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왠만한 소설은 집에 가라

by life barista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자본주의 역사


장교수: 자본주의 역사를 1인당 소득 기준으로 한번 살펴볼까요. 이해를 돕기 위해 서기 1000년부터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사람 이름을 김수한무라고 하죠. 옛날 코미디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수명의 한계가 없다’는 뜻의 이름입니다.


양대리: 김수한무? 하하하. 교수님 꼰대 셀프 인증하시네요.


장교수: 그래요? 그렇다면 거북이와 두루미까진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리듬이 은근 중독성이 있어 자동 재생되는데 참겠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서기 1000년부터 1500년까지 중세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1년에 0.12% 증가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김수한무가 중세 서유럽에서 서기 1000년에 100원 벌었다면, 500년 후 그의 소득은 고작 182원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양대리: 김수한무씨 불쌍하네요. 500년 일했는데 소득은 고작 82원 늘었다니.


장교수: 그 후에도 서유럽의 1인당 소득은 거북이 속도로 성장합니다. 1500년부터 1820부터까지 약 320년 동안, 1년에 약 0.14% 정도 성장하거든요. 서기 1000년에 100원 벌었던 김수한무는 1820년 약 285원 정도 버는 셈입니다.


양대리: 820년 동안 소득이 185원 늘었네요. 3배가 채 안돼요.


장교수: 그렇죠. 그만큼 지금 잘 산다고 하는 서유럽 국가들도 경제 성장이 쉽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나마 제국주의를 통해 확장된 식민지가 없었다면 훨씬 더 어려웠을 겁니다. 그들은 식민지의 땅과 자원을 주인 허락없이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의 주인들을 몰살시키거나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 덕분에 이룬 서유럽의 성장이 그 정도 수준이었는데, 이제 소설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1820~1870년 50년 동안 1인당 소득이 매년 1% 성장한 겁니다! 1820년 약 285원이었던 김수한무의 소득이 1870년에는 약 470원이 되는 거죠!


양대리: 와! 820년 동안 늘어난 소득이 185원인데, 불과 50년 만에 184원 늘었났군요. 김수한무씨가 복권에 당첨되었나요?


장교수: 산업혁명을 복권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1820~1870년은 바로 산업혁명이 서유럽의 산업구조를 싹 바꾸기 시작한 때입니다.


양대리: 소득이 빠르게 늘었으니 김수한무씨도 빠르게 행복해졌겠네요?


장교수: 그럴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1820~1870년 당시 김수한무씨와 함께 일했던 친구들의 평균 수명은 고작 17세였습니다. 서기 1000년, 노르만 정복 당시 영국 전체의 평균 수명이 24세라고 하니까, 그들은 이보다도 30%나 줄어든 짧디짧은 삶을 살다 간 거죠. 게다가 그들은 주당 80시간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한 주 100시간 이상 일하는 경우도 흔했고, 쉬는 날은 일요일 반나절뿐이었습니다. 수많은 방직 공장 종사자들이 폐질환으로 사망했습니다. 방 하나에 15~20명이 살았고, 화장실 하나를 수백 명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습니다.


양대리: 김수한무씨는 늘어난 소득을 조의금으로 다 썼겠네요. (장교수가 인상을 잔뜩 찌그린 걸 본 후) 이야기가 너무 무거워서 그냥 웃자고 한 농담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비참한 생활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을 거 같은데요?


장교수: 네, 그렇죠. 그때부터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본격화됩니다. 마르크스도 이 무렵 태어나 자랐고, 자본론을 썼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은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현실에 적용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본가들의 저항도 격렬했죠. 하여튼 1870년경부터 노동자들의 상황이 나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쪽 힘이 너무 세지면, 역사는 중심을 그 반대쪽으로 넘긴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득세했습니다. 결국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죠. 한때 소련식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이 1~2% 성장에 그칠 때, 1928~1938년 동안 소련은 1인당 국민소득이 매년 5%씩 성장했던 것입니다. 김수한무도 러시아로 가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정치적 탄압과 1932년 기아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은 대가였습니다. 곡물을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 도시에 살던 임금노동자들을 먹였습니다. 이 곡물을 해외에 팔아서 공업화에 필요한 좋은 기계들을 수입했습니다. 그 결과 농촌에 살던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김수한무가 러시아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갑니다.


자본주의는 1929년 대공항에 빠졌습니다. 사람으로 치면 심각한 우울증에 걸린 셈이죠. 대공항의 원인과 그 해결책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선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대공항을 이겨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실시되었던 개혁 정책, 세계 제2차 대전의 발발, 전쟁 때 개발된 기술들의 상업적 성공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의 합작품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를 기반으로 자본주의는 1945~1973년 황금기를 누립니다. 1950년~1973년 사이 서유럽 1인당 소득 연간 4.1%, 미국 2.5%, 서독 5.0%, 일본 8.1%라는 경제적 기적이 일어납니다. 김수한무의 이 당시 소득도 엄청나게 늘었겠죠. 그의 1950년 소득이 100원이었다면 23년 후인 1973년에는 262원쯤 되죠. 중세시대 1인당 소득 성장율 0.12%로 이런 성장을 하려면 800년이 넘게 필요합니다. 김수한무는 800년의 소득 성장을 단 23년 만에 맛볼 수 있었던 거죠.


