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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얀들불 Dec 20. 2020

공감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필요하다

아파트 단지를 산책 중이었다. 놀이터에서 아빠를 따라 걸어 나오는 딸이 보였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가면 아버지와 딸 사이를 내가 가로지르게 되는 셈이다. 그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들이 걸어가는 방향 뒤쪽으로 돌아가려고 방향을 조금 틀었다. 그때였다. 그들보다 몇 발자국 뒤에서 앙칼진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이터에 나가자고 한 사람이 데리고 가야지! 야! ooo(아빠 이름)!"


처음 멀리서 볼 때는, 아주 잠깐이지만 휴일 부녀의 따뜻한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엄마인듯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고 갑자기 머릿속에 하나의 영상이 떠올랐다. 엄마는 키즈놀이터가 있는 쇼핑몰에서 아이들을 맡겨놓고 쇼핑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면 집에 그냥 머물고 싶었던지. 아무튼 아파트 놀이터를 원했던 건 아니다. 아빠는 분명 휴일, 그것도 일요일 오후 늦게 굳이 막히는 도로에서 힘들게 쇼핑몰에 다녀오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쇼핑몰이든 놀이터든 어디든 나가고 싶었을 테다. 아이들이 칭얼대는 상황을 빨리 수습하고 싶어 아빠는 얼른 아파트 놀이터를 목적지로 정했을 것이다. 딸의 걸음걸이가 경쾌함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아 아빠 결정을 좋아했던 건 아닌 듯하다. 아니면 일찍 집으로 돌아가게 된 상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가 다투는 게 싫었을지도. 막내아들 녀석만 아무것도 모른 채 신나서 아직 놀이터에 있다. 아빠와 누나 그리고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미끄럼틀에만 집중하고 있다. 말을 듣지 않는 막내를 데리고 들어가라고 엄마는 아빠에게 소리를 지른다. 부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흐뭇했던 마음은 곧 그렇게 무거워졌다. 아빠 엄마 사이에서 어쩔 줄 모르는 딸아이가 어떤 마음일지 생각하게 되자 우울해져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지나쳐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의 산책이 끝날 때쯤 아파트 구석진 곳을 지나치면서 다시 그 아빠와 마주쳤다. 그는 이제 혼자였다. 그런데 그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분노와 증오에 찬 그가 갑자기 나를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그런 생각이 왜 그 순간에 떠올랐을까? 축 처진 어깨와 땅에 끌릴 듯 걷는 그의 걸음걸이 때문이었을까. 그런 것 같다. 그 무거운 걸음걸이에서 세상에 대한 체념으로 인해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감정이 너무나 뚜렷하게 내게 전달되었다. 마치 내 속에서 체념과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난 특별한 감정 없이 평소처럼 산책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내 마음속에 뚜렷이 떠올렸던 것이다. 딱히 설명하기 힘들지만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원망 혹은 가족들의 무관심에 대한 분노가 섞인 느낌이었던 것 같다. 역시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들다.


인식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칸트는 '대상'이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그것을 '대상'으로써 존재하게 한다는 발상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래서 태양과 지구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한 코페르니쿠스의 성과에 비유한 것이다. 이것은 감정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감정과 정념들은 하나의 마음속 저장고에 계속 쌓이고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 놓인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자신의 저장고에서 끄집어낸 하나의 감정을 그 상대에게 투영해 보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현상일 뿐 그 본질에 해당하는 '물자체'는 인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상대방이 느끼고 있는 감정 또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평소와 다름없이 산책을 하던 중 체념과 분노와 애증의 감정을 떠올리게 했던, 그 사람의 원래 감정 또한 어떠한 것인지 전혀 알 길이 없다. 혹시라도 그가 산책하던 나를 붙잡고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들을 나에게 말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나는 결코 그가 경험하고 있는 감정을 온전히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내가 가진 감정과 정념의 저장고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것들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에 대한 경험과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망상이다. 내 감정을 공감해주고 이해해줄 사람을 찾을 때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좋겠다. 망상이 도움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오히려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감정(정념)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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