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소크라테스 재판은 기원전 399년에 열렸다. 이 재판 5년 전, 아테네는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 동맹군에게 졌다. 이 전쟁 직전까지 아테네는 당시 최강국이었던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발칸 반도와 흑해 등을 장악해 왔다. 따라서 이번 패전은 아테네인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국가의 운명을 걱정할 만큼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아테네에는 자신들이 갈고닦아 왔던 찬란한 문명을 위협하는 외국 출신 학자들이 이미 많이 들어와 명성과 부를 누리고 있었다. 사회 지도층들은 막대한 돈을 지불하고 이들에게 자녀 교육을 맡겼다. 이러한 돈을 낼 수 없었던 일반 시민들의 불만과 불안은 사회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재판이 벌어졌던 당시는 이러한 걱정과 불만을 잠재울 만한 정치적 희생양이 필요했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희생양으로 적당한 인물이었다. 아테네인이라면 그를 거의 모두 알았으며, 그를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몹시 싫어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잘났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못마땅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시장이나 광장에서 보란 듯이 짜증 날 정도로 집요하게 질문했다. 나아가 그는 대중적으로 사랑받던 시인이나 정치가들을 찾아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한다며 족족 창피를 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창피를 당하면, 자기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느끼는 건 자연스런 인간 본성이다. 게다가 철없는 젊은것들은 소크라테스를 흉내 내 어른들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하거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이런 상황이라면 진실이야 무엇이건 간에 원고들이 승부를 걸어볼 만한 히다. 원고들에게 필요한 건 진실이 아니었다. 배심원들의 대다수를 믿고 싶어하는 생각이었다. 설령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배심원 제도를 이용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크라테스를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혼을 돌보라
그렇다면, 이렇게 아테네 대중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소크라테스는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던 것일까?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내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여러분 가운데 젊은이에게나 나이 든 이에게나 영혼을 돌보는 것보다 우선해서, (중략), 육체나 돈을 돌보지 말라고 설득하는 일이거든요.”
소크라테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육체나 돈보다 영혼을 우선해 돌보라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우리가 보기에 별문제 없는 멋지고 좋은 말이다. 그런데 아테네인들은 왜 이 말을 하는 소크라테스가 죽이고 싶도록 미웠을까?
아테네 도시 국가 이전 고대 부족 국가의 인재상은 전쟁 영웅이었다. 호메로스의 아킬레우스가 대표적이다. 용기 있게 적과 맞서고 신출귀몰한 활쏘기와 말타기 기술을 자랑한다. 아무리 위험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절대 물러나는 법이 없다. 오직 조국을 위해, 명예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전사(戰士) 계급이 사회적으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전쟁에 나가 큰 공적을 쌓는 것은 몸이 직접 하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런 척할 수 없고, 진짜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일이다. 게다가 이런 전쟁의 영웅들은 피부터 달랐다. 신의 아들이나 적어도 왕이나 귀족의 아들 정도는 돼야 했다. 일반 시민들은 꿈도 못 꾸었다. 내가 누구 아들인지는 동네 사람들이 다 안다. 이 역시 속일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반 시민들에게도 잘 나갈 기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테네에 민주주의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눈총 받던 돈벌이 활동도 이젠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는 어엿한 직업으로 인정받았다. 나아가 나라를 다스리는 집정관도, 재판을 하는 배심원 자리도 약간의 제한이 있긴 했지만,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나 될 수 있게 되었다.
활짝 열린 민주 사회의 정치와 재판은 말로 실력을 겨룬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이겼다. 광장에서 국가 정책에 대해 멋진 연설을 하는 사람들이 대중의 입에 오르내렸고, 이내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인데도, 말재주가 적다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날려버리거나 심한 경우 죽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대가 변했다. 몸으로 싸우던 시대에서 말로 싸우던 시대로.
