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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Dec 11. 2020

책은 인간과 닮았다

모든 책이 가치가 있기를



나는 책이 좋다. 책을 넘길 때 느껴지는 종이 질감 때문에 좋다. 표지와 속지를 넘길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중독성이 있다. 그래서 종이책이 좋다.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많은데 종이를 넘길 때 감촉은 새책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 세 번 읽을 때 이전에 알아차리지 못했던 의미들을 발견하는 순간들이 좋다. 책을 좋아하지만 읽은 책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동일한 기호 형식이 다양하게 변신한다는 신비로움 때문이다. 하얗고도 누르스름한 종이 위에 짙은 색의 기호들, 모두 똑같은 형식이지만 선택된 기호를 어떻게 조합하는지에 따라 그것이 발산하는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때는 2,500여 년 전 투키디데스의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린다. 헤로도토스의 음성도 들린다. (난 미치지 않았다...) 그들이 한국어를 했을 리 만무하지만 내 머릿속 그들은 분명 또박또박 한국어로 말하고 있다. 조금은 문어체가 가지는 어색함이 느껴지지만 분명 친근하고 따뜻한 목소리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열정과 환희 그리고 전쟁에서조차 삶에 대해 의미를 찾고자 했던 그들의 명량하고 거친 숨소리가 담겨 있다. 햇살 부서지는 새하얀 모래에 대비되는 검푸른 바다와 하늘빛이 그들 목소리와 잘 어울린다. 


그리고 때로는 19세기 암울한 공기가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절망과 고독 그러나 그 속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다. 2,500여 년 전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19세기 공기는 차갑고 건조하며 때로는 축축하다. 짙은 먹구름 속을 간간히 뚫고 내려오는 햇빛은 거친 산맥과 광야와 숲들을 어눌하게 짓누른다. 역시 그들 목소리나 어조와 잘 맞다.


이 모든 것이 똑같은 종이와 잉크로 쓴 기호로부터 발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은 인간과 닮아 있다. 생김새가 비슷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동일하다고 해도 어느 하나 똑같은 삶을 보여주지 않는 것과 같다. 다양성을 발산하고 풍요로움을 전달하는 책을 사랑하듯 인간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과 기만과 독선과 탐욕으로 똘똘 뭉친 책을 증오하듯 인간도 증오하게 된다. 모든 책은 가치가 있다는 뜻을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아직 내 수양이 부족해서일 테다. 그러나 좋은 책만 보기에도 내 인생은 턱없이 부족하다. 얼마나 다행인가. 굳이 싫은 책을 찾아볼 시간은 없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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