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게으른유목민 Feb 24. 2020

#유목민의 하루

두 번째 테마 : 『남아있는 나날』 -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있는 나날』을 읽기로 결심한 것은 서울 시내에 있는 한 서점을 방문한 뒤였다. ‘노들서가’라고 불리는 그곳에서는 글을 쓰는 작가들의 추천 도서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일상작가의 서재’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소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 좋아하는 글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두고 있던 나는 우연히 마주친 그 공간에 흥미를 느꼈고, 그렇게 발걸음을 멈춘 채 진열된 책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의 시선에 들어온 책이 한 권 있었으니 바로 『남아있는 나날』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제목인 것 같아 기억을 잘 되새겨보니 201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었다. 문득 책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노벨 문학상을 통해 국제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데다, 현직 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할 만한 책이라면 분명히 읽는 이로 하여금 대단한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는 작품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길지 않은 분량도 마음에 들었다. 책의 두께가 부담이 없어서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수준 높은 감동과 의미를 체험할 수 있는 효율성(?) 높은 독서 경험이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벨 문학상이라는 이름값과 작가라는 직업적 권위에 기댄 다소 부끄럽지만, 전략적인 도서 선택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소설의 내용은 영국의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살아온 스티븐스가 생애 처음으로 떠난 여행에서 마주하는 인물과 사건, 그리고 여행 도중 시시각각 스쳐 지나가는 지나간 삶에 대한 회상들로 채워져 있다. 이야기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스티븐스의 시점에서 전개되며, 그렇다 보니 그가 여행지에서 새롭게 겪는 경험에 관한 서술보다는 집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저택의 주인을 섬기며 보내왔던 과거를 반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소설의 마지막에선 주인공이 지난날 자신의 삶이 원하는 방향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며 과거에 대해 자책을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끝이 난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정말이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일종의 무념무상의 상태라고 할까. 평소에 영화나 책을 접하고 나면 작품의 주제 의식에 관한 쓸데없는 잡담 혹은 평가가 입안에서 맴돌기 마련이었는데, 『남아있는 나날』의 경우엔 읽고 난 뒤에도 해야 할 말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고, 말을 해야 할 필요성도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책을 덮는 순간에 가장 먼저 하고 했던 일은 어서 빨리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가 가슴 한구석에서 미세하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감과 씁쓸함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나는 문학적 소양이 부족하여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 자신을 위로하며 금세 잠이 들었다.


『남아있는 나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것은 며칠 후 있었던 친구와의 저녁 식사 때문이었다. 그날, 나는 유독 친구에게 과거에 대한 한탄을 늘어놓고 있었다. 주제는 ‘후회’ 내지 ‘회한’에 관한 것이었고, 그 밑바탕에 깔린 주된 정서는 ‘자책’이었던 것 같다. ‘취직해봤자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줄 알았다면 대학교 때 조금 더 놀아볼걸......’와 같은 진부한 이야기부터 ‘그때 그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 좀 더 나은 삶을 살았을 텐데...’와 같은 쓸데없는 가정까지 다양하고도 복잡한 한탄의 멜로디가 줄줄이 쏟아졌다. 그렇게 내가 한참을 주저리주저리 입을 놀리고 있던 와중이었다. 친구가 갑자기 버럭 신경질을 내며 내게 쏘아붙였다. “너는 어째서 하는 얘기의 99%가 과거 시제냐. 뒤만 돌아보다간 고개가 영영 앞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한탄만 늘어놓는 나 자신이 한심해서도 아니었고, 리버풀이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해있는 작금의 이슈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는 스스로가 바보 같아서도 아니었다. 내가 정말 충격을 받았던 것은 친구 녀석이 해준 그 말을 그대로 옮겨서 전해주고 싶은 사람을 나도 한 명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바로 얼마 전에 읽었던 소설책의 주인공이자,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헌신해 왔으며, 나이가 들어 처음 떠난 여행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삶이 사랑, 기쁨, 슬픔과 같은 기타 등등의 감정에 솔직해져 본 적 없는 남루한 인생이었다는 걸 깨달은 스티븐스였다. 문득 책을 읽고 난 직후 내가 느꼈던 공허함과 씁쓸함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짐작건대 소설 속 주인공의 모습에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데서 비롯되는 불편함의 감정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하려면 소설 속에서 일관적으로 드러나는 스티븐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설명해야 할 것 같다.     


