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는 의미를 묻지 않는다
기계처럼 돌아가는 회사에서 부품처럼 일하다 보면 아주 가끔 이런 질문이 목에 딱 걸릴 때가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처음 몇 번은 실신 직전까지 가는 술자리, 패키지 해외여행 정도면 딱 부러진 대답 없이도 이 질문들을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질문들은 나무처럼 자란다. 이런 종류의 질문들은 답도 없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며 손사래를 치면 칠수록, 뿌리는 더 깊게 자리 잡는다. 헛기침을 아무리 해도, 밥 한 숟가락을 꿀꺽 삼켜도, 급기야 손가락을 목구멍 깊이 찔러 넣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생선 가시처럼 말이다. 숨 쉴 때마다 따끔거리고 캥 긴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와 같은 궁극의 질문들은 이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다. 나 역시 그랬다. 궁극의 질문에 제대로 답할 수 없었다. 어찌어찌 넘어갔다 싶으면 어김없이 다시 찾아 왔다.
일의 의미를 찾고 가족과 이웃을 떠올리며 에두르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나에게서 시작하지 않고, 나에게서 끝나지 않는 일은 헛발질처럼 느껴졌다. 답답하고 불안했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이기적이었다.
차라리 벌레였다면, 내 존재의 의미 따윈 찾지 않을 텐데. 음식 부스러기를 찾아 그 많은 발을 바쁘게 움직이며 살텐데. 왜 인간은 자꾸 나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그 의미를 찾도록 추궁받는지 불편했다.
그래도 그레고르 잠자처럼 벌레로 죽긴 싫었다. 가족들마저 등 돌린 존재가 된다면 정말 인생 허무하지 않나.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질문이라면 고통스럽지만 씨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수록 씨름은 사나어지고, 자주 벌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데미안이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데미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 진정, 내 안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그것을 살아 보려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나답게 사는 건 우리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의 자서전적 소설로 알려져 있다. 문학과 철학 그리고 불교에 조예가 깊었던 헤세. 그 역시 나답게 산다는 건 너무 어렵다고 한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일이라고까지 한다.
“저마다 삶은 자아를 향해 가는 길이며,
그 길을 추구해 가는 것이다. (중략)
지금껏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적이 없었음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쓴다.”
인간은 왜 완전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되려고 애쓰는 걸까? 그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다면 어쩌면 진정한 자아 따윈 없는 것이 아닐까? 결승선 없는 달리기를 언제까지 해야 하나?
헤르만 헤세가 달리는 방식은 ‘쓰기’ 이다. 그는 “내 자신의 이야기이자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아를 향해 달렸다. 그는 현실적인 한 인간의 이야기가 모든 인간의 이야기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존재는 그저 자기 자신에 머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이란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세계와 인간이라는 미로를 연결하는 안내선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별을 바라보거나 책을 들춰보며 찾지 않고, 내 몸 안의 피가 내는 소리의 메시지를 듣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내 피가 만드는 소리의 메시지! 내 생명이 세상과 부딪히며 만드는 그 소리는 과연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가.
좀 더 돈을 벌어라?
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라?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발 밑에 두어라?
『데미안』은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삶의 의미는 자기 자신만이 판단할 수 있다.”면서 밝음과 어둠이라는 분리된 두 세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