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내가 해야 하죠!”
회사 최초 여성 유학파. 그것도 미국 명문 하버드대 MBA. 그녀는 울고 있었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그녀는 감정에 휩싸이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깨물린 눈물들은 속에서 죽어갔다. 매섭게 쥔 작은 두 주먹만이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중심을 간신히 잡았다. 죽은 눈물로 목을 축이자 이성이 날카롭게 눈을 떴다. 이제 따질 차례다.
“인턴 3개월이야 회사 업무를 전반적으로 알아야 하니까, 백번 양보해서 제가 했어요. 하지만 이젠 저도 정식 직원입니다. 엄연히 제 담당 업무가 있구요. 사실 신문을 각팀에 전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그동안 쭉 고졸 직원들이 했던거구요. 그런데 유학까지 다녀온 제가, 경영학 석사인 제가, 단지 여자 직원 중 막내라는 이유로 이 일을 전담하라는 게 말이 되나요? 그 시간에 좀 더 전문적인 일을 하는 것이 우리 회사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좋은 일 아닌가요? 능력에 맞는 일을 하는 것이 공평하지 않나요? 왜 내가 그런 잡무를 해야 하죠? 제가 고졸인가요?”
마지막 말이 김과장의 심장을 쥐어짰다. 김과장은 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왔다. 당시 최고 명문 여상이었다.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혼자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 엄마를 생각하면 고등학교 졸업도 감지덕지. 대학의 ‘대’자도 입 밖에 내지 못했다. 학교 선배들은 어렵지 않게 은행에 취업했다. 김과장은 은행보다 오래 안정적으로 다닐 수 있는 직장을 택했다. 월급도 복지도 좋은 편에 속했다. 문제는 학력에 따라 차별을 두는 보수규정과 조직문화였다. 고졸직원이라는 꼬리표는 입사 18년이 지난 지금도 따라 다닌다.
이제 자신처럼 여상을 졸업한 신입직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갈수록 대졸 직원들과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났다. 보수와 진급에서 대졸 직원들에게 자꾸 뒤졌다. 대졸 남자직원보다 덜 받고 늦게 승진하는 건 군대생활을 경력기간으로 보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은 많았지만 꾹 참았다. 다 좋다. 그렇다면 자기보다 입사가 늦은 대졸 여자 후배들보다 보수가 적은 건 무엇 때문인가? 입사 18년 동안 김과장은 누구보다 성실히 일을 해오지 않았던가? 아파도 꾹 참고 죽어도 회사에서 죽겠다며 출근했다. 게다가 성과평가도 좋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신문 파동이 난 이후 어느 날, 총무팀장이 김과장을 조용히 불렀다. 임원실 신문 배달을 대신해 줄 수 없냐는 것이 요지였다. 김과장은 어이가 없었다. 여자 후배들이 퇴사할 때마다, 자신이 대신했던 일은 신문 배달뿐이 아니었다. 책상 청소, 다류대 정리, 화분 관리 등 소위 막내가 해야 할 사소한 일들이 뚝 하면 김과장에게 떨어졌다. 그때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고졸직원이 이제 김과장 한명이야.
학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 오랜 시간 혼자 끙끙대며 앓던 답을 총무팀장에게 들은 셈이다. 이제 고졸 직원은 나 하나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조직이 알아줄 거라 믿고 묵묵히 일만 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조직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단지 내 뒤에서 쉬쉬 하고 있었을 뿐이다.
김과장은 서러웠다. 하버드 MBA 출신의 분노에 찬 눈빛이 머리에 가득 찼다. 자신은 표현하지 못한 부당함을 그녀는 온몸으로 드러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부당함! 불공정! 그것이라면 김과장도 지금껏 느껴온 바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동안 어떻게 이런 차별과 부당함을 참을 수 있었을까? ‘사회라는 게 원래 그렇다’, ‘억울하면 출세해라’, ‘지금이라도 대학에 가면 되지 않냐’ 등등 자동차 경적 같은 목소리들이 빵빵거렸다.
그 목소리들이 의미하는 한결같은 주장은 ‘우리 사회는 모두에게 공평한 교육 기회를 주고 있다’, 따라서 ‘학력에 따른 차별은 정당하다’, 따라서 ‘사회가 요구하는 학력을 갖춘 사람들은 그에 맞는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따라서 ‘그 경쟁에서 뒤진 나는 그들의 권리만큼 자신의 것을 잃게 된다’, 따라서 ‘이제라도 그걸 만회하라. 게임은 공정하다’는 것이었다. ‘따라서’는 영원히 계속될 기세였다.
‘그건 아니야! 뭔가 이상해!’
김과장이 머리를 흔들며 애써 이 목소리들과 싸우고 있을 때, 문자메시지 진동이 울렸다.
이번 달 학원 수강료가 결제되었다는 내용이다. 김과장은 잊었던 열정에 몸이 뜨거워졌다. 내 딸만은 꼭 대학에 보내야겠다고, 이왕이면 명문대에 보내야겠다고, 유학도 보내야겠다고, 적어도 내 딸만은 고졸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도록 내가 힘껏 돕겠다는 열정.
김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여 마셨다. 이미 숱하게 마셨던 이 치열하고 뜨거운 공기를 마치 처음 맛보는 것처럼 지긋히 눈을 감고 음미했다.
중앙일보 기사에서 발췌
능력주의! 김과장 역시 이 말이 마음에 들었다.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것에 대해선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다만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취급을 받는 현실이 못마땅할 뿐이다. 그래서 자신의 딸만은 공정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정정당당하게 승리하길 바랐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워도 학원비를 가장 먼저 결제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김과장 자신도 여기서 주저앉을 순 없다. 그동안 해왔던 자기개발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딸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마음 먹은 김에 모처럼 책을 한 권 사야겠다고 느낀 김과장은 온라인 서점 앱을 눌렀다. 휴대폰 액정을 잽싸게 훑던 시선이 이상한 책제목에 꽂혔다.
『공정하다는 착각』
‘능력주의는 모두에게 같은 기회를 제공하는가’라는 부제목에 김과장은 몸을 일으켰다. 책 광고를 보던 김과장은 지은이가 마이클 샌델이고,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유명한 책을 쓴 하버드대 교수라는 걸 알았다. 그 잘난 하버드대, 하버드하면 공부벌레들 아니던가. 김과장은 이 책을 바로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