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파이어족의 비극

by life barista

파이어족


양대리는 파이어족이다. 파이어(fire)? 아하, 해고되었단 뜻이군! 젊은 사람이 안 됐네. 요즘 세상에 왠만해선 해고되기 쉽지 않은데, 성격이 보통 아닌가 봐? 이렇게 생각했다면 빨리 구글 신을 찾아뵙길 바란다. 구글 신이 가라사대 파이어족이란, 경제적 자립을 통해 빠른 시기에 은퇴하려는 사람들을 뜻한단다. 그럼 왜 하필 파이어(FIRE)냐? ‘경제적 자립, 조기 퇴직'(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의 첫 글자를 따서 그렇단다. 해몽을 붙이자면, 파이어족은 무의미하고 타락한 일터에서 자기를 빨리 해고하기 위해 불같이 진격하는 종족을 말한다. 이렇게 놓고 보니, 말을 찰지게 잘 만들었구나 싶다.


파이어족 설명.JPG


양대리는 지금 32살이다. 39세 조기 은퇴를 목표로 29살에 시작해 3년 넘게 착실하게 실천 중이다. 양대리도 처음부터 파이어족을 꿈꿨던 건 아니었다. 평생 직장까진 아니라도, 회사에 그럭저럭 적응해 오래 다니고 싶었다. 그런 그를 파이어족으로 만든 양대 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신입사원 교육 때 예수님과 부처님 그리고 공자님 말씀을 섞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바른 경영을 소리 높여 웅변하셨던 대표이사가 분식회계로 법정구속된 사건이었다. 그때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저분을 평생 멘토로 삼아 충성해야겠다고 다짐했던 일은 양대리의 순진무구함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로 전락해버렸다.


다른 하나는, 가장 존경했던 선배가 억울하게 퇴사한 사건이었다. 교육을 준비하던 선배는 떨어진 천장 마감재 때문에 어깨를 심하게 다쳤다. 회사의 회유로 산업재해 신청을 하지 않았던 선배는 실비라는 명목으로 턱없이 모자란 병원비 일부만 받았다. 선배는 지금까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어느 날, 정치권 입김으로 낙하산 본부장이 왔다. 그는 소위 학연 경영을 했다. S대 경영학과 아니면 승진할 수 없단 소문이 자자했다. 선배는 S대가 아니었다. 높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승진에서 미끄러진 선배가 그 이유를 따졌다. 돌아온 답변은 마치 홈런 타자처럼 선배의 뒤통수를 때렸다.


"당신은 어깨 후유증 때문에 팀장 업무를 성실하게 볼 수 없잖아, 안 그래?"


구글처럼 승진하고 싶은 사람이 손드는 제도가 있었다면 제일 먼저 팀장이 돼서 팀원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었던, 업무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어느 한구석 흠잡을 곳 없던 선배였다. 그런 선배가 결국 쓸쓸하게 조기 퇴직을 선택했다. 송별회를 겸한 회식이 국민의례처럼 끝난 후, 선배는 양대리를 따로 불렀다. 선배로서 차마 못할 말이라면서, 선배는 회사 마지막 날의 첫 마디이자 마지막 말을 뗐다.



조직에 충성하지 마. 네 인생에 충성해.


그날 이후 양대리는 파이어족의 문신을 심장 깊숙한 곳에 새겼다. 문신의 내용은 ’내 인생에 충성하자!‘ 표면적으론 선배가 저렇게 나갈 정도면, 나는 뼈도 못 추리겠다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그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나를 나로서 살게 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회사 일을 거듭할수록 양대리는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이 현실처럼 느껴졌다. 찰리와 늙은 선배는 탱크처럼 큰 기계에서 일한다. 기계 작동을 두고 찰리와 옥신각신 다투던 늙은 선배는 기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머리만 간신히 밖으로 나온 상황. 선배를 꺼내기 위해 찰리는 그의 지시에 따라 레버를 당기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그러다가 ”뿌우~“ 신호가 울린다. 신호에 맞춰 그는 갑자기 어디론가 가버린다. 찰리가 그렇게 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찰리는 기계에 낀 선배와 함께 점심을 먹는다. 양대리는 기계에 낀 채 점심을 먹는 모습이 영 남의 일 같지 않다. 하루라도 빨리 회사를 나가는 것이 정답처럼 생각됐다.


모던 타임즈-기계에 낀 노동자.JPG 영화 모던타임즈 스틸컷



이제 8년 남았다. 딱 8년만 꾹 참고 은퇴 자금을 모아보자. 먹을 거 안 먹고 입을 거 안 입으면서 허리띠 졸라매면, 조기 은퇴 자금 5억을 모을 수 있다. 양대리는 이를 5억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5억 프로젝트는 3N3Y 전략으로 요약된다.


