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테마 : 놀이
네덜란드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했다고 한다. 놀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이 충동이고, 놀이를 추구하는 욕망이 오늘날 인류 문명의 진보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좌우지간 그는 인간의 근본적인 특성을 '사유’도 ‘노동’도 아닌 ‘놀이’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나를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54위에 불과한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본능과 한참 동떨어진 ‘노동’과 ‘경쟁’과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스스로에게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얼마나 나의 시간을 노는 데 투자하고 있는가?’
쓸데없이 진지해 보이는 이러한 질문을 고민하게 된 이유는, 최근 나 자신이 정말 놀 줄 모르는 인간이라는 걸 새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일을 그만둔 뒤 마음 편히 놀면서 좋아하는 걸 찾고야 말겠다는 나의 호기로웠던 결심은 이미 깔끔하게 증발한 지 오래다. 이제는 잘 못 놀아도 괜찮으니, 부디 움켜쥐고 있어 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걱정으로 나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휴식을 해보기로 한 지 겨우 며칠째지만, 여전히 나의 몸과 마음은 지금껏 길들여진 관성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양이다. ‘재취업’, ‘나이’, ‘생활비’ 등 나를 삶의 유희가 아니라 삶의 무게로 인도하는 현실적인 문제와 여건이 나를 시도 때도 압박한다. ‘나는 어느새 놀이하는 본능을 상실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본능이 죽어버린 생명체를 감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와 같은 부정적인 생각만 머릿속을 맴돌 뿐이다.
퇴사를 결심했던 것도 사실 스스로가 점점 행복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소망하던 안정적인 직장이었지만 입사 후에도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불안한 앞날에 대한 걱정이 사라진 자리를 이제는 업무와 인간관계에 대한 근심이 대신하기 시작했으니까. 직무 자체는 업무량이 많은 편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지만 좋아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음은 물론, 연차가 쌓인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해도 그다지 큰 기대감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인내하고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되어주는 삶의 또 다른 즐거움이나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나는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즐거움이 기대되지 않는 첩첩산중의 직장생활을 이어나가기를 멈추고, 내가 조금이라도 여유롭게 숨을 쉴 수 있는 삶의 작은 틈새를 발견하여 그곳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도전을 해보는 선택 말이다. 그 시작은 당연히 지친 마음을 달래면서 좋아하는 것들을 해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막상 멍석을 깔아 놓고 보니 재미있게 놀기는커녕, 멍석에조차 편히 누워있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웃음과 슬픔이 교차하는 현실이 이런 것인가 했다.
그래도 며칠간의 휴식을 통해 얻은 소득도 있었다. 음악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 점이다. 음악은 내 삶 속의 수많은 감정을 한층 더 풍부하고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친구다. 기분이 좋지 않거나 머릿속이 복잡할 때,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아이돌 레드벨벳의 음악이 풍기는 그루브에 온몸을 맡겨가며 잊고 지내던 흥에 취하기도 하고, 빌보드 핫100 차트에 올랐던 곡들은 연달아 재생시키며 바다 건너에 있는 이국적 리듬과 정서에 빠져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의 영혼을 도둑질하는 음악은 작곡가 한스 짐머의 곡들이다. 그의 수많은 영화 음악들은 서울특별시 등촌동에 거주 중인 지극히 평범한 나라는 존재를 거대한 영화 서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 가끔은 영화 <인터스텔라>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주복을 입고 우주를 배회하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떨 때는 <글래디에이터> 속 검투사들이 싸우는 로마의 콜로세움에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한 마디로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청각뿐만 아니라, 보고(시각), 느끼고(촉각), 맡고(후각), 맛보는(촉각) 오감이 열린다. 예술의 위대함은 향유하는 이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런 점에서 한스 짐머의 음악은 내게 의심할 여지 없는 예술의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영화 OST라는 장르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생겨서, 최근에 숨어있는 다양한 명곡들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부디 이러한 나의 소소한 취미가 재미있는 놀이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니, 어쩌면 이미 벌써 놀이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대문호 마르셀 프루스트는 홍차에 적신 마들렌을 먹다가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마들렌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자, 그는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고모가 건네주던 마들렌을 떠올렸고, 그렇게 불현듯 떠오른 과거의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풀리면서 잊고 지내던 또 다른 수많은 기억이 소환됐다고 한다. 마들렌의 냄새를 맡는 경험이 의식 아래에 저장돼 있던 생생한 기억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리는 일종의 촉매제 역할을 했고, 여기서 비롯된 영감이 예술적 성취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감히 프루스트와 비교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음악은 내게 그와 비슷한 체험을 선사하는 것 같다. 과거에 재밌게 봤던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나를 데려다 놓기도 하고, 대학 시절 동아리 방에서 밤새 노래하며 놀았던 선후배와의 기억을 복원시키기도 한다.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당시만의 특유의 느낌까지 그대로 전달될 만큼 제법 구체적으로 말이다. 마들렌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의 경우는 냄새(후각)가 아니라 소리(청각)라는 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음악을 듣는 일이 내게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줄 것이라곤 기대하지 않고 그저 과거의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던 다양한 순간을 내게 다시금 불러와서, 내가 조금이나마 놀이하는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줬으면 하는 소망뿐이다. 잊어버린 본능을 되살리기 위한 나의 여정이 계속되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