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대리는 충격에 빠졌다. 주식투자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집어 든 경제학책에 경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페이지마다 외계어 닮은 수식과 화려한 그래프로 장식된 비법이 자신을 투자의 고수로 거듭나게 만들어 줄줄 알았는데, 장교수는 프롤로그에 이 책의 목적을 아래와 같이 밝혀놓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양한 경제학적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특정 경제 상황과 특정 도덕적 가치 및 정치적 목표하에서는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가장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갖출 수 있도록 경제학을 배우는 일이다.
(여기서 ’어떤 경제학적 시각이 정답인지‘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해 주기 바란다.)
괄호 안을 읽고 양 대리는 책을 던졌다. 자신은 바로 그 정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샀는데, 괄호 안에 드러난 저자의 생각은 정답 따윈 애초부터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화가 났다. 주식투자에서 잃은 돈을 만회하고자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시작한 일부터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 책을 추천했던 투자고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나는 또 속은 걸까. 양대리는 자기 귀를 잡아당겼다. 팔랑 귀를 스스로 처벌한 것이다. 귀는 빨갛게 비명을 질렀다.
양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상상 속 장하준 교수(이하 짱교수)에게 볼멘소리를 냈다. 질문하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같은 사람이었지만, 대화는 심각하고 치열했다.
양대리: 객관적이지도 않은 경제학은 그럼 도대체 뭡니까? 뭘 설명하는 거죠?
짱교수: 아주 유명한 경제학책 중 어떤 것들은 경제학이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관한 궁극적 질문을 다룬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오만불손한 태도가! 그러나 경제학은 도덕적 가치판단과도 연결되어 있고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도덕적 판단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살인은 절대 안 되지만 전쟁이나 정당방위 같은 상황에선 허용되죠. 그런데 이런 상황이란 것이 수도 없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게 인생살이 아닙니까?
정치는 또 어떻고요? 수천만 명 또는 수억 명이 사는 국가에서 거미줄처럼 서로 엮인 이해관계를 두부 썰 듯 깔끔하게 조정할 수 있을까요? 최저임금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최저임금을 아주 조금만 올리더라도 노동계와 기업계는 전쟁처럼 싸웁니다. 다음 날 아침 신문에 편의점 주인과 점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그러면 정치인들은 그때마다 양쪽을 달래기 위해 또 뭔가를 합니다. 이런 크고 작은 갈등들을 조정하고 새로운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정치죠. 그런데 그렇게 결정된 정책들은 경제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상속세, 소득세 등 세금 정책이 대표적이죠. 도덕 그리고 정치와 이렇게 딱 달라붙어 있는 경제를 도대체 어떻게 잘라내야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정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 저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양대리: 아니 교수님! 경제학은 인간의 합리적 선택에 관해 연구하는 과학 아닙니까?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고 경제학을 배우는 거잖아요?
짱교수: 그런 식으로 경제학을 설명하는 것이 소위 신고전학파죠. 이들은 현재 경제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학은 신고전학파 말고도 많은 학파와 학자들이 있습니다. 크게 크게 정리해도 학파가 9개 정도 됩니다. 이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내리는 기준이 모두 달라요. 모든 상황을 단숨에 해결하는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합니까? 우주를 단칼에 평정하는 절대반지는 없습니다.
양대리: 네. 그렇죠. 절대반지는 없죠.
장교수: 여전히 경제를 정치와 전혀 상관없는 순수한 활동으로 보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처사입니다. 역사를 모르고 자기 주장만 외치는 것은 이미 실패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고 죽이기까지 했던 실험을 또다시 하는 셈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하는 것이죠. 아직도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딱 한 번 말한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게다가 그는 보이지 않는 손을 그 이후 크게 부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애덤 스미스 시대와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자본가의 규모와 성격, 기업 구조, 노동자, 시장, 돈과 금융시스템 등등에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경제 이론도 특정 시간과 공간에서만 쓸모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경제학 이론을 그 이론이 적용되는 맥락에 맞게 이해해야 합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살펴봐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양대리: 자본주의의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군요.
장교수: 네, 그렇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죠. 오늘날 정상 국가에서 4~5세 어린 아이들의 노동을 허용하는 나라가 있나요?
양대리: 예? 4~5살요? 어린이집도 혼자 보내면 안 되는 나이죠.
장교수: 그렇죠? 하지만 애덤 스미스 시대만 해도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로빈슨 크루소』를 쓴 대니얼 디포라는 유명한 작가를 아시지요? 그는 1724년 출간한 『영국 주유기』에서 당시 면방직 산업의 중심지였던 노리치에서는 “4~5세 정도부터 아이들이 모두 자기 먹을 것을 벌 수 있다”고 감탄하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어떤 기계는 처음부터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 되었구요.
양대리는 영화 『설국열차』가 생각났다. 절대 멈춰서는 안 되는 설국열차. 그 열차를 영원히 달리게 하는 엔진. 그러나 그 엔진에는 치명적인 결점이 있었다. 엔진 찌꺼기를 계속해서 청소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걸 할 수 있는 건 몸이 작고 가냘픈 어린아이들뿐이었다. 꼬리칸에 살던 아이들을 앞칸으로 계속 불러들여야 했던 이유는 바로 엔진 청소 때문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사는 시대의 자식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시대마다 도덕적 판단이 다르다. 그 판단에 따라 법은 만들어지고 적용된다. 대니얼 디포가 감탄했던 아이들, 그 아이들만이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기계, 그 기계가 움직이면서 발전시킨 자본주의! 자본주의라는 설국열차가 달리고 달려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도덕적 판단과 정치적 결정 속에서 자본주의를 움직이고 있을까? 양대리는 씁쓸해진 기분을 잠시 접어두고, 장교수가 하는 자본주의 역사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