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하거나 실망시키는 일
관계 실패 후 깨달은 것들
겁이 많은 편에 속한다.
작은 벌레 하나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육교를 걸을 땐 정중앙으로 걸어야 한다.
낯선 길을 만나면 심지어 무섭기까지 하다.
전형적인 쫄보는 선택의 순간마다 큰 어려움을 느낀다.
그중에서도 메뉴 선택은 인생 최대 난제다.
뭘 먹을까? 골똘히 고민하다 겨우 하나를 고른다.
만약 식당이 맛없을 경우,
실패한 메뉴를 고른 미안함에 함께 간 이에게 연신 사과를 한다.
난 이게 좋아! 이걸 먹는 게 어때?
먹고 싶은 게 대체로 확실한 친구를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우스운 마음 조림엔 숨겨진 비밀이 있다.
미안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으려는 심보다.
메뉴 선정에 실패하는 두려움 깊은 곳엔
관계에 실패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득했다.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특히 가까운 사이라면 더욱.
실망시키지 않으려면 실패하지 않아야 했다.
음식을 고르는 것뿐 아니라
말 한마디에도 세심히 단어를 골랐다.
고르고 고른 리액션은 상대를 만족시키기 충분했다.
관계에서 실망이나 서운함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필연적이라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갈등 없는 좋은 관계에만 집착했다.
그러다 가장 가까운 친구를 실망시키는 일이 있었다.
그와의 갈등은 음식 때문도 한두 문장의 말 때문도 아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관계엔 틈이 생기기 마련인데
내겐 그걸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살면서 맺은 관계 중 가장 큰 실패였다.
나는 보기 좋게 무너졌다.
절절히 사랑하던 애인을 잃은 것처럼 굴었다.
밤마다 꿈에 등장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미련을 뚝뚝 남기며 옛 사진이나 대화를 곱씹었다.
벌레도 무섭고 높은 곳도 무섭지만
사람을 잃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이었다.
크게 휘청이다 겨우 제자리를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단 한 사람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던 시절이
얼마나 치기 어린 마음이었는지를 생각한다.
애석하게도 가장 큰 사람을 잃고 나서야 마음이 유연해졌다.
나도 언제든 상대를 실망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
이 관계는 언제든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마음이 가벼워지고 나를 둘러싼 관계가 심플해졌다.
실망하거나 실망시키며 누군가를 잃기도 하는 일들이
앞으로 내 생에 얼마나 더 반복될까.
영속적인 건 그림이나 사진뿐이겠지,
그마저도 낡아갈 테고.
그런 사실을 생각하며 잠시 쓸쓸해졌다가
영영 붙잡고 싶은 이들을 떠올려본다.