짱교수: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동일하다면’이란 뜻을 가진 라틴어입니다. 미시 경제학 교과서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 마셜의 경제학 원론에도 등장하죠. 사실 경제학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과학들이 세테리스 파리부스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게 없다면 아마 과학은 성립할 수 없을 겁니다.
양대리: 와, 그 정도예요?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짱교수: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는 법칙이 있습니다. 그럼, 물은 언제 어디서나 100도에서 끓나요? 딱 100도에서 물이 끓으려면 일정한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물, 불, 냄비 이 정도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예컨대 기압 등 대기도 중요합니다. 산처럼 높은 곳에선 기압이 낮아 100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물이 끓죠. 그래서 밥이 설익는 겁니다. 그렇다면 달나라, 화성 등에서 물이 끓으려면 완전히 다른 조건이 필요할 겁니다. 이렇게 물이 끓는 100도는 불변의 진리값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값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 위한 조건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복잡해지면 인간의 부족한 능력으로는 도무지 과학을 할 수 없죠. 그래서 과학자들은 어떤 실험을 할 때 수많은 조건 중에 일부만을 선택해 제한된 범위에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양대리: 그럼 선택받지 못한 조건들은 놓친 거잖아요. 그것들은 어떻게 하죠?
짱교수: 바로 그때 등장하는 것이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입니다. 자신이 선택한 조건들만 고려하고 다른 것들은 모두 동일하다는 전제를 까는 겁니다. 다른 조건들은 모두 동일하다는 말을 달리 말하면, 내가 선택한 조건 말고 다른 것들은 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치자는 겁니다. 아주 쉽죠? 결국 경제학이나 사회과학 등에 나오는 법칙들은 불변의 진리가 아닙니다. 어떤 특정 조건에서만 작동하는 법칙입니다. 그러니 사실 법칙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죠. 그런데 우리는 법칙이라는 낱말이 주는 인상, 즉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분위기에 압도된 채, 이걸 곧이곧대로 현실에 적용하려고 덤빕니다. 맞을 리가 없죠. 현실은 모든 변수를 가지고 있다가 꺼내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니까요. 거의 모든 이론들이 일이 벌어지고 난 후 뒤처리에 급급한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나온 결과들을 가지고 그럴싸하게 짜 맞추는 거지요.
양대리: 그렇다면 경제학자들이 주로 선택하는 조건들이 따로 있나요?
짱교수: 오호, 맞습니다. 제가 보기에 경제학파들이 주로 던지는 질문은 6개입니다. 첫째, 경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계급인가, 개인인가, 조직인가, 제도인가. 둘째,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합리적인가? 비합리적인가? 이기적인가? 복합적인가? 셋째,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예상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한가? 복잡해서 예상할 수 없는가? 넷째, 경제에서 가장 중요한 분야는 무엇인가? 생산인가? 소비인가? 교환인가? 다섯째, 경제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은 무엇인가? 자본인가? 개인의 선택인가? 생산능력의 발달인가? 제도인가? 이 모든 것인가? 여섯째, 추천하는 정책은 무엇인가? 자유시장인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인가? 등이 그것입니다.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마르크스학파, 개발주의, 오스트리아학파, 슘페터 학파, 케인스학파, 제도학파, 행동주의 등 각 경제학파들은 위 6가지 질문에 대해 비슷하거나 다르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각 학파가 만들어지고 활동했던 상황에 적당한 대답을 내놓은 결과입니다.
양대리는 경제학도 궁극적으로 믿음에 기초한다고 느껴졌다. 끝까지 파고들면 결국,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무엇이 가치있는 일인가? 라는 질문의 벽 앞에 설 수밖에 없다. 세계관, 인간관, 가치관이 윤리학이나 정치학이 아닌, 경제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우주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사실이 딱 하나 있단다. 그것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사실이다. 양대리는 책을 보면서 불변의 사실에 한 가지를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농부 이반은 이웃 보리스에게 샘이 잔뜩 나 있다. 보리스한테는 염소가 있기 때문이다. 요정이 와서 이반에게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반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보리스네 염소가 그냥 고꾸라져 죽어 버렸으면 하는 것이다. (D. 란데스, 『국가의 부와 빈곤』)
(…)
평등을 원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고, 인류 역사를 움직여 온 원동력이다.