장교수님은 설명을 계속 이어나갔다. 자본주의 황금기 때 태어난 국제통화기금(IMF),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등도 황금기를 만드는데 일조했지만,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점을 섞은 혼합 경제 체제의 탄생이 황금기의 주요 원인이라고 했다. 이후 자본주의 황금기는 1973년 1차 오일 쇼크로 종말을 고했다. 이후 영국의 마거릿 대처, 미국의 도널드 레이건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지배했다.


사건은 계속 일어났다. 1989년 소련이 와해되기 시작했고, 1990년엔 독일이 통일되었다. 1991년 결국 소련 연방은 해체되었다. 1975년 공산화된 베트남도 1986년 개방주의로 옮겨탔다. 1995년 멕시코 금융 위기, 1998년 한국 등 아시아 금융 위기, 2000년 닷컴 버블의 붕괴,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등을 거치면서 각국의 경제전문가들은 여러 가지 해결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은 없는 상태다. 결국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중앙은행에서 새로 돈을 찍어서 시중에 풀고 있다. 이걸 멋진 말로 양적 완화 조치라고 한다. 마치 헬기에서 돈을 뿌리는 것처럼 돈을 풀었다는데, 그 돈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자본주의 황금기 말쯤이 바로 그 유명한 한강의 기적이 일어난 시기다. 양대리는 한국은행이 새 통계자료에 따라 발표했던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률에 크게 놀란 적이 있다. 2019년 12월에 발표한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1인당 명목 국민총소득(GNI)은 한국전쟁 이후 약 500배 수준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명목 국내총생산(GDP·한화 기준)은 1953년 477억 원에서 2018년 1천 893조 원으로 무려 3만 9천 665배로 증가했다. 대박이란 말로도 한참 모자란 어마어마한 성장이다.


양대리는 자본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살펴보니, 이러한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이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가지 원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결코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역사의 굴곡마다 도전과 응전이 있고, 그때마다 이를 이겨내려는 개인과 국가의 노력이 당시 상황과 잘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보자. 1971년~1977년은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정점을 지나 과도기를 넘어가던 시기였다. 이 당시 우리나라는 자본주의가 적절한 정부 개입하에서 가장 잘 돌아간다는 걸 보여줬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정부 주도 산업화 전략을 추진하고 유치산업을 보호하고 육성했던 전략이 잘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고 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우리나라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나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빛나는 영광에는 그림자도 있었다. 얼마 전 양대리는 '벌집촌 공순이'란 말을 인터넷 기사에서 처음 봤다. 공순이는 어린 나이에 가족들의 생계와 동생들의 공부를 위해 구로공단에서 일했던 여공들을 비하하는 말이고, 벌집촌은 이들이 살던 좁은 골방들이 모여있던 곳을 말한다. 구로공단은 섬유, 봉제, 전자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몰려 있었고, 여공들의 싼 노동력에 힘입어 1971년에는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1977년에는 우리나라가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했던 해였는데, 구로공단은 이 가운데 11%인 11억 달러를 수출했다고 기사는 전했다.


벌어들인 달러 뒤엔 여공들의 열악한 삶이 있었다. 여공 중에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 20%, 초등학교 중퇴자는 15%에 달했다. 대부분(51%)은 초등학교가 마지막 공교육이었다.


“12, 13살 난 시다들이 많았는데 대형 다리미를 다뤘습니다. 어리광부릴 나이에 산업체 특별학교가 끝나면 쉬지도 못하고 기숙사에서 옷 갈아입고 프레스로 카라를 고열에 넣고 빼내는 일을 했습니다. 잠깐만 졸면 손을 넣었다가 빼지 못해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는 것을 자주 봤습니다."

(프레시안, ”'벌집촌 공순이'들이 노동운동 역사를 썼다“, 2021.8.2. 기사 중에서)


양대리는 평균수명 17세, 수백 명이 쓰는 화장실을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보았다. 경제성장이라는 것이 어떤 빛과 그림자를 가지고 있는지 보았다. 역사는 사소한 것들은 달랐지만, 크게 보면 똑같이 반복되고 있었다. 양대리는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인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는 성장하지만, 누군가는 글을 읽지 못하고, 손이 오징어처럼 눌리고, 화장실 하나를 놓고 수백 명이 다퉈야 한다. 같은 나라에서, 혹은 같은 시대에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이 질문을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구를 위한 경제성장인가?

누구를 위한 조기은퇴인가?

누구를 위한 주식투자인가?

그저 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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