3N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세 가지로 연애, 자동차 구입, 음주다. 이 세 가지는 돈 먹는 하마다. 연애는 돈과 시간 그리고 삶의 에너지까지 빡빡 긁어 넣어야 한다. 생일, 만난 지 100일 등등 쓸데없는 기념일 외에도 영화, 외식, 추억만들기에는 돈이 계속 들어간다. 어디 돈뿐인가? 사랑은 시간 또한 얼마나 잡아먹던가? 투자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데, 여자 비위 맞춰가며 어디 갈까, 뭘 먹을까 노닥거릴 시간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양대리는 5억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1000일을 채웠던 여자친구와 전격 헤어졌다. 그동안 연애에 들어간 돈이 1,845만 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자동차를 굴리는 건 사람이 아니었다. 돈이었다. 주유비는 애교다. 취등록세, 보험료, 주차비, 사고처리비, 기타 유지비 등등 자동차는 돈을 즈려 밟고 달렸다. 투자를 하려면 종잣돈이 필수인데, 자동차는 몇 년 모은 목돈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양대리는 자동차야말로 조기은퇴에 가장 큰 적이라고 생각했다. 타던 차를 팔아 투자자금에 보탰다.


술은 백해무익하다. 돈과 시간, 게다가 건강까지 해치는 몹쓸 놈이다. 설상가상으로 양대리는 오늘은 내가 쏜다를 외치는 주사가 있다. 친구들은 그 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다음 날, 술김에 한 말이라며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팔릴 쪽도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다. 술이 양대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위험은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게 만든다는 것이다. 보통 기분이 안 좋을 때 술을 찾고, 그러면 폭음을 하곤 했다. 폭음은 양대리로 하여금 길거리에서 편히 자도록 했는데, 그 결과는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머리를 심하게 다쳐 응급실에서 십여 바늘을 꿰맨 적도 있었다. 양대리는 이대로 살다간 회사가 아니라 인생 자체를 조기 은퇴할 것 같아 술을 끊었다.


3Y는 꼭 해야 할 것 세 가지로, 정기적금, 주식투자, 부동산투자다. 불혹의 나이 사십엔 그 이름에 걸맞게 세상에 흔들리지 않고 좋아하는 일만 골라 할 수 있는 청산에 살리라! 투자를 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역시 돈이다. 돈을 모으기 위해서 가장 쉬운 방법은 비용부터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양대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독립해 따로 살면 숨만 쉬고 눈만 깜빡거렸는데도 청구서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 경제적으로 좋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월세 60만 원을 아낄 수 있다. 부모님께 생활비로 30만 원을 드려도 30만 원이 남는다. 이 돈을 1년 모으면 360만 원이고, 39살까지 계속하면 원금만 2,880만원이다! 게다가 전세금 5천만 원으로는 지켜보던 알짜 종목에 투자할 수 있다. 급할 때 아버지 자동차도 쓸 수 있고, 부모님 잔소리 덕분에 하게 되는 타율적 바른 생활은 덤이다. 부모님께서는 5억 프로젝트와 3N3Y 전략을 무표정하게 들으셨다. 그러곤 대견함 반, 안타까움 반으로 양대리를 거두어 주셨다.


씨드머니.JPG



오늘도 하한가를 맞았다.


3일째다. 57,000원짜리 주식이 19,550원이 되었다. 코로나 임상 성공이 눈앞이라는 친구 말에 차 판 돈과 전세금을 모두 투자한 것이 화근이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투자의 ABC도 지키지 않았던 것이다. 장밋빛 투자 결과만 보고 군침만 흘렸다. 욕심에 눈이 먼 뇌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며 활짝 웃었다. 확 앞당겨진 조기 은퇴에 뭘 할지나 걱정하라고 했다. 보란 듯 사표를 던지고 멋지게 손 하트를 날리며 회사를 나올 생각을 하니 머리까지 전율이 일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절망과 공포로 발끝까지 벌벌 떨었다. 수익률 마이너스 65.7%. 투자 원금은 3분의 1로 토막 났고, 양대리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투자카페를 뒤졌다. 이런저런 소문이 무성했다. 소문에 따라 욕망이 다시 일어나나 싶더니, 또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풀썩 주저앉았다. 답답했다. 아무리 읽어도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래프가 요란할수록 마음은 더 시끄러워졌다. 그러다가 아주 예전에 쓰인 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주식 고수의 뼈 때리는 한 마디, 경제학의 기본도 모르면서 주식 투자한다고?'


글쓴이는 15년 동안 주식투자를 했단다. 경제학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소문과 자신의 실패 경험에서 얻은 직관에 따라 투자해왔단다. 산전수전 모두 겪고 난 뒤 얻은 결론은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평범하다 못해 식상한 원칙이었다고 한다. 그럼 기본이 뭐냐? 먼저 주식시장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경제 환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안정적인 투자를 하려면 매일 바뀌는 경제 변수들을 가지런하게 읽어내는 침착한 눈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에게 그 눈은 바로 경제학이었다. 주식고수는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는 두껍고 어려운 경제학 교과서는 추천하지 않았다. 잘 읽히고 이해하기 쉬운 베스트셀러가 오히려 투자에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밑지는 셈치고 양대리는 그가 추천한 책 중에서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를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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