양대리가 추가하고 싶은 불변의 사실은 인간은 불평등에 화를 낸다는 것이다. 얼핏 보기엔 잘 참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 마음 깊은 곳 어딘가에 꽁꽁 숨겨 놓고 있다가, 폭탄처럼 빵 터진다. 역사가 그걸 잘 말해주고 있다. 수많은 혁명, 전쟁, 파업들이 바로 인간의 평등 본성 때문에 벌어졌다.
그렇다면 경제는 불평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불평등과 같은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건 정치의 몫이다. 책에서 경제학이 정치적 논쟁이라고 강조한 이유를 양대리는 이제 알 수 있었다. 양대리는 그동안 시장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제발 정치가 간섭하지 말라고 수없이 들어왔다. 그래서 시장을 내버려 두면 모든 것이 경제 법칙에 따라 예상대로 움직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 시장은 다르다. 국가 차원에서 통제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장은 시장일 수 없다. 시장은 곧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의 세상, 약육강식의 정글이 될 것이다. 제 밥값을 한다면서 어린이들의 노동까지 찬양했던 작가의 모습이 양대리 눈앞에 아른거렸다.
주식투자도 별반 다르지 않다. 국가의 경제 질서가 공정하지 않다면, 투자는 도박으로 변한다. 주식투자 카페와 정보지에 넘쳐나는 작전과 내부정보는 모두 불법이다. 양대리뿐 아니라, 많은사람들이 불법이라는 것에 대해선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 정보가 정확한지, 그래서 내가 얼마나 큰 돈을 딸 수 있는지에만 온통 관심이 쏠렸다. 만약 이런 식의 투자가 성공해 누군가 대박을 터트렸다면, 그 대박은 공정하게 투자한 많은 사람들을 쪽박 차게 만든 덕에 이룬 범죄의 대박인 것이다. 남들이야 어찌 되건 내 주머니만 불릴 수 있다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겠다는 마음은 건강한 투자자가 아니라, 도박판의 타짜들이 하는 생각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양대리는 그동안 돈만 쳐다보고 달려왔던 자신의 마음이 병들었음을 알았다. 사냥개들이 눈앞에 있는 사슴을 향해 미친 듯 달리는 것처럼 자신도 그런 벌건 눈을 하고 컹컹거리며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건 아닐까.
양대리는 울적할 때마다 찾아뵙는 스님이 한 분 계시다. 스님께서는 인간의 욕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건강한 욕망과 병든 욕망이 바로 그것이다. 건강한 욕망과 병든 욕망은 다른 이웃들을 건강하게 만드는지, 아니면 병들게 만드는지 질문하면 금방 구별할 수 있다고도 하셨다.
양대리는 이제 경제학을 다르게 보게 되었다. 경제학은 오직 돈만 추구하는 학문이 아니어야 한다. 경제학은 건강한 욕망에 대한 지식이어야 한다. 이웃과 함께 성장하는 지식이어야 한다. 따라서 경제학은 윤리의 문제, 나아가 정치적 문제와 떨어져서는 생각할 수 없는 앎이어야 한다. 그 사회와 국가가 옳다고 믿고 생산한 좋은 것들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경제학이 뒷받침해야 한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 시대에는 경제학을 정치경제학으로 불렀던 건 아닐까.
양대리는 자신의 은퇴 목표를 구체적으로 바꿨다. 조기 은퇴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단순히 먹고 놀기 위한 막연한 은퇴 자금 5억이 아니게 된 것이다. 이제 그 돈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를 놓고 고민하고 나아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공부할 수 있는 학자금이 되었다. 양대리는 색다른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어졌다. 그가 하고 싶은 경제학은 숫자와 법칙으로 번쩍번쩍거리는 경제학이 아니다. 사회의 불평등을 해결하는 경제학, 갈등을 줄여주는 경제학, 병들고 아픈 욕망을 치료하는 경제학이다. 그러려면 사람에 대해서도, 역사에 대해서도, 정치에 대해서도 알아야 할 것이다. 살면서 처음으로 원하는 공부를 하게 되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아닌 이웃과 세상 전체를 향해 꿈꾸게 되었다.
그랬더니 가슴이 뛰었다.
살맛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