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해브. 그는 모비딕을 잡는 피쿼드호의 선장이다. 박대표는 이제 소설에 등장하는 이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에이해브는 성경에 등장하는 악한 왕, ‘아합’을 영어식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다.
아합이라고? 아합은 하나님 말 안 듣고 우상을 숭배한 나쁜 왕인데? 모비딕이 잘못된 기득권의 상징이라면 그걸 잡고자 목숨을 건 선장은 훌륭한 사람 아닌가? 그런데 훌륭한 사람의 이름이 왜 아합이지? 박대표는 다시 한번 이름의 의미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어쩌면 작가는 인물들의 이름을 상식과는 반대로 사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짓된 기득권에게 허울 좋은 명분을 주고 있는 건 ‘전지전능한 신’이다. 그러나 실상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꾸며낸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러한 신은 없다고, 거짓이라고, 우리가 속은 거라고 외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신은 있다, 신은 진리이다, 신은 전지전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은 악마와 다름없다. 기득권의 홍보용 멘트에 속고 있는 사람들에게 실상을 용기 있게 밝히는 자들은 아합과 같은 악인일 뿐이다.
박대표는 플라톤이 말한 동굴의 비유가 생각났다. 동굴에 갇혀 살다가 바깥 세상의 실상을 본 그 사람의 비극적 최후가 떠올랐다. 그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시 동굴로 돌아온다. 그러나 평생 동굴에서만 살던 사람들은 그를 죽인다.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내가 믿고 있는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 또한 사람이다.
“섬뜩할 만큼 무서운 이 바다가 푸른 초목이 무성한 육지를 둘러싸고 있듯이, 인간의 영혼 속에는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외딴 섬 타히티가 있고, 더구나 그 섬은 절반밖에 알려지지 않은 삶의 공포로 둘러싸여 있다. 신이 그대를 지켜주시기를! 절대로 그 섬에서 떠나지 말라! 일단 떠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테니!”
누구나 ‘나는 여기 확실히 존재한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환상의 섬에서 평화와 기쁨으로 살길 원한다. 그러나 에이해브처럼 자기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공포를 준 무언가와 만난 사람은 더 이상 이런 생활을 할 수 없다. 에이해브는 모비딕과 만난 첫 번째 싸움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 자기 다리를 고래 배 속에 남겨둔 채, 에이해브는 돌아왔다. 돌아오는 내내, 그는 불같은 복수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모비딕이 바다 속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이를 덜덜 떨었다.
그러나 에이해브는 거짓된 환상의 섬을 떠났다. 삶의 밑바닥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언가를, 복수의 대상이자 공포의 원인을, 꼭 자기 손으로 잡고자 떠났다. 그것을 죽이기 전까지 나는 나일 수 없는 것이다. 나를 그림자로 만들고 있는 거짓 빛의 정체를 향해 그는 자신만의 작살을 반드시 던져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에이해브는 모비딕을 잡기 위해 거의 미쳐 있다. 그의 광기는 향유고래를 잡아 돈을 많이 벌겠다는 목적을 훌쩍 뛰어넘는다.
"흰고래에게 모든 악의 근원을 돌려, 미친 듯이 날뛰며 불구의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에 덤벼들었다. 사람을 가장 미치게 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 가라앉은 앙금을 휘젓는 모든 것, 악의를 내포하고 있는 모든 진실, 체력을 떨어뜨리고 뇌를 굳게 하는 모든 것, 생명과 사상에 작용하는 모든 악마성, 이 모든 악이 미쳐버린 에이해브에게는 모비 딕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고, 그리하여 실제로 공격할 수 있는 상대가 되었다. (…) 흰 고래는 도대체 그들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그들의 무의식적인 인식 속에서 흰 고래는 인생의 바다를 헤엄치는 거대한 악마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속고 있는 자들의 눈에는 거룩한 흰 고래를 죽이려는 에이해브가 악인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악인의 눈엔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선한 얼굴의, 천사같이 하얀 색깔의 고래가 악마처럼 보인다. 에이해브는 자신을 악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미친 사람이라고 인정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남들처럼 편히 살다 죽으면 되는 인생을 왜 이렇게 힘들게 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