『남아있는 나날』에 등장하는 스티븐스의 회상에는 한 가지 미묘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더듬는 과거의 기억들이 대부분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집사’로 살아왔는지를 지나치게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본인이 생각하는 ‘품위’의 개념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도 하고, 자신이 ‘품위를 갖춘 집사’로서 빈틈없이 업무를 수행했다는 사실을 제법 자세하게 들려주기도 한다. 마치 우리 사회의 기성 어른들이 “라(나)떼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과거의 일대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듯 겉으로는 집사라는 직업이 갖는 특성과 직업 정신에 대한 본인의 확고한 철학을 전해주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나름대로 훌륭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담긴 스티븐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로서도 짜증을 참기 어려웠던 것 같다. 정말이지 그가 나의 지인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너는 어째서 하는 얘기의 99%가 과거 이야기냐. 뒤만 돌아보다간 고개가 영영 앞을 보지 못할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티븐스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포함하여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혀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가 살아온 ‘품위 있는 집사’로서 삶은 그가 추구해온 삶 방식이 잘못되지 않았음을 증명해줄 뿐만 아니라, 가족도 친구도 없이 외롭게 사는 그를 지탱해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삶의 의미처럼 보였다. 집사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를 포기했던 그의 선택, 집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동료 집사였던 켄턴 양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애써 무시했던 그의 결심 등, 어찌 보면 비겁해 보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여겨지는 그의 선택들을 비난하는 것은 소설 속 주인공이 견뎌온 삶의 무게를 고려해볼 때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소설의 ‘해피 엔딩’을 바랐다. 스티븐스가 여행의 마지막에서 켄턴 양과 재회를 통해 오랫동안 간직해온 각자의 마음을 확인하고 새로운 삶의 국면으로 접어들기를 원했다. 다소 통속적인 연애소설의 결말처럼 보일지라도 그편이 그를 위해서도, 몰입하여 소설을 읽는 나의 마음이 편해지는 데도 훨씬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남아있는 나날』은 독자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았고, 나는 삶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 스티븐스의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지나간 날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본인에게 남아있음을 확인한다. 자신의 삶은 뜻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는 것도 정직하게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을 자책한다. 더불어 깨닫는다. 집사로서의 직업 정신을 수호하는 것을 지고의 가치라 여겨왔던 자신의 삶을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도, 돌아올 리 없는 과거를 곱씹으며 지나친 슬픔에 젖어있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책을 읽고 불편함을 느낀 지점도 바로 이 결말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우리의 인생이 남루하지 않다는 걸 확인받으려 하거나, 거꾸로 현재의 남루함을 설명하기 위해 과거로 회귀하는 습관 모두가 우리의 삶이 나아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받아들여야 하지만 동시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기에 씁쓸함과 공허함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다.      


다행인 점은 스티븐스의 앞날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작품이 끝을 맺고 있다는 점이었다. 걱정과는 달리 그는 과거의 기억 속에 빠져있기보다 다가올 인생에 집중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본업인 집사의 역할에 충실히 매진하기로 마음먹는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그의 선택에서 특별한 변화의 징조를 읽어내는 것이 조금은 무리일 수 있지만, 나는 그에게 펼쳐질 앞으로의 나날에서 희망의 싹이 돋아나리라는 생각을 거둘 수 없었다. 바로 작품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가 했던 ‘어떤 말’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바로 저런 거구나 싶다. 어쩌면 좀 전에 내 옆에 앉았던 노인도 나와 농담이나 주고받으려 한 것인지 모른다.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본의 아니게 실망만 안겨 준 셈이다. 이제 정말 농담의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탐닉한다고 해서 크게 어리석은 것도 아니다. 농담을 주고받는 것이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남아있는 나날』


농담을 연마해서 인간의 따뜻함을 느껴보려는 그의 모습을 확인하니, 그가 더 이상 과거를 돌아보면서 시간을 허비하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도 그의 고개는 앞을 향하고 있고, 이전처럼 집사로서의 품위를 지키려는 부담감을 조금은 내려놓은 채 사람들과 감정을 교류하며 살아갈 것 같았다. 이것이 내가 그나마 『남아있는 나날』에서 발견한 작은 희망의 불씨였다.     


책에 대한 단상을 한바탕 글로 정리해본 뒤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생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농담 실력’을 갈고닦아 보자는 것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작은 유머 모음집이라도 사서 정독해야겠다. 농담을 풀어내고, 그럼으로써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이 자신을 내려놓고 팍팍하지 않게 세상을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과거사 정리’의 필요성이다. 과거의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면 글을 써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누군가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 무언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운동도 명상도 아니고 글을 써서 무언가를 묘사해보는 것뿐이라고.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발목 잡혀 있거나 사로잡혀 있는 대상에 대해 거리를 두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니까. 그렇게 정리의 시간을 갖게 되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여지 또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한다. 그래야 정면을 응시할 수 있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까.               




작가의 이전글 #유목민의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