가 변한 것은 심한 감기, 외판사원의 직업병의 전조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눈곱만큼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람이 벌레로 변신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럴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러나 그는 침대에서 몸조차 일으킬 수 없었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팔과 손이 필요할 텐데 그에게는 그 대신, 끊임없이 가지각색으로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그가 제어할 수도 없는 수많은 작은 다리가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침대에서 풀려날 가망이 지극히 미미하다.’ 그러나 그는 ‘절망적인 결심보다는 침착하고도 지극히 침착한 숙고가 훨씬 더 낫다는 점을 스스로에게 중간중간에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다음에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일곱 시 십오 분이 되기 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침대를 완전히 떠나야 한다. 여하간 그때까지는 일어나야지 그렇지 않으면 매장에서 내가 어찌 된 셈인지 물어보러 누구든 오겠지, 매장이 일곱 시 전에 여니까.」’


그레고르의 예상은 적중했다. 회사에서 누군가 집으로 찾아온 것이다. 그것도 ‘지배인 본인이었다.’ 참으로 야박한 노릇이다. ‘어찌하여 그레고르만은 조금 지각 만해도 형편없이 큰 혐의를 받는 회사에 고용되어 일하도록 그 운명이 정해졌단 말인가?’


그레고르는 다소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지배인에게도 언젠가 자신이 오늘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까?’ ‘장사꾼들은 약간 몸이 불편한 것쯤은 장사를 생각해서 매우 빈번히 그냥 참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배인도 어느 날 아침 벌레로 변할 수 있을까? ‘(요즘이) 장사가 썩 잘되지 않는 철이기는 하지, 그 점은 우리도 인정하지. 그러나 장사가 안 되는 철이라는 건 도무지 있지도 않거니와, 잠자군, 있어서도 안 된단 말 이세.’라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지껄이는 지배인도 아무도 예상치 못한 어떤 날, 지금 나처럼 벌레가 되는 건 아닐까? 카프카는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은 사실 시인해야 했다.’라고 썼다. 왜 그는 그런 사실을 시인해야 했을까?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실존주의 문학이란 인간 역시 다른 존재들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존재해야만 하는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도 벌레와 다를 바 없다. 아무런 이유 없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고자 한다. 그것도 다른 존재와는 다르게 살고자 한다.


인간은 늘 나와 삶에 대해 질문한다. 옳은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을 찾아 헤맨다. 옳지 않고, 좋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삶은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그런 삶을 살아선 안 된다고 서로를 격려하고 교육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진선미(眞善美)는 없다. 이런 건 인간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속임수 일지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태어나, 진선미를 꿈꾸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허무하고 부조리하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실존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의 무근거 성과 부조리성 그리고 불안을 주된 문제의식으로 삼는다.


카프카가 실존주의 문학을 하게 된 데에는 그의 성장배경이 한몫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는 오스트리아ㆍ헝가리 제국 보헤미아 지역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 지역은 여러 민족과 언어가 뒤섞여 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과 전쟁이 있어온 분쟁지역이다. 이곳에서 카프카는 독일어를 쓰는 유대인으로 자랐다. 불안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 언어와 민족의 불일치는 그가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혼란을 주었을 가능성이 컸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벌레로 변신시키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변신』을 읽었을 때 든 첫 번째 생각이다. 수많은 존재들 중에 왜 하필 벌레일까? 가족들을 위해 성실하고 소박하게 살아온 착하디 착한 우리 그레고르를 왜 벌레의 몸으로 변신시켰을까? 벌레의 등과 다리를 하고서도 회사에 지각할까 봐 걱정하는 천상 회사원인 우리 그레고르는 왜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었을까? 카프카가 나를 벌레처럼 보는 것 같아 많이 언짢았다.


하지만 인간을 벌레에 비유한 건 카프카뿐만이 아니다.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인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나는 신들을 닮지 않았다! 벌레와 닮았다. 어디서나 인간들은 고통을 겪는다는 것, 어쩌다 하나쯤 재수 놓은 놈이 존재했다는 것, (중략) 그걸 알려고 수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벌레를 생각해 봤다. 내가 아는 벌레 중 가장 악질은 바퀴벌레다. 내가 바퀴벌레를 가장 악질로 치는 이유는 아내 때문이다. 아내는 바퀴벌레라는 소리만 들어도 혼수상태가 된다. 바퀴벌레가 최고 악질인 까닭은 바퀴벌레 때문이 아닌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정한 것이다.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바퀴벌레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된다.


바퀴벌레에게 이 상황을 알려주자. 그들은 뭐라고 할까? 단박에 이렇게 묻지 않을까?



“네가 뭔데? 인간이 뭔데? 나랑 뭐가 다른데?”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인간은 벌레와 뭐가 다른가?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바퀴벌레를 그토록 처참하게 학살하는가? 인간은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 적어도 바퀴벌레 앞에선 자랑할 일이 아니다. 우린 아직도 바퀴벌레를 전멸시키지 못하고 있다. 생존에 관한 한 바퀴벌레가 더 뛰어난 건 아닐까. 인간은 언어를 사용한다? 바퀴벌레도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이나 더듬이를 통해 적절하게 의사소통한다.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민주적으로 살아간다?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학 호세 할로이 박사팀은 바퀴벌레가 살아가기 위해 사회성을 갖고 행동하며 협력과 경쟁을 한다는 연구결과를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바 있다. 사람은 불을 사용한다? 바퀴벌레는 생존하는데 불 따윈 필요 없다. 질긴 생명력으로는 지구 최강이다. 3억 5천만 년 이상 진화하면서 오늘날까지 버텨왔다.


까놓고 말해서 우리가 바퀴벌레를 죽일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다. 우리가 바퀴벌레보다 힘이 더 세기 때문이다. 이 논리를 그대로 우리 삶에 적용해보자. 힘센 사람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 지옥이 따로 없다.


이제 다시 카프카의 문제의식을 생각해보자.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카프카는 인간을 벌레로 변신시켰을 때 벌어지는 사건들을 상상했다. 그는 그 와중에 혹시 인간다움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기대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무엇이 되었다’라고 말할 때, 그 판단은 오로지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만 결정되는 것일까? 자전거를 개조해 자동차처럼 모양을 고쳤지만, 더 이상 달릴 수 없다면 자동차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책상을 의자로 고쳤지만 아무도 앉을 수 없다면, 의자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자동차는 운전자가 원하는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의자는 사람이 편히 앉기 위한 목적이 있다. 그렇다. 무엇이 되었다고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왜 존재하는지, 그 존재 목적을 따져 판단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존재 목적을 갖는가? 벌레는 어떤 존재 목적을 갖는가? 소설 『변신』에서 이 질문은 중요하다. 만약 인간에게서 어떠한 존재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인간이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벌레에게서 어떠한 존재 목적도 발견할 수 없다면, 벌레로 변했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단지 외형만 바꿨을 뿐, 존재 목적 없는 어떤 것이 존재 목적 없는 어떤 것이 된 것뿐이다. 이 부분은 가정부가 그레고르의 최후를 가리키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니까 말씀입니다. 옆방의 저 물건을 어떻게 치워버려야 할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놓으시라 이겁니다. 벌써 다 해결됐으니까요.”



인간 모습에서 벌레 모습으로 바뀌고 나서야 우리는 질문한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다움은 몸의 형태로 결정되는가? 아니면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 목적이 있는가? 그러한 존재 목적이 없다면, 우리가 벌레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출근길, 아무런 목적 없이 지각을 면하기 위해 달리고, 지옥철에 끼여 있는 나 그리고 수많은 이웃들에게, 카프카는 변신을 통해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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