말로 싸우려면 뭔가 알아야 한다. 적어도 아는 체라도 해야 한다. 진짜 아느냐? 이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답이 어디 있는가? 진짜가 어디 있는가? 아무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상대방의 논리만 깨부수면 대중은 나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렇다. 말로 하는 싸움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훌륭한 사람인지 아닌지 속일 수 없었던 시대에서 이제 속일 수 있는 시대로 변했다. 말로써 결국 지식으로써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시대에서 중요한 건 교육이다. 뭔가 알아야 말도 하고 그럴듯하게 포장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때문에 말로 제대로 속이는 연설술이 각광받았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분위기에서 큰 돈을 벌었다. 지식을 돈과 교환하는 시대, 그 지식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시대, 그런 시대에 인기보다 돈보다 자기 영혼을 먼저 돌보라는 소크라테스는 회괴한 주장을 하는 별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진정한 것을 자꾸 캐물었다. 그 자체 좋은 것, 진짜 정의로운 것이 뭐냐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이 전부 모르는 것으로 변한다. 알고 있다고 자랑했는데, 알고 보니 아는 척한 것이었다. ‘아는 척’이란 모르면서 아는 것처럼 꾸민 것이다. 이런 사람을 누가 훌륭하다고 하겠는가? 이런 사람을 누가 정치 지도자나 소송대리인으로 쓰겠는가? 영혼이 벌거벗은 듯한 수치감은 이내 시기와 분노로 바뀌기 십상이다.
‘몸이나 돈보다 영혼을 먼저 돌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바로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 터져 나온 것이다. 그가 말한 영혼이란 앎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순수한 진정성이다. 인간의 앎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자기 인정이요, 우리는 신처럼 완벽하게 살 수 없다는 인간 존재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알고자 하며, 그 앎에 근거해 살아가고자 한다. 영혼을 돌보라는 그의 당부는 결국, 자기 삶을 무엇에 기초해 꾸려나가고 싶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을 진정 의미 있게 하는 것을 질문했다. 그는 그 일을 철학이라고 생각했고, 철학하는 일이 바로 신이 자신에게 명령한 일이라고 믿었다. 나아가 이러한 질문을 사람들에게 계속하는 것이 신에 대한 자신의 봉사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을 위한 쇠파리요, 전기뱀장어라고 서슴없이 주장한다. 쇠파리는 소가 잠에 빠지지 않도록 계속 귀찮게 윙윙거린다. 꼬리로 아무리 쫓아내도 떠나질 않는다. 전기뱀장어는 그냥 뱀장어인 줄 알고 덥석 잡았다가는 혼쭐이 난다. 아테네인들이 아무런 의심도, 질문도 없이 기존 지식을 답습하지 않도록 소크라테스는 그들을 지적 궁지와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것도 공짜로 말이다.
나도 모르게 회사 욕이 튀어나온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는 사회성이 있다. 여기서 사회성이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약속을 뜻한다. 그것도 생각나는 대로 대충대충 한 약속이 아니다. 사회성을 띤 약속들은 대부분 법이나 정관 등의 형태로 문서화 되어 있다. 이건 잘 정리되고 체계화되었다는 의미이고, 나아가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강제력을 발휘해서라도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튼튼한 약속 위에서 일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 내가 하고 일에 포함된 사회적 약속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의미나 사명감을 말하면 무슨 수작을 거냐는 듯 얼굴색이 돌변한다. 어떤 회사는 이를 미션이나 비전처럼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액세서리 정도로 여긴다. 그야말로 ‘~하는 척’하는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바로 이 지점을 계속 문제 삼았다.
생존만을 위해 전략적으로 일의 사명이나 의미를 이용해서도 안 된다. 전략은 수단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의 의미는 목적이다. 수단이 목적을 잡아먹을 때 인간은 당황한다.
당황한 사람이 일을 잘 할리 없다. 어리둥절한 사람이 이웃을 배려하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이 모든 게 살아남기 위해 어쩔수 없이 벌어진 일이라며 자기합리화하는 경우엔 더욱 그렇다.
확고한 사회적 약속 위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회사 욕이 튀어 나온다면, 지금 내가 앉아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일하고 있다는 증거다.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소명의식을 갖기란 세상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돈이나 인기만을 목표로 내달리면 속도를 높일수록 가족과 이웃들이 다칠 위험이 커진다. 이런 이유로 발생한 사건 사고를 우리는 너무나 잘 그리고 많이 알고 있다.
일에 대한 의미 탐구 없이 생계형 회사원으로 산다는 건, 어쩌면 우리 공동체가 나에게 부여한 의미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내 일에 맡겨진 사회적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는 마음, 그 마음이 회사 생활을 좀 더 넉넉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