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소크라테스의 변명-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by life barista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뽑아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말은 없냐는 면접관 말에, 내가 뒤질세라 우렁차게 했던 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열심히 일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지금 돌아보니 그게 문제였다. 묻고, 따지면서 생각의 고삐를 놔선 안 되는 일이었다.


모든 일은 사회성을 갖는다. 사회성이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탓에 내가 어떻게 일을 이해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일과 연결된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갑질이라고 불리는 거칠고 사나운 일 처리 방식이 마음을 얼마나 해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회사마다 정관이 있다. 보통 정관 제2조는 이렇게 되어 있다.


“이 회사는 다음의 사업을 영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음의 사업은 당연히 사회적으로 인정된 사업이다. 회사를 설립할 때 무기나 마약 판매, 인신매매, 장기밀매, 범죄조직 결성 등을 목적으로 할 순 없는 일이거니와, 그런 사업을 하겠다는 회사를 나라에서 허가해 줄 리도 없다. 나는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해선 안 되고, 정관 제2조를 통해 사회와 약속한 일을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회사는 바로 이 목적 사업을 할 때만 법적으로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는 점이다. 회사 등 ‘법인’이란 개념은 어떤 조직과 단체를 특정한 경우에만 마치 사람처럼 살아있는 것으로 대우해주겠다는 약속말이다. 회사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조직과 단체가 법인으로 살아있는 경우는 오직 이러한 목적 사업을 할 때뿐이다. 목적 사업 이외의 일을 하거나, 목적 사업을 하더라도 불법적으로 하는 경우에는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꼴이 되어, 등골 오싹한 일이 벌어지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무시무시한 상황을 뉴스에서 거의 매일 본다. 그렇다. 목적 외의 일을 하는 회사는 시체가 산 것처럼 움직이는 존재와 같다. 그러한 존재를 옛날에는 귀신이라고 했고 요즘에는 좀비라고 한다.



신속, 정확, 친절


이건 잘 보이는 쪽 벽에 여기저기 붙어 있던 우리 회사 사훈(社訓)이다. 우리 아이들이 ‘스님 글씨’라고 부르는 궁서체로 잘 써 놓은 사훈을 보면서 동기들끼리 “우리 회사 사훈은 꼭 중화반점 같다”며 낄낄대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신입 사원 시절, 우리가 하는 일과 저 사훈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설명하기란 너무 어려웠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훈이 어떤 의미인지, 왜 필요한지 말해주는 선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사훈은 창립기념일 회장님 말씀을 통해 잠깐 깨어났다가 숲 속의 공주처럼 다시 잠들었다.


사훈과 앞서 말한 정관 제2조의 목적 사업을 연결시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사훈은 사원이 지켜야 할 회사의 방침이다. 우리 회사는 왜 신속, 정확, 친절이라는 방침을 정해 곳곳에 붙여 놓았을까? 바로 정관 2조에서 이 사회와 약속한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이다. 사훈에는 그 회사에게 맡겨진 사회적 임무나 의미 또는 그것을 실천하는데 필요한 역량이나 태도가 담겨 있다. 우리 회사는 협회였는데, 협회라는 속성상 회비를 낸 회원들에게 필요한 의견과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전달하자는 의미로 저 사훈이 정해진 것이다.


사훈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회사의 미션(Mission) 수립과 비전(Vision) 설정이 생각난다. 정관이나 사훈이 없는 회사는 없을 터인데, 왜 그 많은 회사들이 미션과 비전을 몽땅 다시 만들고자 했을까? 조직문화 컨설턴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션과 비전을 통해 회사의 목적을 좀 더 전략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학창 시절에는 도무지 들을 수 없었지만, 직장 생활하면서 거의 매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가 ‘전략’이라는 말이다. 나는 바로 이 ‘전략’이란 말 때문에 현재 기업에서 행해지고 있는 미션과 비전 활동들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전략’이라고 쓰고 ‘겉과 속이 다르다’고 읽는다


전략이란 말을 따져보자. 한자로는 ‘戰略’ 이렇게 쓰는데, 그 뜻은 간명하다. 전쟁에 쓰이는 방법이나 책략이다. 전쟁은 국가 간에 벌어지는 무력을 사용한 싸움을 말한다. 막대한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 패전한 국가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 패전국의 국민들은 포로가 되거나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난민이 된다. 따라서 전략은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이기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번에는 전략을 영어로 생각해보자. 전략은 영어로 스트레터지(Strategy)라고 쓴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전달하다’를 의미하는 말(stere-)과 지도자를 의미하는 말(ag-)이 합쳐진 것이다. 지도자란 어떤 조직이나 단체의 우두머리를 뜻한다. 따라서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전략이라는 말을 어떤 조직의 우두머리가 가진 생각이 그 조직에 전달되는 과정이나 방법을 의미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한 조직을 잘 이끌고 싶은 리더라면, 당연히 그 조직을 처음 만들었을 때 의도했던 목표와 명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사, M&A, 신사업 진출 등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마다, 이것들이 회사의 목표와 명분과 잘 맞는지 고민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 단지 자기 이익이나 감정에만 매몰된 짓을 했다간 조직 구성원들의 불만과 저항을 불러올 것이 뻔하다. 그러나 자신이 놓인 현재 상황을 전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물불 안 가리고 조직과 그 구성원들의 생존부터 제일 먼저 챙겨야 한다고 생각이 힘을 얻게 된다.


여기서 모순적 상황이 발생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회사는 사회와 약속한 의미 있는 일을 하겠다고 만들어진 것이 법인이다. 그런데 이 회사가 지금 전쟁 상황에 있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일단 치열한 전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그 회사가 가진 존재 의미를 제대로 살리는 것이 중요할까? 두 가지 모두 잡을 수 없다면, 무엇을 먼저 잡아야 할까? 이 질문이 당황스럽다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조직이 사회와 약속한 그 의미 있는 일이란 결국 단순히 내가 먹고살기 위해 내 건 허울 좋은 명분에 불과한가, 아니면 내가 죽더라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를 지녔는가?


전략이란 말은 생존을 최우선 가치로 만들어 버린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판에 의미와 가치 타령만 하고 있냐고 누군가 호통치는 순간, 생존 본능이 모두를 사로잡는다. 다른 말은 꺼낼 엄두조차 못 낸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러한 호통에 찍소리도 못했을까? 아마도 여기엔 내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으며, 내가 죽으면 다 꽝이라는 삶의 철학이 깔려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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