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중독의 최후

불행의 디테일을 써 내려갈수록 나는 고쳐지고 있었다

by 다송

한동안 한 의류 쇼핑몰의 VIP 회원이었다. VIP는 1년 누적 구매 기준으로 매달 갱신되기 때문에 유지를 위해선 달마다 적정량 이상의 쇼핑을 해야 했다. 그걸 유지하려는 노력은 아니었지만 꽤 오랫동안 VIP 등급이었던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쇼핑에 미쳐있었는지 알 만하다. 옷이 차고 넘치다 못해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도 사도 끝없이 사고 싶었다. 문제는 사고 나면 막상 예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옷은 죄가 없다.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해 보고 사봤지만 반짝 입고 나선 싫증 나고 또 다른 옷이 사고 싶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사모은 옷들이 옷장에 넘쳐났다.


주문하고 택배가 도착하면 새 옷을 입을 때 잠깐 느끼는 도파민, 그게 다였다. 며칠 못 가 옷도 나도 볼품없어 보이기 일쑤였다. 매일 쇼핑몰 앱에 들어가 무엇을 살지 고민했다. 겨우 한 두 번 입고 나면 막상 마음에 들지 않아 예쁜 쓰레기가 쌓여가던 옷장, 돈도 쓰고 마음도 썼지만 쌓이는 게 쓰레기라니. 자꾸만 내가 한심해졌다.


구매 전엔 늘 허락을 구했다. 친구에게, 동생에게 보여주고 흡족한 반응을 얻으면 결제 버튼을 눌렀다. 내가 예쁜 옷이 아니라 철저히 남의 눈에 비친 나를 계산했다. 예뻐 보이고 싶었다. 남들이 나를 예쁘게 봐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는 간과한 채. 뒤틀리고 엇갈린 마음은 거울 앞에선 나를 자꾸만 위축되게 했다.


옷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마음이 고장 난 거였다. 마음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폭식하듯 나는 옷을 샀다. 사도 사도 성에 차지 않았던 건 옷으론 채워지지도 해결되지도 않는 오래 묵은 상흔 때문이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는 옷으로 채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엉뚱한 곳에 냅다 바르는 빨간약 같았다.


그러던 내게 찾아온 글쓰기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매일매일 나를 돌아보는 글을 썼다. 지난 시간을 정리하며 글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그 과정에서 미해결 된 수많은 감정들이 불쑥 올라왔다. 분노, 우울, 불안, 수치, 실망감, 서운함을 비롯한 아픈 감정에 이어 고요, 따뜻, 뭉클, 희망, 감사와 같은 포근한 감정들까지. 모든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매일 글을 쓰며 때론 울어가며.


불행의 디테일을 써 내려갈수록 나는 고쳐지고 있었다. 왜 내가 그토록 불안했는지, 왜 그렇게 옷을 사재 꼈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 참, 나를 오랫동안 미워해왔구나. 앓고 앓아 이렇게나 아름다워졌구나.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부터 신기하게도 옷을 사지 않았다. 쇼핑몰 기록을 보니 올해 구매한 목록은 단 2건, 더 이상 VIP가 아니다. 이제 일개 회원이 된 나는 쇼핑몰 앱을 보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흰 화면에 나를 마주 본다. 오늘도 조용히 나를 까만 글씨로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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